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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기행⑮실크로드의 영웅과 종교

이치란 | 기사입력 2016/05/30 [07:33]
한 무제, 장건, 알렉산더대왕, 카니슈카대왕. 칭기즈칸 등의 종교관

실크로드기행⑮실크로드의 영웅과 종교

한 무제, 장건, 알렉산더대왕, 카니슈카대왕. 칭기즈칸 등의 종교관

이치란 | 입력 : 2016/05/30 [07:33]
한 무제, 장건, 알렉산더대왕, 카니슈카대왕. 칭기즈칸 등의 종교관-
풍전등화 같은 草露人生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영웅들의 실크로드 선상 浮沈

 
▲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토론을 즐겼던 그리스 아테네의 아고라 광장에서 필자 이치란 박사.     © 매일종교신문

실크로드 선상에는 역사상 수많은 인물들이 부침하면서, 영고성쇠(榮枯盛衰)의 인간만사(人間萬事)를 보여주고 있다. 시대와 기회를 잘 만나면 영웅이 되고, 불운하면 역적이 되기도 하고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비참함을 당하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초로인생(草露人生)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무대가 바로 실크로드였다.
 
영웅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가 되겠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는 전쟁에서 이긴 정복자를 대개 영웅으로 쳐주는 것 같다. 하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어떤 문화적 종교적 역할을 크게 해낸 인물을 영웅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대상(隊商)의 지도자를 영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적어도 영웅호걸의 칭호를 부여하려면 전쟁영웅이 아닐까 한다. 2천년의 역사를 지닌 실크로드 선상에서 전쟁영웅들은 수없이 명멸했다. 그 많은 전쟁영웅들을 여기서 다 다룬다는 것은 무리이고, 굵직한 몇 사람만을 다뤄보고, 그들의 종교관은 무엇이었나를 살펴보는 것도, 매일종교 신문의 취지에 맞지 않을까 한다. 한 무제 장건 알렉산더대왕 카니슈카대왕 칭기즈칸 등의 종교관을 주마간산 격으로 리서치 해보고자 한다.
 
▲ 서역 실크로드개척을 명령한 한 나라 무제(재위 141BCE~87BCE)     © 매일종교신문
▲ 둔황 막고굴 제323굴 북벽의 장건(?~114BCE)출사서역도, 당나라초기 작품.     © 매일종교신문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보는 실크로드의 초기 영웅은 한 나라 무제와 장건 장군이라고 하겠다. 전한(前漢 202BCE-8CE)은 서한이라고도 하는데, 이 당시의 종교는 사당이나 어떤 특별한 처소에서 동물희생으로 하늘 자연 등의 신과 정령에게 음식을 차려 놓고 기원하는 정도였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사람은 혼(魂)과 백(魄) 두 가지의 영혼이 존재한다고 봤고, 사람이 죽으면 혼은 불멸의 천국으로 여행을 가고, 육신은 지상의 무덤에 남게 되고, 종교의례에 의해서 영과 육은 재결합 한다는 믿음 정도였다. 대체로 고대 중국에서 황제의 종교적 역할은 하늘에 희생을 바칠 때, 최고 성직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서역 개척을 처음 명령한 전한의 한 무제는 이 정도의 종교적 역할이었고, 장건 장군 역시 이런 원시 종교적 제주(祭主) 역할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중국에 실질적으로 불교의 수용은 후 한의 명제 때이다. 하지만 중국은 기원전에도 불교와의 접촉을 비단길을 통해 중국을 방문했던 대상(隊商)이나 사절(使節) 중에 불교 신자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당시 서역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대승 불교와 소승 불교가 함께 행해지고 있었는데, 인도 불교가 아닌 서역화된 불교였다. 중국에 처음 전해진 불교는 이러한 서역 불교였다.
 
▲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교육을 받고 있는 알렉산더대왕.     © 매일종교신문

알렉산더대왕은 그리스어로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356BCE~323BCE)이다. 고대 그리스 북부의 왕국 마케돈의 아르게아다이 왕조 제26대 군주였다. 그리스 폴리스 제국(諸國)과 오리엔트 지방에 대한 공격적 팽창으로 패권을 잡아 마케돈의 바실레우스(군왕), 코린토스 동맹의 헤게몬(패자), 페르시아의 샤한샤(왕중왕), 이집트의 파라오를 겸임하고 스스로를 퀴리오스 티스 아시아스(아시아의 主)라고 칭하였다. 알렉산더가 13세가 되었을 때, 부왕은 그를 위한 교사를 찾기 시작했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선택했다. 알렉산더를 가르친 보상으로 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을 재건하는 등, 많은 혜택을 부여했다. 알렉산더는 성장해서 그리스 일대를 정복하고 소아시아 이집트까지 손에 넣고 페르시아를 정복했다.
 
페르시아를 정복한 후, 알렉산더는 인도원정에 나섰다. 알렉산더의 유산은 그의 군사적인 정복을 넘어서서, 그리스문화를 전파했다는 사실이다. 북서부 인도대륙에 가장 강력한 그리스 왕국을 만들었다. 알렉산더는 원정을 하던 도중에 비록 사망했지만, 그는 여러 곳에 그리스문화와 헬레니즘이라는 유산을 남겼다. 헬레니즘 문명은 기원전 323년에서 146년 사이에 그리스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한 시대를 말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 서남아시아에서 고대 이집트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발전했다. 그리스 문화와 언어가 그리스인 지배자들과 함께 새 제국 전역에 널리 퍼졌으며, 반대로 헬레니즘 왕국들은 각 지역 토착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어 지역 관습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 대다수는 다신교를 믿었고, 종교적 신앙 체계는 남신과 여신이었다. 고대 그리스 종교의 주류는 다신교였지만 스토아 철학의 철학자들과 플라톤 철학의 몇몇 유파의 종교적·철학적 표현에는 초월적인 단일 신을 상정하기도 했다.
 
알렉산더 사후이긴 하지만, 중앙아시아에 그리스-박트리아 왕국(250BCE-125 BCE)이 세워졌는데, 이 왕국은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를 지배했던 고대 왕국이다. 기원전 180년 그리스-박트리아인들은 북인도까지 뻗어나갔으며 이들은 인도-그리스 왕국(180BCE-10 CE)을 세웠다. 인도-그리스 왕국은 기원전 마지막 두 세기 동안, 인도의 북서부와 북부의 다양한 지역을 30명 이상의 왕에 의해 다스려졌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그레코)-불교가 탄생하게 된다.
 
그리스-불교는 기원전 4세기와 기원후 5세기 사이, 현대 아프가니스탄, 인도, 파키스탄의 영토에 해당하는 박트리아와 인도 亞대륙 사이에서 발전한 그리스주의 문화와 불교의 문화적 혼합주의를 의미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에서 인도에 그리스인 진출로 시작되고 인도-그리스 왕국의 설립에 의해 추가로 실시하고 그리스화한 쿠샨 제국의 번영 동안, 상호 작용의 긴 일련의 문화적 결과였다. 그리스-불교는 특히 대승 불교의 예술과 교리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불교는 후에 궁극적으로 중앙아시아를 경유하여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 전파되어 대승불교를 꽃피웠다.
 
▲ 메난더 왕이 새겨진 은화.     © 매일종교신문

메난더 1세(Menander I:165BCE–130 BCE)는 인도-그리스왕국의 왕으로서 북부인도에 큰 제국을 건설했고, 불교전파의 대후원자였다.《밀린다왕문경(Milinda王問經)》은《밀린다팡하(Milinda Pañha)》의 한역으로《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이라고 하는데, 경이라고 하지만 불설(佛說)이 아니며, 빨리어 삼장에서는 장외(藏外)에 들어 있다.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서북 인도를 지배한 인도-그리스 왕국(박트리아)의 국왕인 그리스인 밀린다가 비구 나가세나(那先比丘)에게 불교 교리에 대해서 질문하면 나가세나가가 이에 해답(解答)을 하는 대화 형식으로 성립된 경전으로서, 완성된 시기는 기원전 1세기 후반에서 기원후 1세기 전반 사이인 것으로 보고 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菩薩bodhisattva)은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 또는 여러 생을 거치며 선업을 닦아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른 위대한 사람을 뜻한다. 부파불교 시대에서 보살이라 하면 전생시대(前生時代)의 고타마 붓다 한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이었는데, 대승불교가 일어난 후로는 모든 사람이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입장에서 불교의 수행자 모두가 부처의 후보자로서 보살이라고 칭해지게 되었다. 이런 관념상의 확장은 그리스 사상의 영향이 아닌가 하는 추정이다. 더욱 체계적인 연구와 정리가 필요하겠지만,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알렉산더의 종교관은 뚜렷하지 않지만, 그로 인하여 그레코-불교가 탄생하는데, 원인(遠因)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또한 그리스-인도 왕국을 계승한 쿠샨왕조가 불전결집을 후원하는 등, 사실상 불교를 중국에 전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에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은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정리해 보자.
 
▲ 밀린다 왕이 나가세나 비구에게 불교에 대해서 묻는 장면.     © 매일종교신문

쿠샨 왕조(105-250CE)는 타지키스탄, 카스피 해, 아프가니스탄, 갠지스 강 상류를 가로지르던 제국이었다. 월지 민족이 세웠으며, 중국, 로마 제국,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 등과 교역했다. 처음 쿠샨 왕조는 그들이 정복한 박트리아의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리스 문자를 썼고, 그리스를 본 따서 동전을 만들기도 했다. 쿠샨 왕조는 인도양을 통한 무역과 실크 로드를 연결해 주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쿠샨 왕조는 동서양의 문화를 포용, 그리스 문화와 불교문화가 융합된 그리스적인 불교가 발달하게 하였는데, 이는 사방으로 퍼져 중국에는 대승불교로서 전해졌다. 쿠샨의 카니슈카 1세(2세기경)는 인도의 아소카, 북인도의 하르샤(Harsha590–647)왕과 메난더 1세와 함께 불교를 부흥시킨 왕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하고 있다. 그는 카슈미르에서 제4차 불교경전결집회의를 소집했는데, 이는 대승불교가 부파불교(아함경)에서 분리, 산스크리트어로 경전을 재편집했다.
 
▲ 카니슈카 왕이 새겨진 금화.     © 매일종교신문

카니슈카는 인도 쿠샨 왕조의 제3대 왕이다. 아소카 왕 이래 대국가를 건설하고 페샤와르에 도읍을 정하였다. 당시에는 불교가 성하고, 그리스 조각의 영향을 받아 불상 제작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 불교 미술은 불상이 만들어진 지방이 북서 인도의 간다라 부근이었기 때문에 ‘간다라 미술'이라고 불린다. 불교에서는 그를 아소카 왕과 함께 불교의 대보호자로 불러왔다. 불교학자이면서 시인인 아슈바고샤(馬鳴)나 大 학승 나가르주나(龍樹)가 활약했다고 한다. 그러나 카니슈카 왕이 불교와 함께 그리스의 여러 신의 숭배와 조로아스터교·힌두교 등을 보호했음을 알 수 있는데, 신상(神像)이 당시의 화폐에 새겨져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크로드선상에서 명멸했던 굵직한 영웅호걸들은 수없이 많다. 서양에서는 아틸라(Attila406~453CE)를 매우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아틸라는 훈족 최후의 왕이며 유럽 훈족 가운데 가장 강력한 왕이었다.
 
▲ 훈족의 마지막 왕 아틸라 초상.     © 매일종교신문

서구인에게 아틸라는 공포의 대명사다. 무수한 이민족이 유럽을 침략했지만,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은 것은 아틸라가 이끌었던 훈족과 칭기즈칸의 몽골족이다. 아틸라는 신기술을 도입해서 전력을 보강하는 혁신적인 인물이었으며 황금을 멀리할 정도로 강한 절제력이 있었고 자신의 운명에 대한 강한 자신감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위대함은 유목부족에 지나지 않던 훈족을 거대한 국가로 키워냈다는 점이다. 두려움과 황금으로 부하들을 통제한 점이나, 자신들의 전투스타일에 맞는 전쟁형태를 찾아낸 것 역시 그가 훈제국의 왕으로서 이룬 업적들이다. 무엇보다 유럽인들을 놀라게 한 인물로서 자리매김 된 역사적인 인물이다.
 
▲ 아틸라의 훈 제국 최대 판도(5세기).     © 매일종교신문

아틸라의 종교도 뚜렷한 것은 없지만, 샤머니즘과 텡그리즘 정도였다.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유럽에서는 아틸라의 존재에 대해서 공포 그 자체였다. 이탈리아, 갈리아, 게르만, 영국, 스칸디나비아에서 그를 소재로 한 수많은 소설과 전설, 그림, 연극, 오페라, 조각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또한 후에 유럽의 역사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생각되어, 역사가들은 아틸라를 위대하고 고귀한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중세시대에는 그리스도교의 영향으로 아틸라는 잔인한 야만인 왕으로 기억되어 왔다. 아틸라가 로마인과 그리스인의 기록에 의하면 악의 적으로 묘사하여 왜곡한 부분도 많지만 아틸라가 금발이라는 기록과 일부 연구가들은 아틸라는 튀르크와 유럽의 혼혈인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아틸라가 유목민 출신으로서 흉노의 후예로 보고 있으며, 튀르크계통의 종족으로서 아틸라의 조상들은 볼가 강 동쪽에서 유럽으로 이동해서 훈 제국을 건설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으며, 훈 제국과 아틸라에 대한 자료가 주로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어서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나와야 확실한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지금은 몽골의 종교라고 하면, 티베트에서 전해진 불교가 주류종교이다. 중국에 세워졌던 원(元) 제국이 멸망하고 북쪽인 몽골고원으로 쫓겨 간 다음, 북원(北元)을 세운 16세기 중후반 때, 일종의 개혁종파인 겔룩빠가 전해졌다. 인도로부터 티베트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8세기 이지만, 겔룩빠는 14기에 창종되었고, 16세기 말, 북원의 알탄 칸 황제의 후원으로 이 종파(황모파)가 몽골 고원에 확실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 몽골 제국의 초대 대 칸인 칭기즈칸(1162∼1227).     © 매일종교신문

몽골인들은 티베트의 라마불교가 전해기전에는 어떤 종교를 가졌는가. 칭기즈칸이 몽골제국을 세우기 전에는 샤머니즘과 텡그리즘(Tengrism)이 주류종교였다. 텡그리즘이란 샤머니즘, 애니미즘, 토테미즘, 다신교 또는 일신교, 조상 숭배 등의 특징이 나타나는 중앙아시아 특유의 종교를 가리키는 현대의 용어이다. 튀르크, 몽골, 헝가리, 흉노 민족의 전통 종교였다. ‘텡그리’란 ‘하늘’이라는 뜻이다. 텡그리즘의 사상가운데는 주위 세계와의 조화롭게 살면서 하늘을 숭배하는 것이 주된 원리이다.
 
▲ 도사 장춘자로 알려진 구처기(丘處機1148∼1227).     © 매일종교신문

이런 종교적 전통을 가진 몽골인들은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용적이었다. 칭기즈칸만 하더라도 샤머니즘과 텡그리즘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했고, 대 칸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면서 유라시아를 누볐지만, 그의 종교관은 일관되게 샤머니즘과 텡그리즘의 영향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용적이었고, 불교의 고승과 도교의 신선을 만나서 대담을 나눈 기록이 전하고 있다.
 
칭기즈칸이 몽골초원에서 중국을 비롯한 유라시아를 정복하고 나서 자연스럽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보게 되고, 전쟁 중이었지만, 그는 다른 종교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기도 하고, 1214년에는 해운(海雲)이란 고승을 만나기도 했지만, 크게 마음이 움직이지는 안했던 것 같다. 칭기즈칸은 고승 해운에게 머리를 기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지만, 고승 해운은 이를 거절하자 칭기즈칸은 그대로 허용했다고 하며, 1219년에 한차례 더 만나서는 후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승 해운은 칭기즈칸에게는 큰 감동을 주지 못했지만, 그의 손자인 원 제국 황제 쿠빌라이 칸에게는 점수를 많이 따서 그의 왕사가 되었다고 한다.
 
칭기즈칸은 이슬람의 지도자도 만났다고 했지만, 그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킨 사람은 도교의 장춘(長春)이라는 도교의 지도자였다. 칭기즈칸은 불교고승과 유교의 지도자에게도 관심을 갖기는 했으나 칭기즈칸은 그가 죽기 전에 도교의 신선 장춘을 만나고자 해서 장춘은 칭기즈칸의 서정(西征)의 전장에서 만나기도 했다.
 
▲ 아프가니스탄의 전쟁 막사에서 칭기즈칸과 도사 장춘자의 대담장면.     © 매일종교신문

장춘은 본명이 구처기(丘處機 1148-1227)로서 도교 종파인 전진교(全眞敎)의 도사(道士)였다. 자는 통밀(通密)이며, 장춘자(長春子)는 전진교에서 받은 도호이며 장춘진인(長春眞人)은 그 존칭이다. 1222년에 서아시아 원정 중이였던 칭기즈칸의 초청을 받아 고령에도 불구하고, 제자인 이지상 등과 함께 멀리 서역까지 여행을 하여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칭기즈칸을 만났다. 불로장수의 비결을 묻는 칭기즈칸에게 전진교의 가르침을 설명하였고, 칭기즈칸은 이에 보답하여 장춘진인에게 몽골 제국의 점령지 어디서라도 전진교를 보호하는 특혜를 베풀어 주도록 약속했다. 제자 이지상이 정리한《장춘진인서유기(長春眞人西遊記)》및 《현풍경회록(玄風慶會錄)》은 그 서역 여행 때의 기록이고, 장춘진인 일행이 거쳐 간 당시의 몽골고원 및 중앙아시아에 대한 귀중한 자료로 현재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장춘은 서역에서 귀국 후, 연경(북경)에 있는 장춘궁(천진관)에 살면서 폭넓게 대중의 신앙을 모으고, 칭기즈칸이 죽던 해에 생을 마쳤다.
 
이상의 스토리에서 알 수 있듯이 칭기즈칸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불로장생(不老長生)이었던 것 같다. 칭기즈칸이 60세가 넘어서 장춘자(長春子)를 전장에서 만나기를 원했던 것은 아마도 인생무상을 느끼고 뭔가 정신적인 공허를 메워보려는 인간적인 욕망이 아니었겠는가. 하지만 도사인 장춘자도 칭기즈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위자연의 도리로서 무욕(無欲)밖에 더 설명했겠는가. 여행기를 읽어보면 장춘자는 칭기즈칸에게 살생을 금하고 동물을 애호하고, 섭생을 권했다. 장춘자 자신은 철저한 채식주의자이였기에 육식을 하지 않고 뭔가 고상한 풍모로 감동을 주었던 것 같다. 칭기즈칸이 장춘자로부터 다소의 감명을 받아서 마음에 위안을 느꼈던 것만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칭기즈칸 이후의 몽골 황제들은 공중 앞에서 종교 간의 교리적 경쟁을 시켰던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칭기즈칸은 유목생활의 특성상 몇 군데에 공공 예배 장소를 설치해서 몽골인들이 고유 신앙행위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의 후계자 3남 어거데이는 제국의 수도 카라코람(Karakorum)에 불교 이슬람교 도교 기독교 등 각 종교의 건물을 지어서 각자의 성향대로 신앙생활을 하도록 했다. 그 당시의 지배적인 종교는 샤머니즘과 텡그리즘이었고, 어거데이 또한 몽골의 전통 종교를 신봉했으나 그의 부인은 경교를 믿었다고 한다.
 
13세기 칭기즈칸 시대에 칭기즈칸의 종교적 관용에 의해서 많은 몽골인들이 전통종교에서 개종을 했다고는 하지만, 원 제국이 들어서면서는 티베트 불교를 수용했다. 칭기즈칸은 비록 그의 당대에 불교의 고승과 도교의 도사를 만나서 뭔가 정신적인 것을 얻으려고 했지만, 그는 몽골인들의 전통 종교적 관념을 떠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야수성을 지닌 그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도시들을 파괴했지만, 말년에 이르러서는 무엇인가 인생의 허무를 느끼고 참회하는 마음에서 불교의 고승과 도교의 도사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려는 심정이 아니었을까.
 
실크로드 선상에서 칭기즈칸 다음으로는 영웅 대접을 받는 인물은 아마도 티무르(Tīmūr1336~1405)가 아닐까 한다. 티무르는 중앙아시아의 몽골·튀르크계 군사 지도자이며, 티무르 제국의 창시자(재위:1370~1405)이다. 티무르의 종교는 이슬람교이다. 티무르 시대에는 중앙아시아의 일부 지역에서만 실크로드의 기능이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페르시아는 물론 중앙아시아를 석권했고, 그의 후손들은 인도를 공략, 무굴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 무굴제국의 기초를 다진 자히르 알딘 무함마드 바부르(1483-1531)의 초상.     © 매일종교신문

무굴제국의 기초를 다진 바부르는 아버지를 통해 티무르의 피를 이어받았고, 그의 어머니를 통해 칭기즈 칸의 피를 이어받았다. 바부르의 혈통은 티무르와 차가타이-튀르크 계에 속했으나, 주변의 환경, 문화, 교육 등은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그는 페르시아문화를 존중했고, 이는 페르시아 문화가 인도 亞대륙에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 인도네시아의 무슬림집회.     © 매일종교신문

21세기 이슬람은 실크로드선상은 물론 인도 亞대륙과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지의 주류종교가 되었다. 대부분이 불교지역이었지만, 이슬람으로 교체되었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921년 이후 볼가 강 중류의 불가르족(族)이, 960년 이래 톈산 산맥 남북로의 튀르크족이 대량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랍족과 이란인이 중심이었던 이슬람 세계는 이 무렵부터 튀르크의 패권 밑으로 옮겨지는 경향이 생겨, 10세기 말부터는 튀르크계 가즈나 왕조의 마호무드왕은 인도에 침입, 불교에 치명타를 입혀서 파괴시키고 지방에 이슬람화가 확고한 기반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동아프리카에는 740년 무렵부터 이슬람이 퍼지기 시작, 1010년경에는 사하라 사막을 넘어 나이저 강변의 서 수단 지방에 있는 흑인 왕국에까지 이슬람의 세력이 미쳤다. 1071년 아르메니아의 만지케르트 싸움에서 셀주크 튀르크군은 비잔틴 군을 격파하였는데, 이때부터 서아시아의 이슬람화-튀르크화가 시작되었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까지의 거의 2세기에 걸친 십자군 전쟁이 발발했다.(계속)
(이치란 해동 세계 불교 선림원 원장 www.haedongacadem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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