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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일연스님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의 시대인식③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6/07/05 [10:52]
김수환 추기경 생애

삼국유사 일연스님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의 시대인식③

김수환 추기경 생애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16/07/05 [10:52]
▲ 김 추기경의 생가로 알려진 군위군 용대리 초가집. 지방정부에서는 이곳을 생가로 소개하고 있으나 전기작가들은 모두 대구 태생으로 밝히고 군위군 집은 어린시절 보낸 지역으로 소개하고 있다.     ©

1922년 대구 출생, 1925년 선산 이사, 1926년 군위군 정착...
 
성품이 곧으셨던 어머니는 자식교육에도 매우 엄격하셨다.....하지만 어머니는 편애(偏愛)다 싶을 정도로 막내아들에게 사랑을 쏟으셨다. 막내아들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애쓰시는 것이 싫어서 어느 해 여름에는 “과일 먹으면 자꾸 배탈이 난다”고 거짓말을 하고 과일을 입에 대지 않았다....밤이되면 어머니는 보통 1-2시간씩 기도를 바쳤는데, 난 옆에서 뜻도 모른 채 꾸벅꾸벅 졸면서 중얼중얼 댔다. 그때 기도하다가 엄마 등 뒤에서 잠드는게 내 특기였다. 기도하기 싫다는 무언의 표시였다....한번은 찰고(擦考)를 앞두고 교리문답을 외워놓지 않아 어머니에게 혼쯜이 난 적이 있다. 그때 효자전 이야기가 생각나 회초리를 만들어 어머니에게 갖다 드리고는 “이 불효자를 때려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매를 드시는 대신 다시 한번 조용히 타이르는 것으로 잘못을 용서해 주셨다.
 
효심과 형제애가 남달랐던 추기경은 지극한 효심으로 어머니를 모시기도 한다. 필수 형님에게 모시라고 하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건강이 점점 나빠졌다. 그는 자신이 가끔 들러뵐 수 있고, 여차하면 대구교구에서 운영하는 해성병원으로 모시고 가기에 가깝도록 교구청 근처에 셋방을 구해드렸다 .최덕홍 주교에게 사정 이야기를 해서 교구청 담벼락 뒤에 있는 무허가 집을 헐값에 구입했다. 남의 셋방에서 큰일을 치를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집에서 출퇴근했다. 김수환 추기경의 바람대로 어머니는 막내아들 품에서 돌아가셨다.
 
두 독신 수행자는 시대와 종교, 종파를 떠나 한 거대한 산이 되어 민족의 아픔과 함께했다. 가장 가까운 시간 우리와 함께한 지도자이면서 그의 생가와 관련 정리되지 않은채 논의되고있다.
 
당사자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의 고향이 대구임을 수차례 밝히고 있지만 지방정부에서는 탄생지(?)를 중심으로 기념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지자체가 주장하는 생가 주장은 천주교 공식입장으로 보기에는 어렵다.
 
김수환 부제의 고향은 대구다. 생전에 자신의 탄생과 관련 하나의 일화를 남기고 있다.
 
우리 부모가 나를 낳으셨다. 그러나 우리 부모가 나라는 존재를 의식하고 낳으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머니는 나를 임신하셨을 때 당신 연세 40이었고, 당신이 낳은 맏딸이 첫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외손자를 곧 갖게 될 그 나이에 나를 임신하신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태어나서도 당신 젖을 물리지 않으셨고 먼저 애기를 낳은 누나 젖을 먹였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내가 병으로 죽을 지경에 이른 적이 있었다. 대구 주교관 근처에 사셨기 때문에 죽기 전에 견지성사를 받고 죽게 하시겠다는 뜻으로 어머니는 나를 안고 달려가 주교님(안 주교님)으로 부터 견지성사를 받게하셨다. 그런데 나는 그 견지성사의 은혜인지 죽지 않고 살아났다. 어머니는 그제야 불쌍하다고 당신 젖을 먹이셨다 하셨다.
 
군위군에서 살던 김수환 추기경의 어머니는 산후조리를 위해 친정이 있는 대구를 찾았고 그곳에서 태었났다는 주장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군위군에 이전 시기가 김 추기경 탄생 전이여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추기경의 군위 이사는 선산에서 5세 이사하여 8세에 군위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울러 졸업을 하지 못한 이유 역시 신학교 입학을 위한 첫 관문인 성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 입학을 위해 5학년 까지 다녔다. 성유스티노 신학교를 가리키는 사진설명 속에서 김수환 추기경 생가는 대구 달성군으로 명시하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이 태어난 1920년대의 대구 남산동 모습으로 소개되고 있다. 아울러 군위군으로 이사하게 된 사연으로 그때 큰딸네가 옹기가마가 있고 천주교 신자들이 제법 살고 있는 군위군 용대리로 이사를 갔다. 수환의 가족도 따라갔다. 수한이 네 살 때였다. 수환은 라가로드 사감신부의 나라와 교회를 사랑하라는 훈시를 들으면서 자신의 이마에 남아 있는 흉터를 만져보았다. 선산에서 군위로 이사 오기 직전인 네 살 때 생긴 상처였다.
 
1968년 6월 7일 청와대를 찾은 김수환 추기경은 박정희 대통령과 대화 중 자신의 출생지를 언급하고 있다.
 
박대통령은 김수환 대주교가 대구에서 태어나 선산을 거쳐 군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설명하자. 자신의 고향이 선산이라며 반가워했다. 자연스럽게 시골에서 어렵게 살 때의 이야기가 오갔다. 박대통령은 나라에서 천주교를 위해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했고, 그는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유신정국으로 한국사회가 암울한 시절인 1979년 1월 15일 김수환 추기경이 한달동안 피정을 하기위해 묵상과 기도를 들이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때 자신과 대화속에도 군위군에서 생활을 언급하고 있다. 나는 출신은 서민이다. 가난한 집의 자식이다. 어린 시절 선산에서는 셋방에서 살았다. 그 후 군위에 와서는 방 두칸의 작은 초가집에서 살았다.
 
김수환 추기경의 부모 역시 교우촌에서 생활을 했고, 로베르 신부의 중매로 결혼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 대구 남산동 번지없는 초가집에서 태어난 후 1925년 선산으로 이사를 갔다가 이듬해인 1926년에 군위군 용대리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혼인 뒤 대구에 정착하고 싶어 했지만 천주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한 곳에 정착하기란 어려웠다. 기약없이 떠도는 날이 이어졌다.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난 수환은 다섯살에 경산 선산에서 군위로 이사를 가면서, ‘저 언덕을 넘으면 고향 대구가 있겠지’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들처럼 고향에 대한 애착은 아니었다. 소년은 도대체 어디를 고향이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8남매였던 그의 형과 누이들은 태어난 곳이 모두 달랐는데 충남 합덕을 시작으로 대구와 김천, 칠곡 등 대개는 아버지가 옹기장수로 떠돌던 지역들이다. 그나마 대구에사 보낸 시간이 많았고 어머니의 고향이기에, 막연히 대구를 고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전기작가 이충렬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주장하는 생가터와 관련 군위군 용대리 초가집은 생가가 아니라 옛집이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현재 일부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의 부모가 용대리 집에서 살다가, 대구의 외가에 가서 출산한 후 다시 용대리로 돌아왔기 때문에 ‘생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3년 3월 31일 정채봉 동화작가와 김병규 동화작가(당시 소년한국일보 취재기자)와 함께 생가가 있던 자리를 방문했다. 이때 김수환 추기경은 태어나서 선산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살았던 생가의 위치는 대구교구청 아래 현재의 보성황실 아파트 자리라고 밝혔다.
 
“내가 태어난 대구의 남산동 집터에는 보성주택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김수환, 《바보 별님》(정채봉, 솔출판사, 2009)p.185. 김병규 작가의 증언, 김수환 추기경의 조카 김병기 씨 증언.
 
이는 김수환 추기경의 셋째형 김동한 신부의 생전 기록과 일치한다.
 
그해(1922) 아버지 김영석은 착실히 모은 가산을 정리, 직지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던 옹기굴 동네 지대골에서 대구로 이주하고, 이미 출가한 맏딸 명례와 사위 김기출과 더불어 옹기전을 차렸다. 그해 아버지 김영석은 55세, 어머니 서중하는 41세로 김천 지대골에서 임신한 아기를 대구 남산동에서 낳으니(음력 5월 8일), 그가 동생 수환(스테파노)이다.
-김동한 신부, 《밀알회와 김동환 신부》(밀알회, 1993)pp.373-374.
 
그리고 3년 후에 선산으로 이사가 심상소학교 옆에서 1년 정도 산후 군위군 용대리 227번지로 왔다. 이는 대구교구사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1926년 선산에서 이사 온 김영석(김수환 추기경의 부친) 가정이 살면서 옹기 굴 옆에 있는 그의 집이 ‘용대공소’가 되어 주일 예절을 드렸다. 이후 신자들이 늘어나서 가설본당의 여동선(빅토르)신부가 1년에 두 번 방문해 미사를 드렸다.
-《대구대교구 100년사-대구본당사》(천주교 대구대교구, 2012), pp.104-110. 《대구대교구 100년사-은총과 사랑의 자취》(천주교 대구대교구,2017년)pp.71-72.
 
이와 같이 여러 자료를 근거로 용대리에 있는 집은 네살 이전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집이기 때문에 ‘생가’나 ‘임신한 집’이 아니다. 네 살 때부터 살면서 신앙을 키운 ‘옛집’이다. 김수환 추기경도 2007년에 그 집을 그린 후 ‘옛집’이라고 표기했다. 이런 고인의 뜻을 존중해 용대리 집은 ‘생가’가 아니라 ‘옛집’으로 자리매김 되는 것이 옳다.
 
군위군 용대리에는 김수환 추기경을 기리는 초가집이 있다.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 초가(군위군 군위읍 용대리 238번지)는 2009년 2월 16일 선종하신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추기경께서 군위보통학교를 마치고 소신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사시던 곳이다.”
 
추기경의 집안은 원래 충남 논산군 연산의 양반가문으로 충청도 땅에 천주교가 전파되던 초기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순교자의 집안이다. 조부이신 김요안(要安) 공은 광산 김씨로 병인박해때 연산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옥중 순교했고, 조모 강말손(姜末孫)여사는 남편의 순교 후에 어린 자녀들과 함께 갖은 고생에도 교우들의 뒷바라지를 성심으로 하였으며, 당시 유복자로 추기경의 부친이신 영석(永錫,요셉)이 태어났다.
 
김영석은 경상도 사목을 담당했던 김보록 신부(대구교구 설립자)의 일을 도왔으며,동학난을 만나 칠곡 장자동 옹기골로 피신하게 된다. 이때 뮈뗄, 김보록 두 신부의 중매로 대구의 유명한 신자 집안인 달성 서씨 서용서(徐用瑞)회장의 딸 중하(仲夏,마르띠나)와 혼인을 하였다. 이분이 바로 김수환 추기경의 어머니이다.
 
그후 왜관 평장목, 김천 지대골의 옹기굴,대구 남산동을 전전하던 추기경의 부모는 칠곡 신나무골과 선산을 거쳐 1922년 4월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군위에 들어온 해인 1922년 5월 8일(음력)에 낳은 막내가 바로 김수환 추기경이며, 추기경은 외가에서 태어났다.
 
추기경이 8살 되던 해 아버지는 해수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홀로 남은 어머니는 옹기와 포목 행상으로 가족의 생계를 이었으며, 어려운 형편에서도 이 초가에서 공소를 열었다.
 
추기경은 군위보통학교를 마치고 지금 대구 카톨릭대의 전신인 성유스티노신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이 집에서 형인 동한(東漢,가롤로)신부와 함께 어린시절을 보내며 신앙과 꿈을 키웠으며, 생전에 가끔 이 집을 찾아와 어린 시절을 회상하셨다.
 
군위군에 위치한 옛집을 평소 자주 방문하여 회상했다는 기록과 다르게 59년 만에 방문한 군위 옛집, 1993년 3월 31일, 김수환 추기경은 정채봉 동화작가, 배재균 소년한국일보 편집국장, 김병규 소년한국일보 기자(동화작가), 조숭래 소년한국일보 사진기자와 함께 대구 생가 터와 군위 옛집을 방문했다.
 
“그해 3월 31일, 우리는 추기경을 모시고 생가 터와 경북 군위군 모교와 옛집을 찾았다. 59년 만의 방문이라고 하셨다.(....)중벌모를 쓰고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노인이 김수환 추기경을 한참 동안 바라봤습니다. 그러더니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이 집에 살던 아들 하나가 서울에서 유명하게 되었다더니. 막내이던 자네구먼, 자네가 맞네’라고 하셔서 모두 웃었지요. 대한민국에서 추기경님께 반말하는 사람은 그분 뿐이었을 테니까요”
 
당시 방문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김병규 동화작가의 증언이 있다. 이후 방문기록은 없지만 자주라는 표기는 김추기경과 관련성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기록으로 전하기에는 정확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아울러 군위군으로 이사와 관련 김추기경 스스로 기록과 주변 생존인물을 중심으로 재 구성을 하여도 그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이와같은 의문에 대한 설명을 하듯 만삭의 몸으로 어머니가 친정인 대구로 가셔서 그곳에 태어났다는 부연설명을 하고 있으나 이사를 간 시기를 5세 전후로 김추기경 자신도 기억하고 있음으로 이 마저 정확한 기록으로 볼 수 없다.
 
기록을 정리해보면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 대구 남산동 출생 1925년 선산으로 이사 1926년 군위군 용대리에 정착했다.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추기경 가계연표>
1922년-1925년
1922년 4월 18일 군위군 군위면 용대동 238번지로 이사
1922년 5월 8일 막내 김수환 추기경 출생(6남2녀)
*외가인 대구 남산동에서 출생
1926년-1929년
1926년 5월 18일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 2439번지로 이사
1929년 8월 26일 선산군 선산면 동부동 522번지로 이사
1929년
군위군 군위면 용대동 238번지로 이사
추기경 8세때 아버지 김영석 옹 해수병으로 별세
용대리 생가에서 군위보통학교 수료 등 추기경 어린시절 거주
 
전기작가 이충렬은 이와 같은 지방정부의 복원사업과 생가 주장에 대해 최근 복원된 경상북도 군위군 용대리 집터 이곳을 군위군에서는 ‘김수환 추기경 생가’ 복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으나 김수환 추기경의 전기 모두 어린시절 보낸 지역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곳이 생가라고 주장하는 군위군은 그 증거로 최요세파 수녀의 친필을 근거로 하고 있으나 현재(2016년 5월)까지 이와같은 주장을 뒷 받침할 근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교회측 공식자료와 다른 주장에 대해 바로잡는 일이 관계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1926년(무렵) 선산에서 이사 온 김영석(김수환 추기경의 부친)가정이 살면서 옹기굴 옆에 있는 그의 집이 ‘용대공소’가 되었다. 이후 신자들이 늘어나서 가실본당의 여동선(빅토르)신부가 1년에 두 번 방문해 미사를 드렸다.”
그것은 천주교 서울교구에서 이충렬 작가의 『아! 김수환 추기경』은 고려대 교수이며 한국천주교사 연구의 권위자 조광 교수의 감수를 받고 출판되었다. 이 책은 염수정 추기경의 추천과 천주교 서울교구 교회 인가를 받고 출판했다. 책 내용은 천주교의 공적책임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전기작가 이충렬은 김수환 추기경의 나눔정신을 따르기 위해 인세의 반을 서울대 교구 옹기장학회의 장학기금으로 기부하기로 했다.
 
<김수환 추기경의 생애는 장혜민(알퐁소)의 『김수환 추기경 평전』, 이충렬 작가의 『아! 김수환 추기경』의 전기를 비롯 여러편의 논문을 참고했다.일연스님은 800년전 인물이며 스님의 저서로는 삼국유사와 중편조동오위가 현존하는 저서다 그의 제자들이 세운 비문을 참고를 했다.>(삼국유사문화원장·동국대 강사)
 
<연재순서>
1.대구와 경산 출신, 김알지를 조상으로 하는 동일 씨족
2.국존 일연의 생애
3.김수환 추기경 생애
4.국존 일연과 김수환추기경의 다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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