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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집 ‘사후세계’5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기사입력 2017/03/03 [07:04]
내세를 결정하는 고인의 미덕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집 ‘사후세계’5

내세를 결정하는 고인의 미덕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입력 : 2017/03/03 [07:04]
르몽드 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특집 ‘사후세계’
 
1. 잘 죽는 법, 통과의례에 관한 성찰(장 필립 드 토낙)
2. 영혼의 저울질, 삶의 인과응보(세르주 라피트)
3. 영생을 위한 통행증, ‘사자의 서(書)’(플로랑스 컹탕)
4. 티베트 불교의 내세(로랑 데아예)
5. 내세를 결정하는 고인의 미덕(세르주 라피트)
6. 조상과 혼백, 그리고 저승(세르주 라피트)
7. 환생과 부활, 그리고 윤회(이세 타르당마스켈리에)
8. 죽은 자와의 대화는 가능한가?(지오르지아 카스타뇰리)
▲ <사도 성 요한과 그에게 천국의 문을 여는 천사> 런던 대영박물관 소장, 14세기초 미니어쳐    
 
내세를 결정하는 고인의 미덕  

대부분의 종교가 사후 영생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고인의 미덕에 따라 달라지는 영혼의 운명에 대해서는 종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부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다.”(고린도전서 15:14) 사도 바오로는 이 한 마디를 통해 기독교인들의 믿음에 있어 그리스도의 부활이 얼마나 존재론적으로 중요한지 알려줬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죽은 이들의 부활을 강조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원전에도 히브리 민족 사이에서는 내세에 대한 믿음이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그리스 점령군에 대한 스마카비족의 반란이 실패한 이후, 메시아의 왕림으로 이스라엘이 부흥할 것이라는 희망이 점차 신자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과 뒤섞였다.
 
이전에는 단지 몇몇 선지자들에 의해 언급돼 온 내세에 대한 이런 견해는, 아마도 그리스인들과 그들의 영혼관, 그리고 부활을 믿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등 주변국들의 종교에서 받은 영향일 것이다. 이는 특히 그리스도와 가까웠고, 현재의 유대주의 가치관을 형성한 랍비 운동을 일으킨 바리새인들의 신념이었다. 한편 7세기 모하메드의 선교로 인해, 이슬람 종교에도 부활에 대한 믿음이 확고히 자리 잡았다.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는 본질적으로 같다. 최후의 심판의 전조로 부활이 마지막에 온다는 점에서 말이다. 망자의 혼은 육체적 덮개를 되찾는데, 이 육체는 영생을 위해 변형된 육체다. 죽음의 영향력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적어도 신적 정의에 의해 천국의 문으로 들어갈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얘기다. 사실 지옥의 업화(業火)로 보내지는 사람들의 운명은 명확하지 않다. 그들의 내세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아브라함의 3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역주)가 형벌의 기간, 그리고 형벌이 확실히 적용될 사람들에 관해 서로 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3대 종교에 있어 부활에 대한 믿음은 개인 영혼 개념, “죽은 후에도 영혼은 영혼처럼 유일하고 개인적인 육체에 속한다”는 관념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기독교, 천주교는 특히 ‘육신의 부활’을 부르짖으며 이 점을 강조한다. 기독교의 시초부터 사도 성 바오로는 부패하지 않는 ‘영적 육체’를 언급했다. 성상화의 소박한 표현을 넘어, 기독교 신앙에서는 부활은 단순히 생물학적 육체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부활한 육체는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몇몇 표현들(‘영광의 육체’, ‘빛의 육체’)은 유일한 개인으로 부활한다는 신념을 입증한다. 바로 이점이 힌두교나 불교와 다른 점이다. 힌두교나 불교에서는 한 영혼이 육체에 강생(降生, Incarnation: 신이 인간이 됨-역주)하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다. 또한 부활에 의한 영혼과 육체의 만남은 윤회 주기에 따라 돌아오는 것으로 이해되는 환생과는 전혀 다르다. 반면, 천국의 관점에서 볼 때 부활 이후의 내세는 유한적인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는 삶의 이행이자 완수이라는 의미에서 해탈의 개념과 더 관련이 많다.
 
지옥
 
서양에서 천국의 이면인 지옥을 표현하는 데에는 기독교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기독교가 지옥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리스 신화 같은 고대 신앙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리스 신화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성벽과 불길의 강으로 둘러싸인 지하세계가 등장한다. 초기 시대부터, 최후의 징벌 장소는 특히 게헨나(Gehenna, 헬라어로 ‘지옥’-역주)와 관련이 있다. 신약성서에서 ‘꺼지지 않는 불’에 비유되는 게헨나는 히브리어로는 게-힌놈(Gai-Hinnom, 탄식의 골짜기-역주)으로 가나안 사람들이 예전에 우상숭배의식을 치르던 곳이었다. 한 히브리 왕이 이곳을 공공쓰레기소각장으로 용도를 변경해, 여기서 쓰레기와 썩은 동물 사체를 태웠다.
 
랍비 유대교 또한 게헨나의 이미지로 불신자의 운명을 나타냈다. 코란에서도 불신자에게 예정된 지옥의 동의어로 쓰인다. 과연 어떤 지옥일까? 유대교와 달리 기독교 및 이슬람 전통에서는 그보다 더 나아가 신적 정의에 의해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들에게 가하는, 주로 불을 이용한 형벌을 의미했다. 이것이 많은 종교에 공통된 지옥 또는 ‘지옥들’의 특징이다. ‘지옥들’이라 불리는 이유는 대개 여러 등급의 형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가 이 경우다. 불교와 힌두교에서도 지옥 형벌을 연상시키는 표현들을 찾아볼 수 있다. 지옥 형벌 단계는 소생(부활)이나 최종 해탈을 기다리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 형벌은 ‘일시적’인 것으로 봤다.
 
아브라함의 종교들에서 지옥에 떨어진 사람의 운명에 대한 정확한 내용을 알기는 훨씬 어렵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중 어느 종교도 누가 얼마동안 지옥으로 갈지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단순 죄인이나 종교에 적대적인 사람만이 회개를 위해 일시적으로 또는 영원히 지옥에 가는 것일까? 그 대답은 엄중한 신의 판단 혹은 영벌(永罰, Eternal punishment-역주)과 아주 모순되는 자비 중 어느 쪽을 취하냐에 따라 달라진다. ‘지옥’이라는 말에 어떤 이들은 문자 그대로 영원한 고문을 떠올리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죄를 돌아보기를 거부한다. 

천국
 
구약 창세기에 나온 것처럼, 기독교인들에게 천국은 창조주에 의해 아담과 이브가 쫓겨난 에덴동산이라는 장소였다. ‘Paradise’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의 ‘Paradeisos’인데 이는 페르시아어 ‘Paridaiza’에서 차용된 것으로, 타는 듯한 사막으로부터 보호받는 녹색 정원을 가리킨다. 기독교 전통은 모든 불의와 폭력이 사라진 완전한 세상을 상기시키는, 이사야 같은 히브리 성경의 선지자들에게서 끌어낸 개념들을 이용해 지상 낙원의 이미지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선지자 에스겔로부터 따온,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천상의 예루살렘 이미지는 천국을 하늘에 비교하면서 기독교의 천국 개념을 완성했다. 이제 신의 옥좌가 자리하는 이 새 예루살렘(New Jerusalem,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성서에 언급된 하느님의 도성-역주)에서 선택받은 자들이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 주위로 모여든다.
 
기독교의 천국보다 훨씬 이전인, 고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의 천국도 이미 존재 가능한 최고(最高)의 천상의 장소였다. 이 ‘신들의 주거지’에는 ‘평안, 행복, 기쁨, (선택받은 자들이 누리는) 하늘나라의 완전한 행복, 자비’만 가득할 것이다. 한편 히브리민족은 이에 대해 전해 알지 못했고, 유대교에 부활의 믿음을 심은 랍비는 원칙적으로 독실한 신자들만이 신이 계신 곳에서 새로운 삶을 누리는 에덴동산에 들어갈 수 있다고 전했다. 에덴동산에서의 영원한 삶, 천국에 대한 약속은 유대 신비주의자들과 사색가들의 연구 영역이었지만, 유대교의 전반적인 신조(信條)로 인정되지는 않았다. 천국에 대한 약속은 기독교 신앙에서는 절대적인 요소다. 이슬람교 신앙에서도 마찬가지다. 코란에서도 에덴동산과 독실한 신자들이 누릴 영원한 삶에 대한 언급을 무수하게 찾을 수 있다.
 
마지막에 천국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는 자는 누구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역사와 아브라함의 종교의 사상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다. 유대교의 주된 믿음은 ‘모든 나라의 독실한 신자들’이 부활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랍비학교는 이에 아직도 동의하지 않고 있다. 기독교에서도, 수동적으로 선택받은 자들이 아니라 타인에게 선을 베푼 이들이 부활을 체험할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이슬람은 훨씬 개방적이다. 많은 이슬람 사상가들이 신의 자비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선지자 모하메드를 충실히 따르는 자들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대과학으로 인해 천상과 지상의 신성이 상실된 이후, 천국에 대한 기독교의 견해는 어떨까? 천국이 어디에 있는지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천국은 장소가 아닌 ‘상태’로 간주된다. 기독교 강론에 분명히 드러나는 이러한 변화는 기독교 신비주의 사조에 의해 예견됐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도 같은 변화를 볼 수 있다. 모든 영적 탐구의 완전한 실현을 신성과 결부시키는 것. 이후 20세기 기독교 신학은 에덴동산을 전형적인 천국으로 묘사하기를 그친다. 오늘날 주요 기독교 교회에서 말하는 천국이란, 영원히 지속되는 지복(至福)이 가득한, 신과 함께하는 충만한 삶이다.
 
니르바나(열반)
 
아시아의 전통적인 주요 종교들도 완전한 지복을 누리는 장소들을 상상했다. 중국 불교의 ‘순수한 지상 왕국’이나 힌두교의 신성한 장소들이 그 예다. 그러나 이는 카르마(업-역주)가 충분히 경감된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중간 단계의 천국이다. 요컨대 윤회(Samsara-산스크리트어) 주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다. 이것만이 영원한 그곳에서의 완전한 이행, 완수를 뜻한다. 천국의 개념에 가깝지만, 유일신 종교들이 지닌 견해와는 분명히 다른 장소다.
 
힌두교에서 영적 해탈(Moksha-산스크리트어)은 최상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표현된다. 반면 불교에서는 문자 그대로 ‘소멸(니르바나)’을 의미한다(열반의 본뜻은 ‘불어서 끄는 것’ ‘불어서 꺼진 상태’를 뜻하며, 마치 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 고뇌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역주).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바로 이것이 궁극의 목적이다. 민간 전통에서는 일종의 불멸이라 하는데, 그러나 그 경지가 불가사의하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사실 충만함의 관념과 공(空), 최상의 이행, 완수, (신 앞에서의) 자아망각(자기 자신의 소멸)의 관념을 결합하는 것은 어렵다.
 
더 이상 감각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의 지복을 어떻게 아는지 묻자, 부처의 한 제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친구여, 지복은 바로 모든 감각의 부재에 있다오.” 바로 이것이 불교 니르바나의 역설이자 천국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열반을 즐기기 위해 아무도 없이 일종의 불멸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 말이다. (글·세르주 라피트·신학자, 번역·조승아·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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