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통찰! 天問天答 98

담선(談禪)공부 모임 | 기사입력 2017/03/09 [07:36]
스스로 비추어내는 ‘자각’은 모든 이해와 앎을 넘어서 있다

통찰! 天問天答 98

스스로 비추어내는 ‘자각’은 모든 이해와 앎을 넘어서 있다

담선(談禪)공부 모임 | 입력 : 2017/03/09 [07:36]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이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실감 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하고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가 발전을 해 왔다 할지라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와 함께 많은 분들이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지성 인류의 자산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든지, 어떠한 삶을 살든지,
그러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아는 것,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것은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식과 인간정신과 더불어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스스로 비추어내는 ‘자각’은 모든 이해와 앎을 넘어서 있다
 
질문193: 자신에 대한 이해는 누가 하는 것입니까? ‘지금의 나’ 입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는 오직 자기 자신만이 가능합니다. 즉 ‘나’입니다. 따라서 ‘나’에 대한 이해는 ‘지금의 나’를 자기 자신으로 여기는 오해(誤解)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다운 이해는 영적체험을 하고 큰 도(道)를 깨우치고, 어떤 모습으로 나투고 현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자기 자신으로 오해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단언컨대 그 외는 다 헛됩니다.
 
따라서 많이 알고 있으며, 어떤 능력이 있으며, 어떤 경지에 도달해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충족되어 지려면 육체를 기반으로 하여야 하며, 육체를 기반으로 해서 이루어진 모든 것은 결국 이해(理解)의 장애물이자 오해(誤解)의 연장선일 뿐입니다.
 
 
질문194: 진경님이 말하는 옛 사람, 즉 성현과 성자(聖子)들을 일컬어서 화신(化身)이라고 하는데, 그 분들은 어떤 목적과 어떤 이유로 이 땅에 오는 겁니까?
 
모든 사람이 ‘지금의 나’를 자기 자신으로 여기며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지금의 나’는 각자 개개별로 이름을 가지고서 다양성의 한 부분으로서 살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나’가 있다는 것은 각자가 자기의 꿈을 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이가 결국은 화신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꿈을 꾸고 있을 당시에, 이 꿈이 ‘나’의 의지이자 ‘나’의 뜻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의 의지이자 ‘나’의 뜻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옛 사람만을, 즉 그러한 성자와 성현만을 화신으로 본다는 것은 모순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화신으로 어떤 목적과 어떤 이유로 이 땅에 왔다는 이야기는 사람들만이 만들어 낼 수가 있는 허구에 불과할 뿐입니다.
 
 
질문195: 모든 사람이 결국은 진리의 화신(化身)이라 하시는데,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저도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 저 자신을 알기 위해 엄청 노력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노력에 진정성이 가미 되었을 때, 불현 듯 노력하고 있는 ‘지금의 나’를 비추어 내고 있더라는 겁니다. 즉 ‘자각’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비추어내고 있기 때문에, 즉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나’가 드러났고, 이러한 축복으로 인해 ‘지금의 나’조차도 내 자각이 항상 명료하다는 ‘앎’을 가질 수가 있더라는 겁니다.
 
‘앎’을 가진 ‘지금의 나’와, ‘앎’을 가지지 못한 ‘지금의 나’라 할지라도, ‘자각’으로 인해 드러나고 나투어 졌음은 부인 할 수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성자들만이 화신이 아니라 모든 이가 결국은 화신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질문196: ‘자각’은 결국 모든 이해와 앎을 넘어서 있다고 하시는데
 
태어나기 이전에 자기 자신에 대한 앎과 이해는 가질 수도 없으며, 가질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스로가 스스로를 태어난 ‘누구’와 ‘무엇’으로 여기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기 앎과 자기 이해가 필요할 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자들도 태어나기 이전에는 어떤 자신에 대한 이해도 앎도 가질 수가 없으며, 비록 성자라 할지라도 결국은 다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즉 ‘지금의 나’는 다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말미암는 ‘자유’, 즉 스스로 비추어내는 ‘자각’은 모든 이해와 앎을 넘어서 있습니다.
 
 
  • 도배방지 이미지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