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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 天問天答 118

담선(談禪)공부 모임 | 기사입력 2017/05/18 [07:10]
‘나’를 아는 것이 최선이자 최고의 선(禪)

통찰! 天問天答 118

‘나’를 아는 것이 최선이자 최고의 선(禪)

담선(談禪)공부 모임 | 입력 : 2017/05/18 [07:10]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理解)를 통해 무지(無知)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은,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고난과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비정상적 한계를 실감 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依支)하고 의존(依存)하며,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와 종교가 발전을 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와 갈등으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와 철학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一部)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와 함께 많은 분들이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밝혀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지성(知性) 인류의 이야기가 될 것이며, 자산(資産)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의존하고 따르든지, 어떠한 ‘삶’을 살아가든지, 그러기 이전(以前)에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먼저 알고 깨우치는 것이 상식(常識)중의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상식적 ‘깨달음’과 인간정신과 더불어서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가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談禪모임 眞鏡>     


‘나’를 아는 것이 최선이자 최고의 선(禪)    

질문251: ‘나’를 아는 것이 최선이자 최고의 선(禪)이라 하셨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의 나’는 유형적 정체성으로 인해 부자연스러우며, 부자유스럽습니다. 자기를 알고자 하는 그 의지(意志)만을 자산(資産) 삼아 ‘나’에게서 시작하여, ‘나’에게로 귀결(歸結) 하세요. 그리고 그 외는 다 헛됩니다.   
   

질문252: 진경님은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저도 한때는 매일 기도를 하였습니다. 가장 지혜롭고 가장 위대하고 가장 자유로운 분에게 기도했습니다. 가장 구속적이며 한계가 많은 곳에 저를 있게 하소서.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곳에 저를 있게 하소서. 항상 저를 거기에 있게 하소서. 오늘 ‘도(道)’를 못 깨우치면 내일이 오기 전에 죽게 하소서.     

그리고 어느 순간에 구속과 한계, 두려움 등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무지, 즉 ‘자각’의 결여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항상 ‘자각’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는 저에게 어떤 기도가 필요하겠습니까?    

(질문): 가장 한계적인 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적인 죽음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의식적인 죽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질문):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그 어디에도 의존 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입니까?    

‘나’를 알아야겠다. 그 의지가 최고의 근기입니다. 그리고 절실함과 진정성이 최고의 스승입니다. 어떤 환경도 자기 자신으로 거듭나게 해줄 수는 없습니다.    

(질문): 노력하고 있지만 미진(未盡) 한가 봅니다.     

계속 통찰을 이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계속 노력하는 겁니다. 하지만 노력하는 ‘지금의 나’에게는 어떤 혜택도 없습니다. 그러나 노력하는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한 ‘더 사실적인 나’가 눈을 뜨는 겁니다. 그리고 ‘더 사실적인 나’는 정신 차린 ‘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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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한별 2017/05/20 [11:32] 수정 | 삭제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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