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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종교 ‘천리교’ 고찰로 본 신종교 의미와 한국의 천리교 유입④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7/05/22 [07:55]
일본 신종교의 국내 유입경로와 천리교

일본 신종교 ‘천리교’ 고찰로 본 신종교 의미와 한국의 천리교 유입④

일본 신종교의 국내 유입경로와 천리교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17/05/22 [07:55]
<연재순서>    
1. 기성종교보다 못하다는 의미의 ‘신흥종교’, ‘유사종교’,‘사이비종교’로 불리는 신종교
2. 일본 신종교의 흐름-막말유신기의 천리교와 금광교 이후를 연구대상
3. 일본 사회 가장 유력한 행동적인 종교 세력인 40개 신종교
4. 일본 신종교의 국내 유입경로와 천리교
5. 한국 천리교의 분파와 현황, 교리     

불교 4개, 신도 4개 종파 등 합방 전부터 들어와 경무국의 정책적 보호로 성장    

일본종교가 한국에 상륙한 것은 불교 외에도 신도, 기독교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일본종교는 최초 일본제국의 정치세력 팽창과 함께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포교한다는 것이었다. 한일합방 이전만 하더라도 일본인들의 내왕이 빈번해지고 포교에 기반이 잡히자 점차 그들은 한국인 포섭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전에 이미 불교 4개 종파, 신도 4개 종파, 그리고 많은 기독교 선교사들의 내왕이 있었다. 1915년에는 공포된 포교규칙에 힘입어 소위 공인교로서의 신도․불교․기독교는 사원과 포교소․교회 등 포교근거지를 증설하였고, 자연히 일본종교들은 각 방면에 포교의 성행을 보게 되었다. 당시 포교규칙에 의하면 신도․불교․기독교는 공인교로서 조선총독부의 학무국 종교과의 관리를 받았고, 이들 세 종교를 제외한 기타 종교, 즉 유교를 포함한 한국의 모든 종교들은 유사종교 혹은 종교유사단체로서 경무국에서 관리하도록 되었다. 따라서 이들 일본종교들은 정책적인 보호를 받아 급히 성장되었다.    

일본계 신종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00년초 천리교이다. 해방 이후 일연정종, 천조광교, 래세구세교, 대우주신교 등이 들어왔다. 이 중에서 천리교와 일련정종이 크게 번창했다.

천리교는 대한천리교와 한국천리교연합회로 대분되어 있는데 대한천리교가 일본 본부와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한국적 특성을 살리려는 경향이라면 한국천리교연합회는 대한천리교로부터 분립하여 일본 천리교와 관련을 맺고 일본의 지시를 받고 있다. 양파를 합해 한국의 천리교 신자는 45만명에 이르고 있다.     

일련종교는 초기에 창신동파 정능파 원남동파 부산파 여수파 대구파 등으로 나누어 각기 포교하였으나 현재 한국일련정종불교회 사무국 산하에 총합본부를 두고 80여만명의 신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실지로는 「한국일련정종불교회」 「대한일련정종법회강불교도회」 「한국일련정종본부」 등 3파가 크게 분립되어 있고 기타 군소종파들이 각기 독자적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외에도 일본 신도계 종단인 신리교, 대사교, 生長의 가, 선인회, 정토진종, 도덕과학연구회, 본문분립회, 세계구세교, 대우주신교 등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다.    

1900년 초 한국에 처음 들어온 천리교, 해방 이후 일연정종, 천조광교 등도 유입    

천리교의 교조(오야사마로 부른다.) 중산미기는 1798년 4월 18일 대화국 산변군 삼매전촌(현재 내양현 천리시 삼매전련)의 대장옥 각주에 대한 관서지방의 명칭으로 막부직할지의 련촌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장옥과 관인인 대관의 중간층에 해당되는 지방무사를 말한다. 신분은 련인이나 농민이지만 무사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었으며, 대도가 승인되는 경우가 많았다.

전천반칠의 장녀로 태어 났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남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13세가 되어 고향에서 조금 떨어진 장옥부촌(현재 천리시 삼도련)의 장옥 중산선우위문에게 시집가서 평범한 주부로서 일생을 보내게 된다. 그녀의 시가는 주식중개업을 통해 부를 쌓은 촌에서도 한 두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부유한 집안이었다. 그녀는 시집에서 봉건적인 여성의 속박 윤리였던 삼종지도을 준수하며, 시부모를 공양하고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키고 엄청난 가사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소작인에 대한 관리나 보살핌에도 충실하는 등 전형적인 봉건제하의 여성상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결흔한지 3년만에 媤母로 부터 주부권을 양도 받을 정도로 주부로서의 모범적인 생활을 하며 l남 5녀를 두었다. 그러나 그녀의 그러한 모범적 생활태도와는 달리, 남편은 특별한 직업이 없이 무위도식만을 일삼고 게으름과 무절제한 생활로 물려 받은 가산만을 탕진하여 부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한다.

막부의 동요가 나타나고 있던 1830년과 1835년에 미끼는 어린 2녀 와 4녀를 잃는 슬픔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어 1837년 10월에는 장남 수사가 밭에시 보리 파종을 하던 중에 다리에 심한 통증을 느껴 기다시피 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일어났다. 여러가지 치료를 해도 별 차도가 없었다. 그러던 중 그 집에 자주 염불기도를 해 주던 산복시병위가 마침 이웃 집에 들른 길에 가지 기도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그 때 산복의 전속 가지태  무녀로서 가지 기도 중에 신령을 잠시 불러들이는 접신의 대리인이 없었기 때문에, 미끼 자신이 목욕 재계하고 가지태가 되어 기도를 행하게 되었다. 기도가 진행되고 흥분이 고조되자 미끼는 갑자기 입신 상태에 빠져 들었다. 그러면서 바로 이때 다음과 같은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나는 천의 장군이다. 나가 본래의 참 신(원의신, 실의 신)이다. 중산가에 인연이 있어 지금 세상을 구하기 위해 천강했다. 나의 사신을 모신 건물 내지는 사당을 의미로 미끼를 쓰고 싶다. 신의 말이다. 승낙한다면 세계의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만약 승낙하지 않는다면, 중산가는 풍지박산날 것이다.”      

천리교에서는 이날을 입교일로 정하고 있다.

10월 26일 밤까지 지속된 그런 입신상태는 미끼의 남편이 미끼를 신의 지시대로 신사로 빌려 주기로 함에 따라 끝나게 된다. 그런 체험이 있은 후 그녀는 한동안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가사에도 충실하지 않은 채 허송세월한다. 그 사이 남편도 세상을 뜨게 된다.

그녀의 첫 종교적 활동은 1854년 그녀의 삼녀가 첫 출산을 할 때 처음으로 「帶屋ゆろし」를 행하면서 시작된다. 차츰 순산과 각종 창병을 치료하는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 지역에 산실신으로 불리우며 사람을 모으게 된다. 그녀가 본격적인 포교에 들어가는 것은 1864년으로 나중에 본석(本席)이 된 목수였던 반강이장이 20평 남짓한 건물을 지어 근행장소로 마련해 주어 여기서 비로소 사람들을 모아 강을 연다. 이 때부터 1888년 4월 동경지사로부터 교회 설치를 인가받은 때 까지를 흔히 강사 시대라 한다. 특히 1867년에는 각종 강사로 부터 포교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길전가의 공인을 얻어 습합신도로 등록함으로써 천륜왕명신을 신앙하는 강사의 하나로 공식적인 사회적 승인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つとめ’의 형식과 내용을 차츰 정비하고, 이 때부터 「みかぐちうた」를 짓고 1869년 부터 15년에 걸쳐 계시의 책이라는 「お筆先」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1875년 중산가의 집안에 친신 천리왕명이 인간을 창조한 지점으로 지바 정하고 여기에 처음 감로태 인류창조의 장소인 지바에 설치하여 하늘로 부터의 감로를 받아들이도록 마든 정육각형의 미끼의 13단으로 된 台이다. 이것과 더불어 지바에 1934년 부터는 미끼의 발자욱을 새긴 목조석형 간로다이를 설치하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 때부터 신자 조직인 강을 나라, 오사카, 교토 등지로 설치해 간다. 이렇게 미끼의 강이 점차 새로운 신자를 확보해 나가자, 신사 측이나 사원, 경찰 모두로 부터 감시와 간섭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1874년 당시 내부성하달로 공포된 금염기도를 금하도록 하는 조치를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경찰로부터 어폐와 경 등을 몰수당하고 현청 사사과로 부터 조사를 받고 미끼는 정신질환 유무를 진단받는 등의 조치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미끼는 생존시에만 18차에 걸친 구류와 과태료 처분을 받았다 한다. 교조미끼는 1887년 1월 26일 90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러나 천리교에서는 그녀의 몸을 사라졌지만 혼은 영혼이 변함없이 원래의 집이 있는 지바에 머무르면서 존명하여 수호활동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 일본 나라현 덴리(天理)에 있는 천리교 교회본부    


敎祖 미끼 사후, 전국적 교세확산해 1928년 신도 409만의 가장 큰 신종교단체 

미끼사후 그 후계자로는 교조를 대신하여 신의를 중개하도록 인정받은 반강이장이 본석으로 오르고 미끼의 외손인 중산진지양은 초대진주로 취임한다. 그리고 1888년 천리교는 본부를 일시 동경으로 이전하여 동경부지사로부터 교회설치를 인가받아 중산진지양을 교회장으로 하여 신도본국 소속의 천리교회로 출발함으로써, 교파신도의 체제 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해 바로 다시 본부를 원위치시키고 천리교 소속 지부 교회를 설립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교세는 확대되기 시작하고 1891년에 월간지를 창간한다. 동시에 당국의 천리교에 대한 간섭과 단속은 이어져 이를 피하고 독립교파로 공인받기 위할 목적으로 1893년 군함 한 척의 건조비로 1만엔을 정부에 기부하기도 한다. 또 이 해에 천리교의 포교사 이견반치랑이 단신 부산에 들어와 포교를 하기 시작함으로써 해외 포교활동의 문을 열기도 한다. 1896년은 마침 교조10년제를 두고 대대적인 포교활동을 전개하여 오끼나와를 제외한 전국의 부현에 교회를 설치할 정도로 교세를 크게 확장하고 있었다.

이 해 4월 6일 내무성은 「훈령갑제12호」를 비밀리에 전국 경찰서와 경찰분서에 하달하여 남여혼숙을 자행하고 금염기도로 의료행위를 하는 등 음사사교 집단으로 규정하여 천리교에 대한 단속을 철저히 강화하도록 지시하고, 동시에 각종 매스미디어를 이용해 대대적인 반음사사교 캠페인을 벌기리도 했다. 이에 천리교 측은 5월에 교단개혁조항을 발표하고 신명을 천리대신으로 바꾸고 활동도 제한할 뿐 국가신도 체재에 맞는 교의와 의례로 변경을 서둘러 교단의 존속을 도모하게 된다. 그해 12월에 본부 신전과 교조전을 완성하고, 1915년에는 이대 진주 중산정선이 취임하여 1921년부터는 1926년의 교조40년제에 맞추어 교세 배가운동을 전개 1928년 통계에 공칭 신도수 409만 3천명을 포괄하는 대교단이 되었다. 당시교회 숫자가 10,430개소로 가장 큰 신종교 단체로 발전하고 있었다.

일제의 패전으로 당국의 제약이 풀리자, 우선 당장 천리교는 교조의 가르침에서 빗나가 있던 교의나 의례를 「복원」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원 위치시키는데 주력하게 된다. 이에 따라 1949년에는 원전에 충실한 “천리교교전”을 간행하고 1956년에는 교조의 전기로 「교본천리교조전」을 간행한다. 그리고 1967년 삼대진주로 중산선위가 취임하면서 다시 교조년제에 맞춘 포교방침을 내고 또 최근에는 교의연구나 신자의 교육, 복지, 의료 등의 시설로 사용하기 위한 「おゃさたなかた」를 건설하는 중에 있다. 현재 교세는 1989년 “종교년감”에 따르면, 신자 175만4천여명, 교사 18만5천명, 법인 15,417개로 매우 방대한 조직을 거느리고 있다.

미키의 포교는 사원․신사․山伏 등의 압박을 받았으나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길전가의 공인을 받아 최초의 교전(敎典) 「미기구라우다」를 만들었다. 이것은 막부가 망하기 직전의 격동기에 민중에서 고조되었던 세직(세상을 평정함)의 대망 분위기를 반영하고 친신에 의해 이상한 힘을 얻어 병도 재난도 부자유도 없고 양기만이 있는 이 세상의 극락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명치유신후 천리교는 대판으로 진출하였고, 미티는 「오후데사끼」란 교의를 지었다. 천리왕명을 인간세계의 창조주 친신으로 삼고 창조의 성지를 중산가의 집터로 삼았다. 친신은 시간․사람․장소, 3개의 인연에 의해 신사로서 하늘에서 내려와 세계는 구제한다고 하며, 모든 인간에게 평화와 풍부한 양기의 삶을 약속했다고 한다. 인간에게는 욕심 등의 여덟 가지 애(惡心)를 버리고, 자신의 몸은 신이 준 것, 신으로부터 빌린 것임을 깨닫고 진심으로 신앙하면 건강하고 행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천리교는 명치 전기에 현세중심, 인간 본위의 구제종교로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그의 가르침에는 인간은 모두 신자로서 평등한 형제이며 죽음은 새로운 탄생에 불과하고, 집은 부부가 중심이 되며 조상숭배나 가부장제 가족 도덕을 부정하였다. 국가 신도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천리교는 끊임없이 심한 탄압을 받았으나 미키는 고산(권력자)의 몰락과 곡저(民家)의 융성을 예언하고 독자로 창조신화「고후끼」(이해고기)를 지었다. 고후끼는 친신가 이해에서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을 위해서 세계를 창조하였다고 하고 인간이 양기 생활을 즐기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친신의 소원에 따라 인간세계가 창조되었다고 하는 어디까지나 인간 본위의 신화였다.

미키는 18회 검거되었고 탄압 속에서 다난한 90년생 생애를 끝냈다. 그녀는 유언에서 신앙은 모든 정치 권력이나 법률을 초월한다고 가르쳤으나 그가 죽자 천리교는 구가신도에 종속하고 탄압을 면하여 활동을 합법화하는 길을 걸어, 1908년 교파신도의 최후의 독립교파로서 공인되었다.     
▲ 천리교 3원전    


천리교란 어버이신님을 신앙하는 종교로 어버이신님을 천리왕님이라고 부른다. 천리교가 신봉하는 천리왕님(일명 어버이신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은 신인의 공락하는 즐거운 삶을 누리는 것이며, 그 삶을 잘살고 못사는 것은 인간들의 마음 씀씀이에서 온다고 한다. 인간은 다같은 형제이니 서로 도와 상부상보하면서 살아가게 되어있고 또 그렇게 살아갈 때에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다. 제신은 친신, 천리왕명이다. 교조신앙으로 천리교를 낳은 교조 중산미희를 그렇게 부른다. 교전은 신이 내려 기술한 “신약가”와 “어필선”, 그리고 여기에 “어지도”를 합하여 3원전이라 한다. 전후 새로운 시대에 부응한 교전의 작성에 힘을 기우려 1949년 10월 26일 제정된 것이 “천리교교전”(천리교교회본부편, 도우사)이다. 의식행사는 항례제로 불리는 것에 월차제(매월 26일)․춘계대제(1월 26일, 교조 명일)․추계대제(10월 26일, 입교일)․교조탄생제(4월 18일)․춘계영제(3월 27일)․추계영제(9월 27일)의 육제전이 있고 그 밖에 원단제(1월 1일)․어린이 모임(7월 25일-8월 4일)․교조경축순간(4월 18-27일)․청년회총회(4월 19일)․부인회총회(4월 20일)․체육제(4월)․학생생도수양회(8월 7-18일) 등이 있다.

<천리교 3원전>    

신약가: 근행을 위한 손춤의 지가로서 팔수의 노래가 1장에서 12장까지 각각 10수씩의 수가형태로 되어있는데 교조가 직접 지은 것이다.
어필선: 교조 미끼가 ‘어버이신’의 뜻을 받아 적은 것으로 1711수의 노래가사 형식의 17권으로 되어있다.
어지도:타인이나 교회 용재를 비롯하여 신상사건 등 일상생활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을 어버이신님께 여쭈면 어버이신님께서 마음가짐이나 핼할 바 처신 등을 교조 미끼에게 지도해 주신것으로 1887년 초부터 1909년까지 20년 간의 지도말씀을 기록한 것이며 총 8권으로 되어있다. (삼국유사문화원장·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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