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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 天問天答 128

담선(談禪)공부 모임 | 기사입력 2017/06/22 [08:54]
‘속박’은 ‘스스로’에 대한 ‘오해’ ‘착각’ 때문

통찰! 天問天答 128

‘속박’은 ‘스스로’에 대한 ‘오해’ ‘착각’ 때문

담선(談禪)공부 모임 | 입력 : 2017/06/22 [08:54]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理解)를 통해 무지(無知)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은,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고난과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비정상적 한계를 실감 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依支)하고 의존(依存)하며,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와 종교가 발전을 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와 갈등으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와 철학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一部)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와 함께 많은 분들이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밝혀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지성(知性) 인류의 이야기가 될 것이며, 자산(資産)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의존하고 따르든지, 어떠한 ‘삶’을 살아가든지, 그러기 이전(以前)에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먼저 알고 깨우치는 것이 상식(常識)중의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상식적 ‘깨달음’과 인간정신과 더불어서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가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談禪모임 眞鏡> 
 
‘속박’은 ‘스스로’에 대한 ‘오해’ ‘착각’ 때문    

질문279: ‘스스로’ 아는 ‘자기 앎’만이 ‘속박’으로 부터의 완전한 ‘해방’이라 하셨습니다.    

제가 추측컨대, 학식과 학문을 통한 모든 ‘앎’은, 결국 ‘존재’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를 충족시켜 줄 뿐입니다. 그래서 기대심리가 크면 클수록 더 많은 학식과 학문을 끌어 모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 드릴수가 있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알 수가 있는 것은, 오직 ‘자기’가 ‘자기 자신’을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속박’은 학식과 학문의 부족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가 ‘스스로’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 저에게는 ‘진리’와 ‘도’, 그리고 ‘깨달음’은 너무도 먼 이웃나라의 이야기 같습니다. 그냥 단지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존재’에게 어떤 ‘자유’가 있을 수가 있는지 저도 궁금합니다. 어떤 ‘존재’도 ‘스스로’일 수가 없으며, 일말의 능동성도 없으며, 태생적 한계는 ‘숙명’과도 같습니다.    

비록 꿈을 꾸고 있을 당시에는, 진행되어지고 있는 이 모든 의식작용이, 꿈이라는 것을 모른다 할지라도, 꿈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며, 꿈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할지라도, 이 꿈을 내가, 즉 ‘나’가 꾸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로 인식을 하지만, 진행되어지는 이 모든 것들의 근본 질료는, ‘나’의 의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창하게 ‘진리’와 ‘도’, 그리고 ‘깨달음’을 이야기 하지만 결국은 ‘나’, 즉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기 자신’을 바로 아세요. ‘존재’와 ‘비존재’로 부터도 자유로우니 그 이상의 ‘자유’는 없는 것입니다.    
   

질문280: 진경님, ‘무경계’에 대한 견해는 어떻습니까?    

‘자기 자신’을 바로 알면,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런 경계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무엇’이 되기 이전의 ‘나’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나’를 바로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알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며, ‘어떤 단계’를 밟아야 하며, 특정 종교의식과 특정 수행과 특정 심리 치료 등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질문): 살아온 연륜이 길다보니, 앞으로 살아갈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가올 ‘죽음’을 잘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다가올 ‘죽음’을 잘 받아들인다 하여 멋진 삶을 산 것도 아니며, 다가올 ‘죽음’을 못 받아들인다 하여 또한 잘못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깨어나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나고 살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련의 모든 것들이 꿈이기 때문입니다.    


질문281: 중도의 상태와 중용의 상태에 대해서 조금 더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흔히 기준점을 옮겨서 균형을 잡는 방법이 있을 수가 있으며, 기준점은 고정시키되 기준점 좌우의 어느 한곳을 가감시켜서 균형을 잡는 방법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들 중도와 중용에 대해서 사전적 의미로 단순히 어느 한쪽이나 한 곳으로 치우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으며, 그로인해 균형과 조화로 연결 지어 의미를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준이 있으며 치우칠 수가 있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합당하다 할지라도 나눔과 분리의 세계에서만이, 즉 꿈속에서만이 가능할 일입니다. 그래서 조화와 균형은 꿈속의 이야기라 할 수가 있습니다.     

옛 성현들이 이야기하는 중도와 중용이 가리키는 것은 ‘어떤 기준’도 갖지 않는, 즉 모든 기준으로부터의 ‘자유’, 다시 말해서 일체(一體)즉 ‘자유’를 가리키고 있지 않겠습니까? 마치 ‘진리’가 어떤 기준도 갖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질문): 그렇다 할지라도 ‘진리’는 선(善)에 부합(符合)합니다.    

만약에 ‘진리’가 ‘선’에만 부합하다면 ‘악’은 드러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기준 없이 모든 것이 드러날 수가 있는 이유는, ‘진리’에게는 어떤 기준도 없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드러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질문): ‘진리’가 무엇입니까?    

자유로운 성품으로 인해, ‘어떤 기준’도 갖지 않으며, ‘존재’되어질 수가 있는 모든 기준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말과 글로 설명되어질 수가 없습니다.     

(질문): ‘진리’와 ‘삶’은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라고 봅니다. 자유로운 성품으로 인해 ‘어떤 기준’도 갖지 않는다면, ‘삶’은 어떻습니까?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잠을 잘 때마다 꿈을 꾸었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불현 듯’ 꾸어졌으며, ‘불현 듯’ 깨어졌습니다. 단 한 번도 똑같은 상황의 꿈을 꾼 적은 없습니다.     

왜 이겠습니까? 분명 ‘지금의 나’만이 ‘나’라면, ‘지금의 나’에게는 분명한 철학과 소신이 있으며, 남과는 비교되어질 ‘기준’도 있습니다. 내 꿈이고 ‘나’의 꿈이라면 분명 나의 철학과 소신과 기준이 반영되어, 그에 걸 맞는 꿈을 꾸어야 하는데, 그와는 상관없이 불현 듯 꾸어지고 깨어졌다는 겁니다.     

왜 이런 일이 ‘나’의 의식 안에서 일어나고 있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철학과 소신과 기준을 가지고 있는 ‘나’는, 즉 ‘지금의 나’는 참다운 ‘나’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무의식적이며 정신을 잃은 ‘나’는 ‘나’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개인의 단편적 ‘삶’은 꿈일 수밖에 없으며, 그로인해 ‘어떤 기준’도 없습니다. 마치 밤에 무의식적으로 잠을 자면서 무의식적으로 꿈을 꾸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진리’ 또한 무기준(無基準)으로 인해서, ‘진리’로 인한 ‘삶’에는 ‘어떤 기준’도 없습니다.    

(질문): 따라가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인식을 하는 ‘나’는 ‘지금의 나’이다 고 하셨습니다.     

예.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인식하는 ‘나’가 있을 수가 있으려면, ‘인식’되어지는 ‘무엇’으로써 대상(對象)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로서 전부인, 즉 일체(一體)에게는 나눔과 분리는 꿈속에서나 가능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식을 하는 ‘나’는 ‘지금의 나’이며, 꿈속의 하나의 배역에 불과할 뿐입니다.    

(질문): 이 모든 상황(삶)이 꿈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꿈일 수밖에 없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꿈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이야기는, 이 모든 상황(삶)이 ‘나’로부터 비롯되어졌으며, 내가 꾸고 있는 꿈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이야기이며, 모르고 있기 때문에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입니다.     

꿈이라는 것을 아는 시점은 깨어난 시점입니다. 그리고 깨어나고서야 누가 꿈을 꾸고 있겠습니까? 다시 말해 꿈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또한 꿈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식을 하고 있는 ‘나’는 ‘지금의 나’이며, ‘지금의 나’는 육체만을 동일시하여, 인식되어지고 있는 모든 것을 대상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면하고 있는 이 ‘삶’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삶’과 ‘지금의 나’를 ‘분리’해서 보고 있으며, 그렇게 바라보는 이유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의 나’만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착각이 꿈과 같기 때문에 이 모든 상황(삶)이 또한 꿈일 수밖에 없습니다.    

(질문): 그렇다면 ‘진리’는 인식을 할 수가 없으며, 진리로서 ‘나’는 아무것도 인식할 수가 없는 것입니까?    

오직 ‘하나’로서 ‘진리’는 인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눔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리’로서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애써 나누고, 무수히 많은 ‘지금의 나’가 개별적 의식을 가지고 다양한 인식을 하고 있지만, 그건 꿈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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