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老病死와 五慾七情은 幻影이자 꿈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理解)를 통해 무지(無知)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은,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고난과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비정상적 한계를 실감 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依支)하고 의존(依存)하며,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와 종교가 발전을 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와 갈등으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와 철학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一部)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와 함께 많은 분들이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밝혀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지성(知性) 인류의 이야기가 될 것이며, 자산(資産)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의존하고 따르든지, 어떠한 ‘삶’을 살아가든지, 그러기 이전(以前)에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먼저 알고 깨우치는 것이 상식(常識)중의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상식적 ‘깨달음’과 인간정신과 더불어서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가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談禪모임 眞鏡> 生老病死와 五慾七情은 幻影이자 꿈에 불과 질문282: ‘삶’의 능동적 주체는, ‘삶’에 대한 어떤 기준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 만약 능동적 주체에게 어떤 기준이 있으며, 그 기준에 부합하는 ‘삶’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이렇게 무수히 많은 다양한 개별적 ‘삶’이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삶’의 능동적 주체에게는 ‘삶’에 대한 어떤 기준도 없습니다. 마치 꿈꾸는 자가 무의식상태에서, 어떠한 기준도 없으며, 그로인해 다양한 꿈을 꿀 수가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질문): 진경님의 ‘삶’은 어떻습니까? 비록 저 또한 무수히 많은 다양한 ‘삶’속에서, 개별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여 진다 할지라도 저는 ‘항상적 자각’으로 인해 ‘자유’입니다. 왜냐하면 저에게 있어 ‘개별적 삶’은 꿈과 같으며, 꿈이기 때문입니다. 질문283: 죽는다는 것이 두렵습니다. 이번 생 동안에 이룬 모든 것들이 상실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두렵다는 것은, 죽으면 ‘상실되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나고 살며 이룬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고 있을 때, 죽음이 임박하기 전에 먼저 정리를 하세요. 그것이 두려움을 최소화 시킬 수가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니면 ‘자각’하세요. 이 모든 것이 ‘나’의 뜻이고 의지라는 것을 ‘자각’하세요. 나고 살고 병들고 늙고 죽으며, 그에 따라 다양하게 따라오는 오욕칠정(五慾七情)과 이루어 놓은 모든 것들이 하나 예외 없이 환영과 같으며,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육체와 동일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질문): 그렇다면 깨달음을 얻고, 도를 이룬 성인과 성자들은 ‘죽음’을 초연하게 잘 받아들입니까? 아니면 죽지 않는 것입니까? ‘죽음’을 초연하게 잘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죽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태어나고 살고 병들고 늙고 죽는다는 일련의 모든 일들이 ‘꿈’이라는 것을 압니다. 다시 말해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습니다. (질문): 누구든지 한 사람으로서의 ‘삶’은 파란만장(波瀾萬丈) 하며, 그럴 수가 있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이룰 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잘 극복하고 잘 넘어 왔다 할지라도 결국 남는 것은 ‘두려움’ 밖에 없습니다. <저작권자 ⓒ CR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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