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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 天問天答 135

담선(談禪)공부 모임 | 기사입력 2017/07/17 [09:08]
아무것도 아닌 것만이 절대적

통찰! 天問天答 135

아무것도 아닌 것만이 절대적

담선(談禪)공부 모임 | 입력 : 2017/07/17 [09:08]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理解)를 통해 무지(無知)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은,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고난과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비정상적 한계를 실감 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依支)하고 의존(依存)하며,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와 종교가 발전을 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와 갈등으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와 철학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一部)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와 함께 많은 분들이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밝혀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지성(知性) 인류의 이야기가 될 것이며, 자산(資産)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의존하고 따르든지, 어떠한 ‘삶’을 살아가든지, 그러기 이전(以前)에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먼저 알고 깨우치는 것이 상식(常識)중의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상식적 ‘깨달음’과 인간정신과 더불어서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가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談禪모임 眞鏡>

아무것도 아닌 것만이 절대적   
    
질문296: 영(靈)과 혼(魂), 즉 영혼은 무엇이며 어떻게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까?     

영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모든 나누어지고 분리되어진 것을 ‘하나’로 이어주고 있으며, 혼은 육체와의 동일시로 생겨난 자아, 즉 자신의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래서 영은 ‘하나’이지만 혼은 무한히 많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영이라 할 수가 있으며,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는 혼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질문: 그렇다면 하나의 영 안에 무수히 많은 혼이 있다는 말인데, 어떻게 개별적 혼 에게는 주어지는 환경과 여건이 다 다르며 이렇게 불평등할 수가 있습니까?    

예를 들어서, 얼음을 가장 구속적인 상태로 보고, 수증기를 가장 자유로운 상태로 본다고 가정을 하면, 얼음의 입장에서는 제한적 상태로 인해, 상태에 대한 불평등을 이야기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얼음과 물과 기체의 상태는 실체가 아니라 일종의 정형(定形)으로 인한 상태로서, 어떤 차별과 불평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한 치의 예외도 없이 ‘상태의 자유’, 즉 ‘존재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상태든지 ‘존재’ 되어 지고 있다는 것은, 영의 수용과 허용이 있으므로 가능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질문: ‘상태의 자유’, 즉 ‘존재의 자유’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비록 얼음이라 할지라도, 존재적인 측면의 상태는 비록 구속적이라 할지라도, 그 저변에는 ‘자유’로 인한 구속이기 때문에, 구속조차 ‘누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마치 얼음과 물과 수증기가 상태적(常態的)으로 달라서 구속의 정도가 달라 보일 수가 있지만, 근본 자성은 물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듯이 말이지요.    

질문: 그렇다면 ‘영’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이며, 모든 사물이 ‘영’으로 인해 결국은 ‘하나’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일체(一切) 즉 일체(一體), 따라서 모든 상태가 결국은 ‘자유’입니다.

‘진리’는 그렇게 모든 것에게 ‘자유’를 부여하고 있으며. ‘진리’로 인해 모든 것이 자유롭습니다.    

질문: 논외의 질문이지만, 그렇다면 더 많은 자유를 누리려면 결국은 자기의 ‘마음 상태’를 바꾸는 것이 합당해 보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존재의 자유는 ‘상태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태는 늘 변하기 마련입니다. 불변의 자유, 즉 자기 자신을 바로 아세요.   
  

질문297: ‘시작’은 있었습니다. ‘끝’도 있을 것입니다. 시작을 유발한 ‘무엇’을 ‘진리’라 표현을 하셨습니다. 끝나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작’이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리’는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질문: 그렇다면 ‘진리’를 대변할 수가 있는 것은 ‘나 자신’입니까?    

아닙니다. ‘진리’를 대변할 수가 있는 것은 ‘자유’이며, ‘나 자신’을 대변할 수가 있는 것이 ‘진리’와 ‘자유’입니다. 따라서 ‘나’는 ‘진리’이자 ‘자유’입니다.    

질문: ‘진리’와 ‘자유’로 대변될 수가 있는 ‘나’는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작’되어서 언젠가는 ‘끝’날 모든 것이 꿈과 같고, 환영과 같습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아닌 것만이 절대적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불현 듯 ‘자각’ 합니다. ‘나’는 무엇이며, 누구인가? 따라서 ‘지성’은 모든 ‘시작’의 시발점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질문: 진경님의 지성(知性)을 배우고 싶습니다.    

바로 아세요. ‘지성’은 누군가가 누구에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님’의 ‘지성’은 지금 잠을 자고 있으며, 꿈을 꾸고 있습니다. ‘님’의 ‘지성’을 깨우세요. ‘스스로’ 깨어나는 것만이 최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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