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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 天問天答 136

담선(談禪)공부 모임 | 기사입력 2017/07/20 [07:50]
‘깨달음’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통찰! 天問天答 136

‘깨달음’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담선(談禪)공부 모임 | 입력 : 2017/07/20 [07:50]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理解)를 통해 무지(無知)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은,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고난과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비정상적 한계를 실감 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依支)하고 의존(依存)하며,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와 종교가 발전을 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와 갈등으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와 철학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一部)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와 함께 많은 분들이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밝혀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지성(知性) 인류의 이야기가 될 것이며, 자산(資産)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의존하고 따르든지, 어떠한 ‘삶’을 살아가든지, 그러기 이전(以前)에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먼저 알고 깨우치는 것이 상식(常識)중의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상식적 ‘깨달음’과 인간정신과 더불어서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가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談禪모임 眞鏡>

‘깨달음’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질문298: ‘나’, 즉 ‘나 자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며, 또한 드러난, 드러날 수가 있는 모든 것이 ‘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시간과 공간과 어떤 에너지와 어떤 에너지 형태에 귀속될 수가 없습니다. 
    

질문299: 한 성인의 증언으로 저의 ‘전생’을 알게 되었습니다. 각고의 수행을 통해서 ‘불사의 경지’ 가까이 다가갔었다고 합니다.     

만약에 ‘전생’이 있었다면 ‘죽음’을 거쳐서, 다시 환생을 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있습니다. ‘지금 여기’ 이렇게 있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미지의 현상에 의해 일말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에 영향을 받지 않는데, 어떤 수행을 했으며, 수행을 통한 불사의 경지는 또 무엇입니까?    

질문: 저는 불가에서 이야기하는 ‘윤회’를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공과 덕을 쌓아서 이 사슬로부터 벗어나고 싶습니다. ‘삶’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습니다.    

‘윤회’를 받아들인다면 ‘님’의 전생은 수천에서 수만 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수천수만 번의 ‘윤회전생’ 동안에 단 한번이라도 ‘속박’이 실제로 존재했다면, 어떻게 ‘지금 여기’ 있을 수가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수천수만 번 동안 단 한번도, ‘삶’의 속박으로부터 ‘속박’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여기’ 이렇게 있을 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질문: ‘깨달음’을 얻으면 생로병사를 초월하며, ‘윤회’로부터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깨달음’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자기가 자기 자신이 목적이 될 수가 있습니까? 자기가 곧 자기 자신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리고 생로병사를 겪으며, 살아간다고 여기고 있는 ‘나’는 동일시로 인한 ‘지금의 나’입니다. ‘스스로’ 깨어나면, 깨어나기 직전에 ‘지금의 나’는 꿈과 함께 사라집니다.     

따라서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 ‘윤회’를 벗어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상상에 불과합니다.   
    

질문300: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입니까?    

의식적으로 ‘의식적인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식적으로 죽는 것만이 최선입니다. 육체에게는 어떤 책임도 어떤 문제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체만을 놓고 보면, 육체는 스스로 산 적이 없으며,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육체로 인한 업도 없으며, 육체로 인한 어떤 걸림도 없습니다.    

질문: 여자의 몸을 가지고서는 ‘깨달음’은 불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깨달음’이 남자의 몸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남자와 여자로 구분 짓는 기준 또한 육체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나 자신’을 깨우고, 깨어나는데 남자가 어디 있으며, 여자가 어디 있습니까? ‘진리’는 어떤 조건도 원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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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ltks 2017/07/20 [20:29] 수정 | 삭제
  • 노벨상을 받을 만한 혁명적인 이론으로 우주를 새롭게 설명하면서 기존의 과학 이론들을 부정하는 책(제목; 과학의 재발견)이 나왔는데 과학자들이 침묵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침묵하지 말고 당당하게 반대나 찬성을 표시하고 기자들도 실상을 보도하라! 이 책은 중력과 전자기력을 하나로 융합한 새로운 이론으로 우주의 모든 현상을 명쾌하게 설명하면서 서양과학으로 동양철학(이기일원론과 연기론)을 증명하고 동양철학으로 서양과학을 완성한 통일장이론서다. 과학을 탐구하는 중요한 수단은 실험 계측과 수학 계산인데 그 2가지 수단에서 모두 오류가 발생하므로 과학 이론에도 흠결이 존재한다. 하나의 이론이 올바르다면 우주의 탄생과 운행을 모두 설명할 수 있으므로 다른 이론이 필요 없는데 고전물리학과 현대물리학이 상호보완하면서 공존하는 이유는 두 이론에 모두 흠결이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이론은 하나의 원리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지 못하고 국소적인 상황만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임시방편이다. 철학은 본질을 탐구하고 과학은 현상을 연구한다. 그래서 그들이 다른 길로 가고 있지만 계속 전진하면 결국 만나야 한다. 왜냐하면 본질을 발견하면 현상을 이해하고 반대로 현상을 이해하면 본질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원리를 모르면 올바른 가치도 알 수 없으므로 과학이 결여된 철학은 진정한 철학이 아니다. 이 책을 보면 독자의 관점과 지식은 물론 철학과 가치관도 바뀐다. 이 책은 형식적으로 과학을 논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인문교양서다.
  • 민화 2017/07/20 [08:00] 수정 | 삭제
  • 300회 연재를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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