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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회록(法會錄) 9

담선(談禪)공부 모임 | 기사입력 2017/07/24 [06:27]
‘자기 자신’을 구원할 메시아는 ‘자기 자신’ 밖에 없다

법회록(法會錄) 9

‘자기 자신’을 구원할 메시아는 ‘자기 자신’ 밖에 없다

담선(談禪)공부 모임 | 입력 : 2017/07/24 [06:27]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理解)를 통해 무지(無知)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은,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고난과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비정상적 한계를 실감 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依支)하고 의존(依存)하며,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와 종교가 발전을 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와 갈등으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와 철학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一部)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와 함께 많은 분들이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밝혀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지성(知性) 인류의 이야기가 될 것이며, 자산(資産)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의존하고 따르든지, 어떠한 ‘삶’을 살아가든지, 그러기 이전(以前)에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먼저 알고 깨우치는 것이 상식(常識)중의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상식적 ‘깨달음’과 인간정신과 더불어서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가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談禪모임 眞鏡>    

법회록(法會錄) 9
‘자기 자신’을 구원할 메시아는 ‘자기 자신’ 밖에 없다    

‘진리’에 대한 증거라고 하는 것은, 단언컨대 ‘진리’가 되는 것 외에는 달리 어떤 것도 없습니다. 아니면 차라리 먼지 하나에서부터 모든 것을 ‘진리’의 반영으로, 즉 만물을 ‘진리’에 대한 증거로 받아들이든지 말이지요.

이 ‘진리’에 대한 증거는, “‘진리’가 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다.” 그러니 이러한 이해 속으로 녹아 들어 보세요. 즉, 삶에 대한 모든 것을 ‘무조건적’으로 허용하고 포용하면서, 모든 것을 내맡길 수밖에 없다는 이해!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정체성, 즉 나는 ‘누구이다’ 나는 ‘무엇이다’ 라고 하는 제한적 정체성을 고집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 하면, 지금까지 이렇게 평생을 살아 왔지만 매일 밤마다 내가 사라지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내가 나타나고 드러나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사라지고 나타나는 그 사이에서도 ‘나’라고 인식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사라지고 나타나는 ‘나’와는 또 다른 내가 잠시 등장을 하곤 하더라는 겁니다.    

하루의 삶 속에 들어가 보면 70억 인류가 각자의 다양한 삶을 살겠지만, 매일 밤 사라지고, 매일 아침에 드러나는 이러한 현상은 보편적이더라는 겁니다. 나타나고 사라지지만 나타나기 이전에, 드러나기 이전에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나타날 수가 있으며, 즉 ‘무언가’가 나타나게 하고 사라질 때 또한, 일말의 능동성조차 없기 때문에, 능동적 주체로서의 ‘무언가’가 사라지게 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따라서 매일 나타나고 사라지는 ‘누구이다’ ‘무엇이다’는 어떤 능동성도 없으며, 그로 인해 어떤 실체성도 가지지를 못하더라는 겁니다.    

따라서 아침이 되면 나타나고 드러나는, 그리고 밤이면 사라지는 육체와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는, 천만고 영웅호걸이라 할지라도 참다운 ‘자기 자신’이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삶에 있어서 ‘어느 누가’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 자신의 업적이라 할 수가 없으며, 그로인해 어떠한 삶을 살고 있으며, 살았다 할지라도 무의미한 삶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잠자면서 꾸는 수없이 많은 꿈들 중에 하나일 뿐이며, 그리고 무지로 인한 꿈속에서의 속박과 번뇌, 그로 인해 추구하는 자유와 해탈 또한 무지의 연장선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속박과 번뇌, 그로인한 자유와 해탈은,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 라고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육체와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는 사실적인 ‘나’로부터 비롯되어진 1차적 개념과 같고, 이 1차적 개념은 더불어서 그림자와 같아, 속박과 번뇌는 그림자의 그림자와 같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각고의 노력을 통해서 자유로워졌으며 자유를 얻었다고 한다면, 속박과 번뇌를 해결했다고 한다면, 이 또한 꿈속의 꿈일 뿐이며 오류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의식의 도그마(dogma)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바로 알고,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 외에 다른 모든 것은 헛되다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내가 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있다’는 것을 알며,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사소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채 말이지요. 즉 ‘내가 있다’ ‘내가 존재한다’가 지금 여기서 이렇게 존재할 수가 있는 이유는 존재하게 하는 ‘무언가’로서, ‘자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몇 안 되는 성자들이 이러한 직관적 통찰을 통해 ‘내가 존재한다’는 1차적 앎에 대한 허구를 ‘자각’하셨어요. 해탈한 것도 아니고 세상을 구원한 것도 아니고.    

따라서 만족과 불만족,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덕과 죄, 선과 악, 희열과 고통, 자유와 속박, 번뇌와 해탈, 앎과 모름, 옳음과 그름 등의 이러한 모든 것들이, 결국은 나는 ‘누구이다’, 나는 ‘무엇이다’, 나는 ‘존재한다’고 하는 ‘지금의 나’에게 국한되어 있는 막연한 사연에 불과할 뿐입니다.    

질문: 신으로 묘사될 수도 있는 ‘성자’들은 세상을 구원한 적이 없는데, 사람들은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나락으로, 즉 ‘무지’로 빠뜨린 것도 결국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구원할 메시아는 역시나 ‘자기 자신’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실체는 ‘스스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의 잠과 꿈과 깨어 있음에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질문: ‘스스로’라는 말은 어떤 의미로 사용하십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어떤 구속이나 속박으로부터도 영향 받지 않은 ‘자유’, 어떤 구속이나 속박조차도 만들어 내는 ‘자유’, ‘시작’도 없으며 ‘끝’도 없는 ‘자유’, 완전한 능동성으로서의 ‘자유’, ‘책임’을 다하는 ‘자유’, 시작시킬 수가 있으며 끝낼 수가 있는 ‘자유’ 

따라서 영원한 ‘자유’, 무한한 ‘자유’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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