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통찰! 天問天答 138

담선(談禪)공부 모임 | 기사입력 2017/07/31 [07:34]
‘오직 존재에만 머물러라’

통찰! 天問天答 138

‘오직 존재에만 머물러라’

담선(談禪)공부 모임 | 입력 : 2017/07/31 [07:34]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理解)를 통해 무지(無知)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은,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고난과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비정상적 한계를 실감 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依支)하고 의존(依存)하며,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와 종교가 발전을 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와 갈등으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와 철학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一部)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와 함께 많은 분들이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밝혀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지성(知性) 인류의 이야기가 될 것이며, 자산(資産)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의존하고 따르든지, 어떠한 ‘삶’을 살아가든지, 그러기 이전(以前)에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먼저 알고 깨우치는 것이 상식(常識)중의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상식적 ‘깨달음’과 인간정신과 더불어서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가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談禪모임 眞鏡>  
  
‘오직 존재에만 머물러라’    

질문302: 한 성자가 말씀하기를, ‘내가 있다’에만 머물러라 고 말을 합니다.    

내가 있다. ‘내가 존재 한다’, 그냥 ‘존재’하라, 오직 ‘존재’에만 머물러라 등 다 같은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결국 그림자를 유발하는 ‘빛’이 있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러니 ‘내가 존재 한다’가 있다는 것은 결국, 내가 있다, 내가 존재 한다 를 유발하는 더 사실적인 측면의 ‘나’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록 동일시로 인한 ‘지금의 나’라 할지라도, 그 자체로 이미 모든 것을 증거하며, 이러한 사실관계를 ‘자각’한다면 또한 ‘증언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질문: 수행자로서, 내가 있다, 존재하라 등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지만 아직도 쉽게 다가오지를 않습니다.    

고요와 정적으로 대변되어지는 ‘아무 것도 아닌’ 그 자리에서 불현 듯 ‘나’라는 한 생각이 일어나며, 이때는 아직까지도 비동일시로 인한 어떤 상태도 아니며, 그로인해서 ‘나’라는 한 생각은 단지 ‘내가 있다’, 즉 ‘나는 존재 한다’라는 순수‘자의식’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있다’는 자의식은 태생적 한계로 인해서, 상호의존적인 관계이지만 육신을 기반으로 하는 존재 형태와 존재 상태를 자기 정의화 하여, ‘나는 무엇이며 누구이다’라는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지고 있는 ‘지금의 나’는 자의식으로서 ‘나는 누구와 무엇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무엇이며 누구이다’는 자기 정의를 해체하고 나면, 비동일시의 ‘순수자의식’만 남을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은 성자들이 말하는 ‘오직 존재에만 머물러라’는 이야기는, 동일시 상태의 정체성을 해체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질문: 간혹 말씀하시는 중에 ‘불현 듯’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십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무의식상태에 빠져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무의식상태에서 의식적으로 깨어난다면 ‘불현 듯’이 아니라, 모든 것이 ‘나’의 뜻이자 의지이며, 내 마음먹기이다 고 표현을 할 것입니다.    

질문: ‘순수자의식’이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즉흥적인 표현입니다. 하지만 적절해 보입니다. 동일시로 인한 어떤 상태도 아니기 때문에, 비록 만들어진 의식이지만 ‘자아’의 성향은 없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질문303: 꿈에서 깨어나고 싶은 만큼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저에게 동기부여를 부탁드립니다.   

꿈을 꾸고 있을 당시에는, 감각과 인식작용을 기반으로 해서 지각작용을 하는 ‘지금의 나’조차도 ‘꿈’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자의식은 마치 ‘능동적 의지’를 행사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꿈이 깨어질 때 불현 듯 같이 깨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꿈속의 나를 포함해서 일련의 모든 것들이 결국은, 의식이 잠이 들어 무의식상태에서 그려내는 의식작용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자의식’의 동일시로 인한 ‘지금의 나’는 꿈속의 ‘나’와 그 처지가 똑 같다는 겁니다.    

내가 태어났으니 당연히 살아가면서 늙고 병들고 죽는다고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태어나진 것이며, 살아지는 것이며, 병들어지는 것이며, 늙어지는 것이며, 죽어지는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한 사람’의 부귀영화의 삶이든지, 파란만장한 삶이든지 그 어떠한 삶이라 할지라도, 단순히 더 사실적인 ‘나’가 무의식적으로 꾸는 꿈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작년 이맘때 꾼 꿈이, 지금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듯이 ‘한 사람’의 삶은 꿈과 같으며 아무 의미가 없기는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삶’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그 ‘삶’은 꿈과 같으며 무의식이 그려내는 단지 ‘의식의 노예’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질문: 영웅호걸의 ‘삶’이라 할지라도 단지 ‘의식의 노예’에 불과하다면 가히 절망적입니다.    

아니 어떻게 절망적일 수가 있습니까? 깨어날 수가 있다는 것은 모든 인류에게 알려줄 수 있는 ‘절대적 희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태생적으로 인한 한계는 마치 숙명처럼 운명처럼 받아들여졌지만,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은 태생적 한계로 인한 숙명이라는 ‘속박’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유’가 절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까?    

질문: 그렇다면 ‘진경님’께서 늘 입버릇처럼 말씀 하시는 ‘연민스럽다’는 것은, ‘의식의 노예’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물론 비교하여 나보다 못한 ‘이’와 ‘것’에 대하여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나보다 잘나고 더 나은 모든 것조차도 연민스럽게 봅니다.    

따라서 저에게는 모든 이와 모든 것이 연민스럽습니다.    

질문: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표현하고 있는, 동일성으로 비추어지고 있는 ‘지금의 나’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나’보다는 더 사실적인 ‘나’가 있으며, 더 사실적인 ‘나’만을 ‘참나’라고 이야기를 한다면 사람들은 ‘지금의 나’를 온전히 부정하려고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더 더욱 사실적인 ‘나’가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지만 상위의 ‘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이면서도 일체적인 ‘나’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스스로 ‘한 사람’의 정체성을 포기하고서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 앎’, 즉 ‘자각’한다면 성 삼위일체를 깨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둘 없는 ‘하나’가, 스스로를 망각하여 동시다발적으로 둘 있는 하나와 하나 있는 둘이 되었으며, 이제 다시 ‘자각’을 통해서, 모든 나눔과 분리가 단지 ‘자각’의 결여이며, 둘 없는 ‘하나’만이 온전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나’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더 사실적인 ‘나’가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으며, ‘지금의 나’와 더 사실적인 ‘나’가 있다는 것은 더 더욱 사실적인 ‘나’가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의식’ ‘자아’ ‘그림자’등으로 대변되고 있는 ‘지금의 나’는, 이미 그 자체로 바로 ‘그것’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행위적으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질문: ‘지금의 나’를 포기 하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지금의 나’를 ‘자기 자신’으로 여기지만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 도배방지 이미지

  • 이산 2017/07/31 [21:59] 수정 | 삭제
  • 목사들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설교하면서 자신은 이웃교회를 사랑하지 않는다. 자신의 교회가 지나치게 부흥하면 이웃교회들이 자립하지 못한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목자가 기르는 양떼가 크면 양을 잘 돌볼 수 없고 의사는 환자가 많으면 환자를 잘 돌 볼 수 없다. 그러므로 큰 교회의 신도일수록 구원될 확률이 낮아진다. 진심으로 양을 사랑하는 목자는 자신이 잘 돌볼 수 있는 만큼의 양떼만 보유하고 나머지는 이웃목장으로 보내서 잘 보살펴지도록 해야 한다. 수십 년간 수행한 스님들이 이권 때문에 싸우는 것을 보면 불교의 수행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스님들은 자기들끼리는 싸우면서 중생을 교화한다는 대가로 시주를 받는다. 어리석은 중생들이 시주를 그치면 스님들이 이권 싸움을 그치고 오히려 해탈해서 열반에 이를 것이다. 불교의 연기론은 과거(원인)에 의해서 현재(결과)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거의 과거는 어디에서 비롯했는가? 다시 말해서 최초의 과거는 어디에서 연유했는가? 우주의 원리와 생명의 본질을 새롭게 밝히는 책(제목; 과학의 재발견)이 나왔다. 이 책에 반론하면 5천만 원의 상금을 준다고 공시했는데 아무도 반론을 못하고 있다. 이 책에 반론하지 못하는 과학자들은 새 이론을 겸허히 수용하고 기자들도 실상을 보도하라! 이 책은 중력과 전자기력을 하나로 융합한 통일장이론으로 우주의 기원과 운행을 명쾌하게 설명하면서 서양과학으로 동양철학(이기일원론과 무아연기론)을 증명하고 동양철학으로 서양과학을 완성했다.
  • 민화 2017/07/31 [11:14] 수정 | 삭제
  • '더 사실적인 나'도 무의식적인 꿈을 꾸는 수가 있나요? 부귀영화나 파란만장한 삶을 '더 사실적인 나'가 꾸는 무의식적인 꿈이라고 설명하셔서요...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