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어떤 ‘앎’으로든지 ‘정의’되지 않는다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理解)를 통해 무지(無知)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은,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고난과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비정상적 한계를 실감 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依支)하고 의존(依存)하며,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와 종교가 발전을 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와 갈등으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와 철학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一部)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와 함께 많은 분들이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밝혀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지성(知性) 인류의 이야기가 될 것이며, 자산(資産)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의존하고 따르든지, 어떠한 ‘삶’을 살아가든지, 그러기 이전(以前)에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먼저 알고 깨우치는 것이 상식(常識)중의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상식적 ‘깨달음’과 인간정신과 더불어서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가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談禪모임 眞鏡> ‘진리’는 어떤 ‘앎’으로든지 ‘정의’되지 않는다 질문304: 절대적 주체로서의 ‘진리’는 대상화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안도 없으며 밖도 없습니다. 창조의 영역도 비창조의 영역도 결국은 ‘하나’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하나’는 말 그대로 ‘단일’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나’의 관점과 측면에서는 모든 것을 나누고 분리해서 인식하고 그에 따라서 지각하지만, 나눔과 분리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무의식’이 그려내는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직 일체만이 ‘실재’라 할 수 있으며, 그로인해서 절대적 주체는 오직 일체로서 그 어떤 나눔도 분리도 없으며 그 어떤 ‘대상’도 없습니다. ‘지금의 나’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모든 대상조차 결국은, 오직 ‘하나’의 일부로서 대상화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절대적 주체로서 ‘진리’는 대상화 될 수 없습니다. 질문: 그렇다면 대상화 될 수 없기 때문에 증거 할 수도 없으며, 찾아질 수도 없다면, 진리에 대한 ‘앎’은 어떻습니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대상화 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앎’은 없습니다. 어떠한 ‘앎’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상대적이며, 비교할 수 있으며 판단 지어질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앎’이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적인 측면에서만 가능할 수도 있기 때문이며, 비존재적인 측면에 대한 ‘앎’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리’는 단언컨대 알 수도 없으며, 알려질 수도 없으며 단지 ‘그것’이 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습니다. 제가 간혹 ‘일체’를 표현해 보려고, 가장 큰 것보다 더 크고 가장 작은 것보다 더 작다, 가장 높은 것보다 더 높고 가장 낮은 것보다 더 낮다, 가장 넓은 것보다 더 넓고 가장 좁은 것보다 더 좁다는 식으로 표현을 하는 것은, ‘진리’는 어떤 ‘앎’으로든지 ‘정의’되지 않으며,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질문: 진경님은, ‘진리’는 ‘그것’이 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하시니 감히 상상할 수도 없으며, 엄두도 못 낼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진리’는 ‘그것’이 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단언컨대 ‘지금의 나’, 즉 ‘자기 자신’을 스스로 육신과 동일시하여 비추어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무엇을 한다할지라도 상상할 수도 없으며 알 수도 없으며, 그 어떤 증거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나’만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고 있는 ‘무지’로부터 깨어나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질문: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한 사람’으로서 태어나 살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 동안은, 태생적 한계로 인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으며,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최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지금의 나’의 ‘한계’를 알아차리는 것이 최고의 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을 위한 공부와 수행은 ‘지금의 나’의 관점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라는 꿈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갖가지 고행과 명상, 방편들로 대변되는 수행을 통해서 도달해야 된다면, 이런 수행을 해야 하고 저런 수행을 해야 하며 이런 방법과 저런 방법이 생겨날 것이며, 그에 따른 온갖 영적 종교적 의식이 생겨날 것이며 온갖 규정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인류의 종교적 영적 역사를 둘러보면 그 가지 수가 너무나 방대하여, 어느 것이 가장 합당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온갖 것들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온갖 것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온갖 것을 허용하고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진리’가 특정한 방법과 특정한 길만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진리’는 마치 이 허공과 같이 닿지 않은 곳이 없으며, 임하지 않은 곳 또한 없으니 ‘한 사람’, 즉 ‘지금의 나’만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는, 고집을 피우지 않는 것이 정상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질문305: 이 허공조차도 고 질량에 의해서 눌려지며 그로인해서 중력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만약에 이 우주가 ‘하나’로서 일체라면, 우주자체만의 질량은 무한대에 가깝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분명 이 무한대에 가까운 고 질량은 ‘진리’에 어떤 식으로든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 우주는 하나의 단일체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무한을 지향하면 팽창을 계속하고 있으며, 이때 팽창계수가 전 우주에 걸쳐 공히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팽창하는 우주를 창조의 영역으로 보면, 팽창을 유발하지만 시간과 공간이 없는 우주외의 영역을 비창조의 영역으로 볼 수 있는데, 만약에 우주의 무한에 가까운 고 질량으로 인해서, 비창조의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면 팽창하는 우주의 팽창계수가 전 우주를 걸쳐 동일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진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차라리 ‘진리’가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질문: ‘진리’가 이 우주에 끼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부 다이며 모두 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유’입니다. <저작권자 ⓒ CR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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