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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 天問天答 140

담선(談禪)공부 모임 | 기사입력 2017/08/07 [07:49]
전지전능이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만을 아는 것’

통찰! 天問天答 140

전지전능이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만을 아는 것’

담선(談禪)공부 모임 | 입력 : 2017/08/07 [07:49]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理解)를 통해 무지(無知)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은,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고난과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비정상적 한계를 실감 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依支)하고 의존(依存)하며,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와 종교가 발전을 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와 갈등으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와 철학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一部)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와 함께 많은 분들이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밝혀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지성(知性) 인류의 이야기가 될 것이며, 자산(資産)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의존하고 따르든지, 어떠한 ‘삶’을 살아가든지, 그러기 이전(以前)에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먼저 알고 깨우치는 것이 상식(常識)중의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상식적 ‘깨달음’과 인간정신과 더불어서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가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談禪모임 眞鏡>  
 
전지전능이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만을 아는 것’

질문306: ‘전지전능’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입니까?    

단지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만을 아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신의 경지’라는 것이 있으며, 만약 모든 것을 다 아는 ‘무엇’을 ‘신’으로 본다면, 그 ‘신’은 절대적이라 할 수 없으며 ‘신’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한다면 아직도 ‘수동적이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을 다 안다면, ‘앎’으로서 알려지는 대상들은 결국 무엇이며, 누구의 작품이냐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앎’조차 만들어 낼 수 있는 ‘그것’만이 절대적이라 할 수 있으며, 정작 절대적 ‘무엇’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지전능이 절대적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만을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질문: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사람들은 ‘나’는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나’의 기준은 저렇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는, 어떤 관점도 어떤 기준도 없다는 것을 빨리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한 사람’이기 이전에 비 형태적 근본 자성으로 인해서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다양한 ‘생각’들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정작 어떤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생각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사실이 ‘나’는 그자체로 ‘무념무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무념무상은 수행자들에게 ‘경지’처럼 받아들여지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바른 정체성, 즉 자기를 바로 아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다양한 관점과 기준을 취할 수 있는 것도,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번뇌하고 망상할 수 있는 것도 이미 그 자체로, 그러한 것들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아무것도 할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알아야 할 것이 없습니다.     

만약에 내가 특정한 관점과 기준에만 매여 있다면, 자기 정의와 규정에 의해서 속박상태에 있으며, 그로인해서 어떤 다른 관점도 어떤 다른 기준도 가질 수 없으며,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없으며, 번뇌조차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무지’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꿈속에서나 가능한 ‘무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질문307: ‘진리’를 아는 것보다 ‘진리’가 되는 것이 가장 쉽다고 하셨습니다.    

절대적 주체로서 ‘진리’에 대한 ‘앎’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존재’에 대한 ‘앎’은, 가정하고 가설할 수 있지만, 비존재에 대한 ‘앎’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질문: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나눔과 분리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잠이 들었으며, 잠으로 인한 무의식이 의식작용을 통해서 비추어내는 ‘환영’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절대적 주체는 대상화 될 수 없으며, 분리 없는 ‘하나’ 또한 대상화 될 수 없기 때문에 증거 되어 지지도 않으며, 찾아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분리도 없기 때문에 비교하여 판단할 수 없으며, 그로인해서 어떤 ‘앎’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의식의 도그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의식이 비추어내는 의식작용, 즉 꿈으로부터 깨어나서 잠으로부터도 깨어나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지고 있는 ‘지금의 나’는 단지 무의식이 비추어내는 꿈속의 배역에 불과하며, 그로인해서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서, 완전과 무한을 지향하지만,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는 영원한 미완성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잠이 들 때에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듯이, 잠이 깰 때 또한 어떤 노력도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로 의식을 놓아버리면서 잠이 들었고, 스스로 ‘정신’을 차리면서 꿈이 깨어졌으며, 잠에서 깨어날 수 있듯이 ‘스스로’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문을 닫았으면 문을 열 수 있는 것입니다. 문을 닫기 위해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그냥 단지 ‘의식’을 놓아 버렸습니다. 그와 같이 문을 열기위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듯이 그냥 단지 ‘정신’을 차리면 되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어떤 노력도 사실은 필요하지가 않습니다. 마치 지난밤에 잠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러한 보편적 사실을 외면하고, 깨어나기 위해서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설정들을 하여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설정들을 경지와 능력으로 나누고 마치 ‘진리’가 특정한 종교와 단체만의 ‘전유물’처럼 귀속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태어났다고 여기고 있는 이상, 항상 ‘무엇’이 되려고 노력했으며, 항상 ‘무엇’이 되어왔으며, 그것이 바로 ‘지금의 나’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장선에서 ‘지금의 나’가 ‘성불’하기를 원하고, ‘지금의 나’가 ‘천국’ 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러한 염원과는 상관없이 불현 듯 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지금의 나’의 정체성이며, 본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나’가 되기 위해서 더 사실적인 ‘나’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듯이, ‘지금의 나’를 포기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자기 자신을 바로 알면 되는 것입니다. ‘자각’하는 것입니다. 깨어나는 것입니다.  
    

질문308: 저는 종교생활을 오래 했으며 종교관으로 인해 ‘사후세계’를 믿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후세계’를 믿고 있다고들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그리고 사후세계를 믿고 있는 많은 사람들조차, 자기들이 믿고 있는 ‘사후세계’관이 다양합니다.     

엄밀히 따져보면 단순히 믿고 받아들이는 것도 비상식적이며, 단순히 믿지 않는 것도 비상식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알지 못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 믿는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믿지 않는다고도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사후세계’가 있다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서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없다면 없다는 것조차도 스스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단언컨대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는 있다는 것도 알 수 없으며, 없다는 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무의식이 그려내는 ‘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그로인해 태어났다고 여기고 있으며 죽을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죽을 것’이라는 믿음이, 영원을 지향하며 상상하고 추측하는 것이 ‘사후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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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산 2017/08/08 [12:16] 수정 | 삭제
  • 철학은 본질을 탐구하고 과학은 현상을 연구한다. 그래서 그들이 다른 길로 가고 있지만 계속 전진하면 결국 서로 만나야 한다. 왜냐하면 본질을 발견하면 현상을 이해하고 반대로 현상을 이해하면 본질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원리를 모르면 올바른 가치도 알 수 없으므로 과학이 결여된 철학은 진정한 철학이 아니다. 종교 때문에 세계 여러 곳에서 전쟁과 테러가 발생해서 문제가 많다.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종교가 합리적으로 변해야 하고 그러려면 과학과 철학이 협력해서 종교를 올바른 길로 안내해야 한다. 뉴턴, 아인슈타인, 호킹의 이론을 뒤집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면서 그 이론에 반론하면 5천만 원의 상금을 주겠다는 책(제목; 과학의 재발견)이 나왔는데 대한민국의 과학자들 중에서 아무도 반론하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중력과 전자기력을 하나로 융합한 통일장이론으로 우주의 기원과 생명의 본질을 명쾌하게 설명하면서 서양과학으로 동양철학(이기일원론과 연기론)을 증명하고 동양철학으로 서양과학을 완성했다. 이 책은 형식적으로는 과학을 논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인문교양서다. 이 책을 보면 독자의 관점과 지식은 물론 철학과 가치관도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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