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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회록(法會錄) 10

담선(談禪)공부 모임 | 기사입력 2017/08/14 [07:35]
‘자유’ ‘깨달음’이라는 것 모두 ‘자아’가 만들어 내는 ‘생각’

법회록(法會錄) 10

‘자유’ ‘깨달음’이라는 것 모두 ‘자아’가 만들어 내는 ‘생각’

담선(談禪)공부 모임 | 입력 : 2017/08/14 [07:35]


‘자유’ ‘깨달음’이라는 것 모두 ‘자아’가 만들어 내는 ‘생각’    

불가에서 자주 쓰는 ‘마음을 관조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들여다보고 관조하면서 보고자 하는 것이 도대체 뭘까요?    

마음 안의 상들은 시시때때로 바뀌며, 마음 안의 상태 또한 시시때때로 바뀌고 있어요. 그러면 마음을 관조하면서 도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알기 위해, 무엇을 깨우치기 위해서, 이러한 가르침과 가리킴이 마치 엄청난 노력과 절치부심의 마음을 독려하면서, 일종의 수행형태로 자리 잡았을까요?    

‘핵심’은, 마음을 관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며, 무작정 들여다보며 ‘무엇’이 알아지고, ‘생각’이 끊기며, 이런 것이 아니라, ‘나’는 마음을 넘어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라’는, 가르침과 가리킴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번뇌와 망상을 유발하는 ‘생로병사’, ‘희로애락’, ‘오욕칠정’ 등이 결국은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나’, 즉 내가 마음을 들여다볼 수가 있는 것은, 마음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서 어떤 번뇌와 망상이라 할지라도, ‘나’에게는 어떤 영향도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번뇌와 망상을 잘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은 단지 마음의 상이며, 시시때때로 변하는 상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과 상태를 만들어 내고 있는 ‘마음’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과 상태는 늘 변하기 때문에, 집착할 것도 없으며, 집착되지도 않으며, 해결하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면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은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하며, 이 당연한 것을 알기 위해서 가부좌를 틀고서, 몇 년 동안 마음을 관조해야 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소위 말해서 진정어린 ‘수행자’라면, 막연하게 고행을 한다든지, 누군가로부터 특별한 비법을 전수받아서 수행을 한다든지 하는 이런 것보다도, ‘연민’이 좀 있었으면 해요. 그런 연민하는 ‘마음’이면, 수백 년을 수행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할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지금은 ‘자아’의 측면에서 공부를 하고 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 공부를 가장 방해하는 것 또한 바로 ‘지금의 나’라는 것입니다. 수행자의 근기도 아니며, 카르마도 아니며, 오직 ‘지금의 나’ 그 자체가 가장 방해요소라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유아(有我)’를 넘어서 ‘무아(無我)’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어떻게 보면 수행의 가장 방해요소는, 아이러니 하게도 바로 ‘수행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자유’라는 것은 그 어디에도 귀속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나의 자유라는 것도 없으며, 나의 깨달음이라는 것도 없어요. 그것은 전부 ‘자아’가 만들어 내는 ‘생각’이라는 겁니다.    

자, 보세요. ‘진리’는 모든 것에서 보편적이잖아요. 엄밀히 따지면 허공으로부터 ‘지금의 나’인거지, ‘지금의 나’의 허공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나’라고 하는 그 관점에서 ‘나는 깨달아야 된다, 수행을 해서 능력을 쌓고 경지에 도달해야 된다.’는 것이 다 꿈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누가 합니까? ‘지금의 나’가 하고 있어요. 그러니 이 ‘지금의 나’라는 것은 진짜 수행의 가장 방해요소입니다. 그 방해요소 하나 제거해 보세요. 수행이 필요가 없죠.    

질문: 저의 지난 전생은 이집트에서 제사장이었으며, 중국으로 넘어와서 큰스님이 되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연고로 해서 이번 생에는 반드시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당신의 전생은 ‘누구이며’, 당신은 전생에서 ‘무엇’을 하였다는 식의 이야기를, 어떻게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어떻게 확인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불명확한 것을, 즉 전생은 이렇고 저렇고 누구이며 무엇이다 라는 것과, 사후세계는 이렇고 저러며, 이렇게 하면 저런 곳을 가고, 저렇게 하면 이런 곳을 간다는 식의 이야기는, 마치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것과 같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동일시로 인해서 ‘지금의 나’조차도, ‘나’로 여기는 것은 일종의 ‘최면’과 같습니다. 하물며 그러한데, ‘지금의 나’를 실체로 받아들이고, ‘지금의 나’의 측면에서, 전생과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최면 속에서 또 최면을 거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거듭 이야기하지만, 전생을 들여다 볼 수가 있다고 하는 ‘숙명통’의 정수라는 것은, 결국 모든 이와 모든 것이, ‘하나’이자, 그 하나가 전부인 ‘고요와 정적’으로 대변되어지는, ‘나’로 부터 비롯되어졌으며, 오직 ‘나’만이 ‘자기 자신’으로서 실체이자, ‘지금의 나’의 전생이며, 그리고 ‘나’는 전생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은, 이번 생에 태어난 ‘누구’라고 여기고 있는, ‘지금의 나’가 얻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라는 ‘꿈’을 멈추고, 잠에서 ‘나’가 깨어나는 것입니다.   

질문: 제가 보는 견지에서, ‘행복’만이 이 ‘삶’의 최고의 의미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을 좇아가는 ‘삶’이기 때문에 ‘꿈’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완전과 불만족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나 태생적 한계로 인한 ‘지금의 나’가 가지는, 이상향을 좇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해지려고 노력한다고 말은 하지만, 온 힘을 다해서 불행과 불만족으로부터 도망을 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도망을 친다는 것은, 불행과 불만족이 그만큼 실재적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며, 그렇게 노력을 하고도 더 행복해져야겠다고 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상향’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 수행을 통해서 ‘공덕’을 쌓으며, 여자로서 ‘깨달음’은 힘들다 할지라도 죽어서 보다 더 나은 곳을 갈수가 있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결국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며, ‘꿈’을 깨기 위해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인식되어지는 이 ‘삶’에 대한 정의는 ‘꿈’이며, 이 ‘삶’을 인식하고 있는 ‘지금의 나’ 또한 꿈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동일시로 인해서 ‘태어난 무엇’으로 정의되어지기 때문에, 죽어질 ‘무엇’으로 바라보게 되며, 그로 인해서 죽어서 또 다른, 즉 ‘사후세계’를 간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단언컨대, ‘지금의 나’는 죽어질 때까지 만입니다. 수행의 허구성을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꿈’을 깨기 위한 수행이라 볼 수가 있습니다. ‘수행’이 어떤 연유로 ‘공덕’이 되면, 그로 인해서 갈 수가 있는 ‘사후세계’가 달라질 수가 있는지 저도 궁금합니다.    

질문: 성자들 가르침의 공통점은 ‘꿈을 깨는 것’이라고 하지만, 접근하기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렵습니다.    

꿈을 깨라고 말을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꿈을 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꿈을 깨라고 말을 할 수가 있는 이유는, 이 꿈을 ‘자기 자신’이 꾸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펼쳐지고 있는 이 세상은, 누구든지 인식을 할 수가 있으며, 누구든지 주체의식을 가지고서 경험과 체험을 하면서 개별의식을 형성하고 있지만, 꿈을 깨고 나면 ‘나는 무엇이며, 누구이다’ 라고 여기던 ‘경험적 주체의식’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난 ‘나’는 더 사실적이면서도 그냥 ‘나’라는 겁니다. 마치 지난밤 꿈속에서 활동하던 ‘나’는, 꿈이 깨어지는 것과 동시에 사라졌지만, 지난밤 꿈을 이야기하고 증언하는 ‘나’는, 꿈속에서 사라진 ‘나’보다는 더 사실적이듯이 말이지요.    

더욱이 놀라운 것은, ‘지난밤 꿈’이 ‘나’의 무의식이 만들어 내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러니 비록 ‘지금의 나’라는 꿈을 꾸고 있지만, ‘지금의 나’가 개별적 주체의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은, 내가 즉 ‘나’가 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은 ‘나’의 뜻과 의지가, 내 마음먹기라는 ‘이치’에 따라서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지금은 각자의 개별적 꿈을 꾸고 있지만, 꿈이 깨어지고 나면 각자로서의 개별성이 사라지며, 스스로인 ‘나’가 깨어난다는 것이며, 이 점이 바로 ‘누구든지’의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없이 많은 모든 개별성은, 어떤 실체성도 가질 수가 없으며, 오직 ‘나’만이 일체로서 유일한 영적실체이며, ‘나’는 오직 ‘하나’입니다.    

질문: 나의 ‘깨달음’은 없다는 것입니까?    

‘자기 자신’을 바로 알게 되면, 단지 ‘나’로서 ‘깨어 있음’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잠을 자고 있지 않으며, 꿈을 꾸고 있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깨달음’은 귀속될 수가 없으며, 소유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은 ‘깨어 있음’으로, 바로 ‘나’를 가리키고 있으며, 더불어서 ‘나’는 나눔과 분리가 없는 ‘하나’이며, 그 ‘하나’가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질문: 살다가 죽으면 이승에서 저승으로 간다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지고 있는 ‘지금의 나’만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게 되면, 당연히 육체의 경계로 인해서, 자기는 육신 안에 어딘가에 머물다가 죽으면, 막연히 잘 알려지지도 않은 ‘저승’으로 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형적인 측면의 ‘나’가 있다는 것은 무형적인 측면의 ‘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형적인 측면의 ‘나’가 더 사실적이며, 경계가 없음으로 해서, 마치 이 허공이 경계가 없는 것처럼 더 사실적인 ‘나’는 어디를 오고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평생 어떤 연유로 인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육체의 어느 한 부분에 갇혀 있다가, 죽으면 육체로부터 벗어나서 또 다른 세상, 즉 사후세계를 간다는 이야기는 허무맹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질문: 성자들의 보편적 가르침이, ‘꿈’을 깨라는 것으로 저도 알고 있습니다. 조금 더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사실은 ‘꿈’을 깨야 한다는 이상의 가르침이 없습니다. 이 가르침이 모든 걸 다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미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개별적 주체의식으로서 꿈을 꾸고 있으며, 꿈을 꿀 수가 있는 것은, 개별적 주체의식이 실체가 아니라 단지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자아상(自我像)’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아상’은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지금의 나’로 여겨지고 있으며, ‘지금의 나’가 존재할 수가 있는 것은, 존재하게 하는 더 사실적인 ‘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나’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육체를 비롯해서 다양한 ‘조건’들이 필요하지만, 더 사실적인 ‘나’는 경계가 없음으로 해서 어떤 ‘조건’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꿈을 꾸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하지만, 깨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도 필요하지가 않습니다.    

질문: 깨어나기 위해 어떤 조건도 필요 없다고 하시니, 수행자로서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깨어나기 위해서는 고행도 필요하고, 수 십 년의 수행도 필요하며, 몇 생의 ‘덕’도 쌓아야 하며, 전승되어지는 계와 주문을 지키며 외워야 한다고 하지만, 저는 어느 한부분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마치 이 허공이 허공으로 있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을 충족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지금의 나’로서 꿈을 깨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라는 꿈을 깨는 것입니다.    

질문: 진경님, 그렇다면 육신과 동일시하여 ‘지금의 나’만을 ‘나’라고 여기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 스스로 잠을 자고 있으며, 즉 무의식상태에서 꿈을 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자, 보세요. 이 모든 것이 다 꿈이라고 설정을 해 보세요. 그러면 각자 ‘지금의 나’는, 그냥 꿈속의 ‘나’인 겁니다. 그리고 지금 즉각적으로 깨어났다고 보면, 꿈속의 ‘지금의 나’라는 것은, 내가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낸 관념적인 측면의 ‘그림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꿈을 내가 꾸었기 때문에, 세상의 근본 이치와 근본 원리가 ‘나’잖아요. 비록 깨어나지 못하고 계속 꿈을 꾸고 있는 무의식상태라 할지라도, 이 꿈을 내가, 즉 ‘나’가 꾸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겁니다. 비록 무의식상태에서 ‘의식작용’의 일환으로 ‘꿈’을 꾸고 있지만, 작용을 유발하는 본체로서 ‘나’는 불변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진리’는, 바로 ‘나’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지금의 나’의 범주를 벗어날 수가 없으며, ‘지금의 나’라는 꿈을 깨는 것은 어떤 조건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깨어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질문: 그러면 깨어난 ‘나’에게는, 무수히 많은 각자, 즉 ‘지금의 나’는 어떤 의미도 없는 겁니까?   

단지 무수히 많은 증거와 증언자로서의 의미는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각자’라는 의미는 없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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