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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에 정리해본 민족대표 33인 만해 한용운의 생애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7/08/15 [08:13]
"조국해방에 위대한 족적 남기시다"

광복절에 정리해본 민족대표 33인 만해 한용운의 생애

"조국해방에 위대한 족적 남기시다"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17/08/15 [08:13]

▲ 충남 홍성군 생가에 있는 만해의 동상    

조국해방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만해선사의 기개높은 지조와 드높은 민족정신이 광복절을 맞아 더욱 생각나게 한다.    

만해선사는 1879년 8월 29일 충남 결성군(지금의 홍성군)성곡리 박철동의 농가에서 누대의 사족 한응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온양 방(方)씨였다.     

선사의 고향 홍주목은 고려의 왕사 태고보우스님의 고향이란 인연으로 승격된 곳이다. 선사의 자는 정옥(貞玉)으로 호적에 기재된 이름이며 속명은 유천(裕天)이었다. 나중에 입산수도하여 득도할 때의 계명은 봉완(奉完)이었고, 법명은 용운 그리고 법호가 만해(卍海·萬海)였다. 그러나 1905년 1월 26일 백담사에서 득도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파계자로 참회불사를 회향한 다음 백담사서 재수계식    

이 사실로 한용운은 이미 1904년 여름 백담사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사가 연곡스님의로 부터 득도한 것은 1894년 5계와 사미계를 받고 법명 봉완(奉完)을 얻었으므로 일단 파계자로 참회불사를 회향한 다음 재수계식이 있었던 것 같다. 선사의 재 입산이 쉽게 허용된 것은 아마 이조 5백년 기간 불교계의 청규가 허물어진 산간불교의 한 단면이 아닐까 일단 승려가 산문에 나가면 비인격의 대상이 되는 승가의 규율에 비추어 성장에 대해서는 스스로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기에 그의 청년시절 더 나아가 승려가 된 특별한 계기에 대해서는 확답을 줄 수 없다. 다만 선사가 그의 아내 해산받이 미역을 사러 장에 가 그길로 입산했다는 설이 유명하다.   
▲ 만해는 1894년 파계자로서 참회불사를 회향하고 백담사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백담사에 있는 만해 동상.  
  
백담사에서 연곡스님에게 득도하고 영제스님께 수계를 받는다. 학암스님에게 『기신론』『능엄경』『원각경』을 수료하여 그해 4월 15일 강원도 고성군 건봉사에서 최초의 선(禪)수업인 수선안거를 성취한다. 이듬해 봄 유점사 월하스님에게『화엄경』을 수학한다. 진하스님께 선학을 수업하며 겸허와 사양의 덕을 쌓는 수업 을 한 선사는 내전에 어느정도 수양을 쌓는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이곳이 작다는 생각에 미친 선사는 새 문화와 새 문물을 시찰하기 위해 도일을 결행한다. 1909년 4월 현해탄을 건너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여 동경으로 간다. 조동종 대학을 일본의 고승 홍진설삼의 도움으로 입학하여 한 푼의 학비도 없이 코마자와 대학에 다니며 일어를 배우고 불교와 서양철학까지 청강할 수 있었다.    

선사는 귀국 후 그가 일본에서 익힌 측량기술을 통해 당시 일제에 의해 개인 및 사찰소유의 토지를 수호하려는 마음으로 경성명진측량강습소를 개설하고 소장에 취임한다.    

이와는 대조적인 인물로는 개화승 이동인을 들 수 있다. 그는 김옥균의 친분을 이용하여 1879년 8월 도일하여 교토에서 그 곳 본원사에 머물면서 일본어를 배운다. 1880년 봄 거처를 도쿄 아사꾸사 별원으로 옮겨 주지 스즈끼의 각별한 도움으로 당시 일본의 명사와 접촉하여 지낸다. 1880년 9월 본원사에서는 이동인에게 쌀 2백가마 값 1천엔을 주어 보낸다. 이 돈으로 이동인은 램프·석유·잡화 등을 구입하여 왕실 세도가와 친지들에게 선물한다. 이것이 서울에 일제상품이 들어온 최초이다.    

10월에 재차 출국한 이동인은 아사노 도진(淺野東仁)으로 창씨 개명한다. 그의 활약은 김옥균, 박영효와 주도한 갑신정변의 3일천하와 함께 사라진다. 아사노 도진은 역사의 뒤안길이 아닌 이용가치의 퇴락으로 말이다. 이렇듯 우리들의 역사기록에 잘못된 오류를 주는 이조의 정치현실속에 지조를 지켰던 선사는 3·1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한다. 당시 사회지도급인사 월남 이상재는 최린과 찾아간 선사에게 "독립선언을 하지말고 일본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무저항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유리하오"라는 반대의견을 전하며 "동지들의 뜻에 찬동하오. 그러나 나로선 있는 힘을 다해 후원하겠소"라는 말을 전한다. 이런 만남으로 선사는 1927년 월남 이상재의 사회장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 장의위원회 명단에서 삭제한다. 펜촉이 부러지게 힘껏 말이다.    

"이 일에 나서지 않는다면 편치 못할 줄 각오하오"    

33인 서명자 이름 제일 앞에 서있는 의암 손병희 역시 월남의 불참가에 미진한 대답을 한다. 최린, 만해 선사의 "이 일에 나서지 않는다면 편치 못할 줄 각오하오"라는 기세에 한풀 꺾인 의암, 그러나 그의 승낙과 그의 작은 애종심은 우리가 3·1 운동을 말할 때 당당한 그들의(천도교인)모습을 보게 된다. 3·1 운동의 근원지 파고다공원에서 오늘도 의암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 만해는 말년에 성북동에 집터를 기증 받아 심우장을 짓고 않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해방직전 열반한다.    

만해선사는 말년에 벽산스님의 집터를 기증받고 방응모 박광 등 몇 분의 성금으로 성북동에 심우장을 짓는다. 이 곳에서 선사는 많은 이들을 만난다. 홍명희, 이극노, 최린, 최남선, 김법림, 최범술, 김관호, 조정현 등 곱지 않은 사람의 내방을 사절하며 자신의 세속적인 집을 한적한 산골(당시는 숲이 울창한 산속이었지만)선방으로 만든다. 이런 고적한 선실에 가끔은 아주 불청객이 찾아든다.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당시 조선인들의 꾸준한 내방도 선사의 기개와 지조를 누구러뜨리지는 못하고 있다.    

그 중 학병모집 강연회 연사로 초청하는 일을 맡은 총독부 사회교육과장 김모 (창씨명 金大羽)는 선사의 꾸지람에 감명을 받았는지 그 후 많은 불교계 일을 돕는다. 총독부의 31 교구본사제도 계획을 불교계에 알려주는 일부터 시작하여 이등박문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박문사(현 신라호텔 자리)에 버금가는 한국불교 총본산 건립 제의 등 그런 그도 어느 계기인지 가톨릭으로 전교한다. 다만 선사의 영향으로 1943년 전북도지사 1945년 경북 도지사 등을 거친 행정가로 해방조국에서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김씨는 그의 집에 칩거하며 조용히 여생을 보낸다.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묻어둔 채 앞 다투어 해방 조국에 나서고 교단에서는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말이다.    

이렇듯 내외에 선망을 받던 선사는 1944년 6월 29일 그렇듯 열망하던 일본의 패전을 목전에 두고 신경통으로 앓아 눕게 된다. 그리고 아내 가족, 친우, 조국을 남겨 놓은 채 열반에 든다. 선사의 죽음조차 두려워했던 일제는 내방객마저 통제를 한다. 그러나 오세창, 이인, 김병노, 민영식, 여운형, 홍명희, 이병우, 박윤진, 방응모 장도환, 김관호, 현석년, 김혁, 김진우, 허영호, 김영택 그리고 그의 유일한 상좌 춘성스님이 참석한다. 『불교』잡지를 창간하였고 원효 이후 대학자라 불리는 퇴경 권상노씨는 친일파로 전락하여 먼발치에 머물고 있다. 

선사는 당신의 지조높은 삶을 흠모하는 남은 이들에 의해 미아리 조선인 화장터에서 다비식이 거행되었다. 끝까지 타지 않은 치아 사리를 남긴 채 말이다. 이렇듯 위대한 족적을 남긴 선사의 생애를 놓고 근자에는 “당시 일제의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인 중 극도의 반일감정이 있는 이를 자신의 행동 그 자체로 살게하며 대외선전용으로 이용했다”며 조직기반도, 경제적 후원도 없는 만해 선사가 제격이었다는 평가의 말도 나온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해인사 산중장로회에서는 선사를 해인사에 영구주석하게 하는 결의를 했다. 이 결의가 경찰에 알려지고 해인사 사중관계자들이 경찰에 불려가서는 곤욕을 치른다. 결국 장로회의 결의는 무산이 되었다. 중앙학림 학생들이 주축이 된 만당이라는 비밀결사단 총재이기도 한 선사는 조직, 후원의 열세가 아니라 당찬 모습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중노릇은 나나 만공한테 배우지 말고 계행납자한테 가서 배우라”    

선사의 생애 그 가운데 두 번의 결혼을 통해 모두 자식을 가진다. 이 모두가 초탈한 이의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 또 어느 한 곳 막힘 없이 써내려 가는 글줄기가 후학들의 사표가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선사의 결혼이 곧 대승불교 의 보살도 실천인냥 생각하는 이들도 보인다. 그러나 선사는 이 문제에 관한 확답을 준다.     

이 땅에 선풍을 드높인 춘성, 욕쟁이 춘성스님께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내 중노릇은 세인들이 대승이니 뭐니 보살이니 라한이니 말하고 있으나 중노릇이라고 할 수 없다. 되돌아보건대 증상만(주: 성도를 얻지 못하고서 이미 얻었다고 잘난채 하는 만심)으로 가득찬 업로였다. 부디 임자나 중노릇 잘해라. 중노릇은 나나 만공한테 배우지 말고 깊은 산 무명화, 심산의 이름 없는 계행납자한테 가서 배우도록 해라. 부디 중노릇 잘해라”고 선사가 그의 유일한 상좌에게 간절히 충고하는 말이다. (삼국유사문화원장·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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