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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세계불교36●캄보디아 불교(3)

이치란 객원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7/08/16 [07:13]
캄보디아 불교를 해외에서 지킨 마하 고사난다 상가라자

현대세계불교36●캄보디아 불교(3)

캄보디아 불교를 해외에서 지킨 마하 고사난다 상가라자

이치란 객원논설위원 | 입력 : 2017/08/16 [07:13]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정치적 망명가가 있는가하면 종교적 망명성직자도 있기 마련이다. 불교로 말하면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가 대표적이라고 하겠다. 달라이 라마는 너무나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세계불교계에는 달라이 라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캄보디아 현대사에서도 우리는 일종의 망명승려인 마하 고사난다 비구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전회에서도 언급했지만, 캄보디아 승가는 현재 마하니카이파(대중파)와 탐마윳파(보수 전통)가 공존하면서 캄보디아 승가를 구성하고 있는데 이것은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이 캄보디아로 귀국해서 국왕에 취임하면서 전통적인 두 개 파의 승가를 구성하도록 한 것이다. 크메르 루주 기간 캄보디아 불교 승가는 엉망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기간 캄보디아 승가를 지켜 낸 분은 마하 고사난다 비구 큰 스님이시다. 마하 고사난다(Maha Ghosananda) 상가라자(종정) 비구 큰 스님은 크메르 루주 기간과 공산주의 정부 후 과도기간에 해외에서 캄보디아 승가의 상가라자(종정)로서 캄보디아 불교를 이끌었던 분이다. 특히 마하 고사난다 종정 큰 스님은 해외에서 매년 캄보디아 평화행진을 진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 마하고사난다 큰스님(1929〜2007).   
    
마하 고사난다는 메콩 강 삼각주 평원에서 농부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절에 가서 템플 보이로 비구들의 잔심부름을 했는데, 눈여겨 본 비구들이 승가에 입문하는 것을 권유하여 14세 때, 사미계를 받고 사원 학교에서 중.고등 과정을 마치고 프놈펜과 바탕방 사원대학들에서 대학과정을 마치고 인도 나바(新) 날란다 대학에서 빨리어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학승이다. 그는 인도에서 일본산 묘법사 창종주 후지 스님에게도 대승불교를 사사받았고, 캄보디아 전 상가라자였던 추언 낱(Chuon Nath 1883–1969) 대장로 큰 스님에게서 불교뿐 아니라 캄보디아의 정체성을 배웠다. 추언 낱 종정은 크메르어를 보존하신 분이다.    

추언 낱 종정 스님은 프랑스 식민지하에서 크메르(캄보디아) 정신을 지킨 분이다. 민족불교와 크메르 언어를 보존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던 분으로서, 빨리어와 산스크리트어에서 많은 단어를 가져 오는데 심혈을 기울이신 분이다. 마하 고사난다 스님은 이런 분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으신 것이다. 마하 고사난다는 1965년 태국 남부 태국 삼림명상전통 사원에서 아잔 담마다로 대선사 문하에서 명상수행을 했는데, 그 무렵 캄보디아는 베트남 전쟁 후, 내란에 휩싸였고 사회체제가 붕괴됐다. 1978년 삼림명상사원에서 타이-캄보디아 국경 난민 캠프로 가서 그들을 도왔다. 수년간 비구의 모습을 보지 못했던 캄보디아 난민들은 환영했고, 그는 이들에게 불교를 가르쳤다. 킬링필드에서 가족을 잃은 많은 난민들은 마하 고사난다 비구 큰 스님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했다.     

마하 고사난다 큰 스님은 포스트 공산 캄보디아시기에 매우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었는데, 그는 캄보디아 국가 재건과 캄보디아 불교 소생에 크게 기여하신 분으로, 1980년 유엔(UN) 망명 캄보디아 대표가 되었다. 1979년 폴 포트 정권이 무너졌을 때, 오직 3천명의 비구만 살아있을 정도였는데, 3년 전인 1976년 6만 명의 비구가 3천명으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마하 고사난다는 타이-캄보디아 국경에 절을 세우고, 타이 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계를 주어 캄보디아 비구를 양성했다.  
▲ 타이-캄보디아 국경에서 난민 고아들을 돌본 피터 L. 폰드 목사.  

1980년 마하 고사난다는 타이-캄보디아 국경 난민 고아들을 돌본 미국출신 피터 로렌스 폰드(Peter L. Pond)목사(1933-2000)와 함께 캄보디아 평화를 위한 종교간 미션 기구를 만들었고, 전 세계에 살아남아 있는 수백 명의 비구와 비구니들을 규합했다. 태국 군부는 수천 명의 난민들을 캄보디아로 강제 송환하려는 데에 대한 항의데모를 주도했다. 1988년 마하 고사난다는 프랑스 파리에서 캄보디아 승가 상가라자(종정)로 선출되었고, 캄보디아 승가가 정식으로 구성될 때 까지 임시로 지위를 맡는다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이 무렵 캄보디아에서는 텝 봉 비구스님이 베트남 배경에 의한 캄푸치아 민주공화국에 의해서 1981년 캄보디아 연합승가 명의상의 수장으로 임명되어 있었다. 1992년 마하 고사난다 종정스님은 캄보디아 정신과 재건을 위한 담마이에트라(Dhammayietra) 평화행진을 시작했다. 16일간 125마일을 평화-생명을 위한 행진을 벌였는데, 마하 고사난다는 연례행사로 몇 차례 계속했다. 그는 ‘캄보디아의 간디’로 불렸다. 1995년, 1996년과 1997년 3년 연속 캄보디아에 평화를 가져온 공로로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오르기도 했다. 그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캄보디아 사원을 건립했고, 활동하다가 2007년 노샘프턴에서 입적하셨다.    

캄보디아의 근현대사는 질곡 그 자체였다. 캄보디아는 외세에 의한 강압으로 1863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됐다. 크메르(캄보디아)는 한동안 암흑시대가 연출됐는데, 프랑스 보호국으로 전락할 무렵 크메르의 왕실수도는 우동(Oudong)에 있었다. 지금의 수도인 프놈펜에서 북서쪽으로 40km 지점에 위치한 프놈 우동산이다. 이곳에는 대규모 왕실 공동묘지들이 있기도 하다. 우동은 산스크리트어에서 파생된 ‘최대의’란 의미를 갖고 있다. 노로돔(1834-1904)은 캄보디아의 국왕(재위 1860-1904)으로서 전 왕(王) 앙 동의 아들로, 재위 4년째인 1864년부터 캄보디아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그는 왕위를 보장받는 대신 실권이 없는 군주로 전락하였다. 프랑스 속국이 되기 전 크메르는 시암(태국)의 제후국과 같은 위치였다. 캄보디아 왕실은 시암과 베트남으로 갈라졌고, 노로돔은 시암으로 보내져서 교육을 받았다. 사실상 인질이었다. 
▲ 태국 방콕 왕궁에서 노로돔 왕(1834-1904).  
 
시암이 캄보디아를 어느 정도 장악하고 있었기에 노로돔은 왓 포 사원에서 캄보디아 국왕으로 즉위식을 갖고 캄보디아로 향했다. 노로돔이 즉위하기까지에는 우여곡절이 많았고, 결국 방콕에서 즉위했으나 프랑스 속국으로 전락하여 명목상의 왕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1867년 시암은 프랑스와 조약을 맺고 캄보디아를 넘겨주는 대신 바탐방과 시엠립을 차지했으나 1906년 프랑스와 태국 국경 조약에 의해서 다시 캄보디아로 양도되었다. 노로돔 역시 캄보디아로 가기 전, 프랑스와 비밀 조약을 맺어서 프랑스 보호령이 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그는 국왕에 즉위하기 전 태국의 보수파인 탐마유티카 니까야파에서 비구계를 받고 비구생활을 했었는데, 당시 태국 제 4대 국왕인 몽꿋 왕(1804-1868, 재위 1851-1868)이 비구로 25년간 있을 때였다. 따라서 당시 시암 몽꿋 왕은 종교적 스승이었다. 이런 인연이 있었는데, 시암과 프랑스는 바탐방과 시엠립과 앙코르 왓(사원)을 태국에 양도한다는 조약을 맺은 것을 듣고 노로돔은 분노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으로 캄보디아는 1867년부터 1953년까지 프랑스 보호령이 되었다. 프랑스는 왜 인도차이나를 식민지화했는가.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3세가 1851년 쿠데타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프랑스가 “동아시아에 세력을 확장하지 않는다면 2류 국가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의 베트남 진출은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목적이었고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는 영국과 연합하여 제2차 아편 전쟁(1858-60년)을 치르는 한편, 인도차이나에 프랑스 식민지를 구축하기 위한 단계들을 밟아 나갔다. 1857년 스페인의 호세 마리아 디아스 신부가 살해되자, 그는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에 대한 베트남의 박해에 응징하고 베트남 조정에 프랑스군의 베트남 주둔을 강요하고자 1858년 전쟁의 개시를 승인하였다. 이로써 베트남과 프랑스는 전쟁에 돌입하였다. 차차로 인도차이나 반도는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고, 캄보디아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노로돔 왕이 죽자, 프랑스는 명목상의 왕이지만, 누군가를 옹립해야했는데, 노로돔의 형제인 시소와스 모니봉(1875-1941)을 선택했는데, 그는 황태자 시절 프랑스군 소령을 역임하였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는 일본 치하에 있었지만, 프랑스는 시소와스 모니봉의 아들 대신, 시소와스 모니봉의 딸인 시소와스 코사막(1904-1975)과 노로돔 수라마리트(1896-1960) 사이에서 태어난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1922–2012)를 선택했는데, 1941년부터 1955년까지 왕을 역임했다. 1955년부터는 노로돔 시아누크 왕을 강제 퇴위시키고, 노로돔 시아누쿠의 아버지인 노로돔 수라마리트가 1960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하지만 시아누크는 캄보디아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1953년부터 1970년까지 론 놀 국회가 그를 폐위할 때 까지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그 후 정치적 부침을 거듭하면서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13년의 추방 생활 끝에 1991년 캄보디아로 돌아와서 1993년 왕위에 올라서 2005년까지 왕위에 있다가 2012년에 서거하였다. 왕위는 2004년 그의 아들 노로돔 시하모니(1953-)에게 양위되었다. 노로돔 시하모니 국왕은 1978년 폴 포트 정권 붕괴 직전 아버지 시아누크와 탈출, 프랑스에서 20년간 발레를 가르치면서 생활하다가 1993년 캄보디아 파리 유네스코 대사를 역임했고, 2004년 새 국왕에 즉위했다. 
▲ 1956년 베이징에서의 모임. 좌로부터 마오쩌둥, 펑전, 시하누크, 류사오치.    

노로돔 시하모니 국왕은 현재 독신이며 독실한 불교신자이다. 노로돔 시하모니 국왕은 시아누크 전 국왕과 두 번째 부인인 노로돔 모니끄 시아누크(1936-) 왕후 사이에서 태어났고, 현재 캄보디아 국왕으로 재위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근현대사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역사 그 자체이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테라와다(상좌부) 불교전통을 그대로 유지한 것은 크메르의 근현대 고승들의 불교에 대한 신념과 민족정체성 그리고 왕실의 후원에 힘입어서이다. 전회에서 소개했던 캄보디아의 20세기 중반의 현대 고승들인 추언 낱(Chuon Nath 1883–1969), 르비 엠(Lvi Em(1879-1957), 후옷 낱(Huot That 1891-1975?), 옴 솜(Oum Som1852–1932)과 같은 비구장로 큰 스님들 때문이었다.    

프랑스 식민지 시기(1863-1954) 아래서, 캄보디아 불교는 사원 속에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프랑스 식민지 정부는 크메르인들의 고등교육에 대해서는 최소화 시켰다. 많은 크메르인들은 고등교육을 받으려 했지만, 캄보디아에서는 어려웠다, 그래서 고등교육을 받으려면 베트남으로 가야했다. 캄보디아에서의 고등교육이란 그들의 통역을 위한 교육이었다. 캄보디아 비구들은 프랑스 식민지 관료들에게는 식민정부의 적이나 다름없었다.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이 크메르의 문학과 문화를 바꾸려하자, 크메르 비구들은 그들의 사원에서 이를 지키고 유지하려고 고투했다. 사원은 크메르인들에게 고등교육의 기초를 제공하는 센터 역할을 했다. 이런 역할을 한 분들이 추언 낱(Chuon Nath 1883–1969), 르비 엠(Lvi Em(1879-1957), 후옷 낱(Huot That 1891-1975?), 옴 솜(Oum Som1852–1932)같은 비구장로 큰 스님들이었다.
보검 이치란 박사(해동세계불교연구원 원장· www.haedongacadem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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