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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 天問天答 142

담선(談禪)공부 모임 | 기사입력 2017/08/17 [08:00]
‘죽음’은 ‘꿈’ 속에서 펼쳐지는 ‘의식의 단절’

통찰! 天問天答 142

‘죽음’은 ‘꿈’ 속에서 펼쳐지는 ‘의식의 단절’

담선(談禪)공부 모임 | 입력 : 2017/08/17 [08:00]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理解)를 통해 무지(無知)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은,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고난과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비정상적 한계를 실감 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依支)하고 의존(依存)하며,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와 종교가 발전을 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와 갈등으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와 철학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一部)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와 함께 많은 분들이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밝혀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지성(知性) 인류의 이야기가 될 것이며, 자산(資産)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의존하고 따르든지, 어떠한 ‘삶’을 살아가든지, 그러기 이전(以前)에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먼저 알고 깨우치는 것이 상식(常識)중의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상식적 ‘깨달음’과 인간정신과 더불어서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가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談禪모임 眞鏡>  
 
‘죽음’은 ‘꿈’속에서 펼쳐지는 ‘의식의 단절’    

질문311: 그 누구도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 한 ‘상실’을 겪을 수 없으며, 고통을 겪을 수 없으며, ‘자기’의 허락 없이는 죽을 수 없다고 합니다.     

‘상실’을 겪을 수 있는 것도, 고통을 겪을 수 있는 것도, ‘꿈’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선택’한다고 하지만, 어느 누구도 고통과 상실을 알고서는 ‘선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며, 꿈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고, 상실될 것을 알고서 누가 꾸겠습니까?    

그리고 ‘자기 자신’의 허락이 있다고 할지라도 죽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실재하는 현상이 아니라 ‘꿈’속에서 펼쳐지는 ‘의식의 단절’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질문: ‘사랑’과 완벽한 거룩함이 깃든 ‘마음’에는 두려움과 질병이 들어올 수 없다고 합니다.    

흔히 성직자나 수행자들이 통념적으로 말하는 ‘사랑’과 완벽한 거룩함이 깃든 ‘마음’에는 두려움과 질병이 들어올 수 없다고 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완벽한 거룩함이 깃든 ‘마음’은 어떤 편견도 어떤 조건도 상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 세상이 ‘진리’의 세계이지만, 어떤 편견도 어떤 조건도 상정하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드러날 수가 있으며, 무엇이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마음’은 모든 상태와 모든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사랑’과 완벽한 거룩함이라는 것은 결국 ‘자유’와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리키고 있지 않겠어요?    

따라서 질병이 없다고 하여 ‘사랑’과 거룩함이 깃든 ‘마음’이라는 정의는 종교적인 측면에서만 국한되는 이야기에 불과하며, 무엇이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자체로 ‘마음’은 이미 ‘사랑’과 거룩함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질문: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어떤 상태라 할지라도 ‘마음’안에 비춰질 수가 있는 이유는, ‘마음’ 그 자체에 어떠한 상태조차도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사실’을 망각하고서, 단지 ‘마음’안에 비추어지고 있는 ‘상태’와 동일시하여 자기 정의화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나’이며,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는 고통도 두려움도 ‘속박’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사랑’과 거룩함이 깃들면 그러한 ‘속박’으로 ‘해방’될 것이라는 비전 제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해방은 모든 상태와 상태의 동일시로 인한 자기정의가 ‘허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상태라 할지라도 반드시 사라지며, 어떤 상태라 할지라도 비추어져 드러나려면 ‘마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음’은 모든 상태의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질문312: ‘자아’가 ‘진리’를 목격할 수 없다고 하시니 더 많은 ‘의문’으로 사로잡혔습니다.    

의문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지성’적인 측면에서 유일한 특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의문’을 할 수 없다면 ‘자유’를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며, ‘자각’할 수조차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불현 듯 ‘깨어남’과 동시에 의문이 시작되며, 이 ‘의문’이 우주를 이루고 있는 ‘생명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요와 정적으로 대변될 수 있는, 모든 것이 ‘시작’되기 이전에 불현 듯 ‘자각’이 일어나며, 즉 깨어나며 ‘나’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일어나며, 그 의문으로 인해서 ‘시작’이 시작으로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와 ‘나’사이의 ‘의문’은 무엇이라 할지라도 탐구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진리’는 절대적 주체로서 분리되어질 수 없으며, 그로인해서 대상화되어지지 않으며, 그로인해서 목격되어질 수 없습니다.    

질문: 티벳의 한 승려는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긴장’을 푸는 것이며, 완전히 긴장이 풀리면 ‘생각’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로인해서 ‘자아’가 해체된다고 합니다.    

그림자가 해체되어야 ‘태양’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태양이 빛을 비추고 있다는 강력한 ‘반증’입니다. 그와 같이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드러나게 하고 있는 ‘진리’의 강력한 ‘반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나’, 즉 ‘자아’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더 사실적인 ‘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있다는 것은 생각을 만들고 있는 ‘나’가 있다는 강력한 ‘반증’입니다.    

따라서 ‘생각’이 사라져야 ‘깨달음’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는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자각’하지 않고서 하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질문: 그렇다할지라도 ‘불필요한 생각이 없는 상태’가 ‘깨달음’에 최적이라 생각합니다.    

밤에 깊은 잠을 자면 모든 생각들이 사라집니다. 사라진다고 하기 보다는 생각의 ‘주인’이 잠을 자면서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필요한 생각이 없는 상태’가 ‘깨달음’에 최적이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깨달음’이 어떤 상태로 인해서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실체 없는 생각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면 어떻게 불멸의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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