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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 天問天答 143

담선(談禪)공부 모임 | 기사입력 2017/08/21 [07:17]
‘자기 자신’을 스승으로 삼고 제자가 되라

통찰! 天問天答 143

‘자기 자신’을 스승으로 삼고 제자가 되라

담선(談禪)공부 모임 | 입력 : 2017/08/21 [07:17]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理解)를 통해 무지(無知)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은,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고난과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비정상적 한계를 실감 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依支)하고 의존(依存)하며,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와 종교가 발전을 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와 갈등으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와 철학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一部)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와 함께 많은 분들이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밝혀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지성(知性) 인류의 이야기가 될 것이며, 자산(資産)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의존하고 따르든지, 어떠한 ‘삶’을 살아가든지, 그러기 이전(以前)에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먼저 알고 깨우치는 것이 상식(常識)중의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상식적 ‘깨달음’과 인간정신과 더불어서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가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談禪모임 眞鏡> 

‘자기 자신’을 스승으로 삼고 ‘자기 자신’이 제자가 되라    

질문313: 진경님의 ‘삶’과 수행여정을 알고 싶습니다. 도움 될 만한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해 주세요.    

진경이라는 ‘한 사람’으로서의 ‘삶’과 수행여정은 도움 될 만한 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살아온 방식, 제가 걸었던 길, 제가 행했던 모든 수행방식조차 방해요소였으며, 이러한 모든 것들이 ‘꿈’이라고 하는 의식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어질 때 어렴풋이 알았으며, 깨어지고 나서야 퍼뜩 알아차렸습니다.    

속박은 ‘꿈’속에 등장하는 ‘지금의 나’가 인식하는 한계에 불과했으며, 그로인한 ‘해탈’조차 ‘지금의 나’가 ‘꿈’속에서 꾸고 있는 또 다른 ‘꿈’에 불과하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하는 ‘말’조차도 따르지 말고, 가리키고 있는 곳을 보는 것만이 최선입니다.    

질문: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단언컨대 ‘가르침’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가르침이 통용되는 것은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목적의 ‘주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모든 수행자들이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 즉 ‘존재’하는 측면에서 태생적 한계를 ‘속박’으로 인식을 하고, 그로 인해 ‘지금의 나’가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는 ‘깨달음’과 ‘해탈’이 영적으로 포장된 거창한 ‘목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스승’을 찾고, ‘가르침’을 구하며, ‘길’을 찾고 ‘방향’을 찾으며, 방법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꿈속의 ‘나’가 있다는 것은, ‘지금의 나’가 있다는 것은, 즉 ‘존재하는 나’가 있다는 것은, 존재하게 하게 하면서 꿈을 꾸는 더 사실적인 ‘나’가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스승으로 삼고 ‘자기 자신’이 제자가 되세요. 왜냐하면 ‘깨어남’은 ‘스스로’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각’만이 최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질문314: 저는 과거에 사고로 인해 육체적으로 장애가 있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제시하는 몇몇 수행법은 육체의 장애로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깨달음’, 깨어나기 위해서 육체적으로 육체를 이용하여 무언가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자기 자신’만을 알기를 열망하면서 관심을 놓지 마세요.     

그러면 지금 꾸고 있는 꿈이 깨어질 것이며, 무의식적으로 자고 있는 잠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꿈이 계속 꾸어지고 있는 것은 결국 ‘흥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육체적 장애는 수행의 방해요소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체가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즉 동일시로 비추어지고 있는 ‘지금의 나’가, ‘지금의 나’로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즉 내가 깨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육체의 어떠한 상태도 방해요소가 될 수 없으며, 온전한 제정신을 두고서 무의식적으로 꾸어지는 꿈속의 배역으로서, 동일시로 인한 ‘지금의 나’만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며 살아간다고 믿고 있는 것은 ‘정신적 장애’라 할 수 있습니다.    

질문: 내가 깨어난다는 것은 ‘지금의 나’의 측면에서 어떤 효용성이 있습니까?    

내가 깨어난다는 것은, 비동일시, 즉 ‘지금의 나’는 단지 ‘나’의 무의식이 그려내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어난다는 것은 ‘지금의 나’에게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서 일어나는 ‘정신 차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나’의 측면에서는 어떤 효용가치도 없으며, ‘지금의 나’의 측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란 겨우 ‘의식적인 죽음’이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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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화 2017/08/21 [12:38] 수정 | 삭제
  • ‘존재하는 나’가 있다는 것은, 존재하게 하면서 꿈을 꾸는 더 사실적인 ‘나’가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타당한 말씀입니다. 그런데....존재하게 하게 하면서...... -하게-가 중복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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