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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 天問天答 145

담선(談禪)공부 모임 | 기사입력 2017/08/28 [06:53]
‘의식적인 죽음’만이 ‘삶’ 이해의 ‘첫걸음’

통찰! 天問天答 145

‘의식적인 죽음’만이 ‘삶’ 이해의 ‘첫걸음’

담선(談禪)공부 모임 | 입력 : 2017/08/28 [06:53]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理解)를 통해 무지(無知)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은,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고난과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비정상적 한계를 실감 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依支)하고 의존(依存)하며,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와 종교가 발전을 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와 갈등으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와 철학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一部)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와 함께 많은 분들이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밝혀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지성(知性) 인류의 이야기가 될 것이며, 자산(資産)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의존하고 따르든지, 어떠한 ‘삶’을 살아가든지, 그러기 이전(以前)에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먼저 알고 깨우치는 것이 상식(常識)중의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상식적 ‘깨달음’과 인간정신과 더불어서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가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談禪모임 眞鏡>  

‘의식적인 죽음’만이 ‘삶’ 이해의 ‘첫걸음’    

질문317: ‘죽음’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삶’에 대한 이해는 미완성이라 하셨습니다.    

시작과 끝을 한마디로 보듯이, 태어남과 죽음을 하나로 보는 것이 ‘삶’에 대한 타당한 접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은 불가항력이라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로인해서 살아 있는 동안에 조금 더 많이, 조금 더 행복하게, 조금 더 오래 살게 되기만을 바라며, 그런 것들이 이루어져 가는 측면에서만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과 ‘삶’과 ‘진리’와의 복합적 상관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단언컨대 태어나 죽을 때까지 이룬 모든 것들이 ‘꿈’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함으로 인해, 태어나 죽을 때까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오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 ‘지금의 나’는 어떤 실체성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삶’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성공’을 이룬 한 사람의 삶이, ‘삶’에 대한 이해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성공과 좋았던 경험은 ‘집착’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집착은 ‘두려움’으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삶’과 ‘진리’와 ‘자기 자신’에 대한 복합적 상관관계에 대한 ‘이해’는, ‘나는 무엇이며 누구이다’는, 즉 육체와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지고 있는 ‘지금의 나’의 측면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과 함께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과 ‘사랑’만이, ‘자기 자신’과 ‘삶’과 ‘진리’와의 복합적 상관관계를 밝혀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고 여기고 있는, 동일시로 인한 ‘지금의 나’의 ‘의식적인 죽음’만이 ‘삶’에 대한 이해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질문318: ‘깨달음’의 단계에서, 먼저 ‘자기 자신’의 본질을 ‘아는 것’이며, 그리고 세상의 이치를 ‘아는 것’으로 단계를 넘어가야 참다운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불현 듯 꿈이 깨어지고 잠에서 깨어날 때, 어떤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으며, 어떤 단계를 넘어야 하는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꿈이 깨어질 때 경험적 주체이자 인식의 주체 또한 꿈과 함께 깨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깨어나서야, 지난 밤 꿈속에서 일어난 모든 일과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과 모든 것이 ‘나’의 무의식이 비추어낸 ‘의식작용’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는 것’은, 그 자체로 ‘깨달음’이라고 볼 수 없으며 단지 그냥 깨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울에 비춰볼 때, 비춰진 ‘나’의 모습은 내가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상태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교하게 비춰준다고 할지라도 엄밀히 따져보면 ‘반영’에 불과합니다. 그와 같이 ‘세상의 이치’라는 것은 결국 내 마음을 통해 투사되어지는 ‘나의 이치’에 불과하며, ‘세상’은 ‘나’의 반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깨어 남’, 즉 ‘깨달음’은 ‘나’의 성품이며, ‘아는 것’은 단지 성품으로 인한 부가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질문: ‘깨달음’과 ‘아는 것’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세상은 ‘나’의 반영에 불과하며, 세상의 이치는 ‘나’의 이치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니 ‘아는 것’은 ‘깨어 있음ㅡ깨달음’의 반영에 불과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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