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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세계불교●39 캄보디아 불교(6)

이치란 객원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7/09/08 [08:02]
앙코르의 미소

현대세계불교●39 캄보디아 불교(6)

앙코르의 미소

이치란 객원논설위원 | 입력 : 2017/09/08 [08:02]
 
▲ 시엠 립에서는 관광객을 위한 ‘앙코르의 미소’가 공연되고 있다.    

앙코르 왓을 가기 위해선 시엠 립으로 가야 한다. 대개 태국에서 들어가는 것이 정상적인 코스다. 전회에서 이미 앙코르 왓에 대해서는 대강 소개했지만, 10여년 만에 다시 찾은 시엠 립은 새롭게 변모하고 있었고, 관광방문객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10여 년 전과는 전연 다른 시가지의 모습을 하고 상당하게 발전을 이룩한 상태였다. 캄보디아 불교는 그동안 정치적 이유로 거의 아사상태에 놓여 있다가 이제 다시 급속하게 부흥하는 캄보디아의 불교를 보고 격세지감이 들었다. 닥터 요와 나는 술락 시바락사 선생과 환담을 마치고 바로 공항으로 향해서 시엠 립 행 비행기에 올랐다. 승객 대부분이 서구인들이다. 서구인들은 문화유적을 찾는 것을 여행의 제1과목으로 생각하고 다음은 현지 문화에 대한 이해이며, 음식과 레저를 즐기는 쪽이다. 앙코르 왓을 찾는 서구인들의 숫자가 아시아인을 오히려 웃도는 것 같아서 그 열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시엠 립 국제공항에 내려서 호텔로 향하면서 젊은 택시 기사와의 대화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34세인 상왕이라는 이 청년은 그야말로 캄보디아의 현대사를 말해주는 상징 그 자체였다. 킬링필드 직후에 태어난 그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고 이제는 2세들에게는 교육의 기회를 줘야 한다면서 일에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영어회화는 자연스럽게 익혀서 간단한 의사소통은 문제없었다. 시엠 립 시가지는 10여 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고, 관광도시의 분위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오후에 도착했기에 당일은 일단 호텔에서 쉬기로 하고 다음 날의 일정은 앙코르 왓과 바이욘 사원 등을 보고 저녁에는 ‘앙코르의 미소’란 쇼를 보기로 했다.     

호텔에는 의외로 서구인들이 많았고, 한국식당도 있어서 우리나라 관광객도 제법 오는 것 같고 특히 불자들의 성지순례코스가 되어 있어서 한국불자나 일반인들에게도 인기 있는 관광지로 급부상했다. 닥터 요와는 모처럼 한국 대만 불교에 대해서 담소를 나누면서 저녁 식사를 하고 일찍 쉬기로 했다. 아침 일찍 움직이기로 해서 앙코르 왓 사원 입구에 갔더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10년 전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입장료 20불이면 2만2천원인데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연간 수백 만 명이 찾는다고 하니, 관광수입도 대단하다고 하겠다. 입장수입뿐 아니고 시엠 립에 떨어뜨리는 달러가 만만치 않는다고 보며, 캄보디아의 경제에도 플러스가 되는 황금알을 낳는 달러 박스라는 인상을 받았다. 앙코르 사원 주위는 벌써 활기에 넘치고 많은 인파로 넘쳐나는 그야말로 관광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관광객들에 대한 깔끔한 관리와 운영에는 아직 미흡한 것 같고 앙코르 사원 관리 보호 그 자체에도 아직은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관리 운영이 요청된다는 것을 느꼈다.  
▲ 앙코르 왓의 경내에는 지금도 나무뿌리가 건물을 감싸고 있다.    
  
앙코르 왓은 처음에는 힌두교사원 용으로 건립되었고 나중에는 불교사원으로 사용되었던 거대한 종교건축물이다. 이 거대한 건축물을 세운 분은 수리야바르만 2세(Suryavarman II, 재위1113-1150) 왕이다. 힌두교의 비슈누 신을 찬탄하기 위해서 이 건축물을 지어서 헌납했는데, 남인도의 힌두문화가 크메르(캄보디아)왕국에 깊이 스며들었던 것이다. 크메르 왕국이 세워진 것은 790년 자야바르만 2세 왕에 의해서이지만, 앙코르 왓은 수리야바르만 2세 왕에 의해서 건립되고 앙코르 왓 사원 뿐 아니고 다른 사원들도 건립했다. 앙코르 사원의 최고층 첨단에는 캄보디아를 상징하는 건축양식이고, 이 건축모양은 캄보디아 국기가 되었다. 앙코르 사원은 힌두의 신화와 우주관이 건축 설계의 기본이 되고 있는데, 건축 양식은 남인도의 드라비다인 건축양식(Dravidian architecture)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이미 전회에서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남인도의 드라비다인 건축양식을 전적으로 모방한 것은 아니고 크메르 양식을 가미해서 앙코르 양식의 독특한 건축술이 탄생되었다. 앙코르 왓을 건립하는 데는 건축설계나 기술적인 분야는 남인도의 엔지니어들에 의해서라고 하지만, 중간 및 하층 인력은 크메르인들이었는데, 40만 명이 동원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앙코르 왓에 대해서 소개하려면 상당한 양의 원고가 필요하다. 《Ancient Angkor》란 영문 책이 있는데, 마이클 프리 맨이라는 분이 지은 앙코르 왓을 비롯한 이 일대의 사원들에 대해서 30년간 탐사하고 연구한 소개서인데, 정말 속속들이 구석구석 이곳저곳의 사원들을 세밀하게 소개하는 역사서요 해설서이다. 앙코르 왓 사원을 둘러보노라면 정말 인간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된다. 한 왕의 의지에 의해서 이런 거대한 종교건축물을 세웠다는 것은 그만큼 왕권이 강하고 부가 뒷받침되었다고 보는데, 수리야바르만 2세 왕은 크메르 왕들 가운데 막강한 군주였다. 이때만 해도 힌두교가 힘을 얻었고, 힌두 승려들이 앙코르 왓 사원에서 비슈누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주문을 외웠겠지만, 자야바르만 7세 (Jayavarman VII 1125–1218) 왕에 이르면 사정이 달라진다. 자야바르만 7세 왕은 1181년에 등극해서 1218년까지 거의 40년간 왕위에 있었는데, 그는 영토를 넓히고 힌두 사원도 건립했지만, 앙코르 톰이란 신도시를 건설하고 불교사원인 바이욘(Bayon)을 건축한 것이다. 앙코르 톰 신도시에 세워진 사원으로서 이 사원은 인도의 대승불교를 받아들였다. 자야바르만 7세 왕이 죽고 나서는 힌두와 상좌부 불교 간에 힘겨루기가 시작됐는데, 결국에는 상좌부가 힘을 얻게 되는데, 13세기에 접어들면 앙코르 왓을 비롯한 바이욘 사원 등은 상좌부 불교의 사원으로 점점 변화해 가고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 톤레샆 호수의 마을 초등학교학생들이 조각배를 타고 집으로 향하고 있다.   

비록 16세기가 되면 앙코르를 비롯해서 앙코르 톰은 정글의 밀림 속으로 묻히게 된다. 앙코르 왓이 서양에 알려진 것은 1586년 한 포르투갈의 신부가 방문하고서 하는 말이 이 세상에는 그렇게 큰 건물이 없어서 펜으로는 묘사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프랑스 박물학자이며 탐험가인 앙리 무오(Henri Mouhot1826-1861)가 19세기 중반 이곳을 방문하고 여행기를 썼고,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캄보디아 내전을 겪고 난 다음에 발굴, 개방하여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바이욘 사원은 처음부터 불교사원으로 건립되어서인지, 바이욘 사원 그 자체는 유적이 되었지만, 주변에는 여러 개의 테라와다 사원이 있어서 비구들이 전법.수행을 하고 있었다. 나는 시엠 립의 앙코르 왓이나 앙코르 톰의 바이욘 사원을 찾으면서 현재 캄보디아 불교의 모습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다행하게도 불교가 다시 부흥하고 있었다. 앙코르 사원 유적 경내에도 테라와다 사원이 있어서 수십 명의 비구와 사미들이 수행하고 있었고, 캄보디아 국민들은 사원을 찾고 있었다. 앙코르 왓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은 너나할 것 없이 앙코르 왓의 위용에 감탄을 연발하면서 이런 초대형 건축물을 중세시대에 세웠다는 것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오전 일정은 앙코르 왓을 보고 앙코르 통의 바이욘 사원을 보고 나면 어느 정도 오전 시간이 지난다. 시엠 립에는 앙코르 왓 등 사원군(群) 말고도 큰 호수가 있는데, 오후에는 대개 이 호수를 찾고 저녁에는 ‘앙코르의 미소’란 쇼를 관람함으로써 하루 일정은 끝난다. 영상 30-40도가 넘는 더위지만, 관광객들은 앙코르의 신비에 젖어들면서 중세 크메르 왕국의 꿈속에서 여행을 즐기는 기분을 느낀다. 캄보디아는 내전을 겪고 난 지금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가져오는 사회 국가의 불안은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서 씁쓸한 감을 느끼게 되는데, 한국이라면 다들 한번쯤 생각하게 되는 타산지석이 아닐까 한다.     

동남아시아에서는 낮에 한숨자고나면 몸이 훨씬 가볍다. 톤레샵 호수는 규모가 제법 크고 호수 위에서 사는 수상 족들이 있어서 한번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듯하다. 민간기업과 정부가 합작해서 호수를 둘러보는 관광 코스를 개발해서 30불을 받아 챙겼는데, 별로였다. 받는 돈에 비해서 시설이 아직 정비가 안 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엔진을 단 배가 빠져 나가는데 좁은 수로에 교통체증이 생겨서 배가 시원하게 빠져나가지 못했다. 게다가 들리는 코스 또한 아직 개발이 안 된듯하고 관광객들로 하여금 은근히 약간의 돈일망정 쓰게 만들려고 수작을 부렸다. 10년 전 보다 오히려 호수에 사는 수상 족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데는 자연스럽지 못했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호수 위에 떠 있는 학교는 인상적이었고, 약간의 보시를 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캄보디아는 지난 70년대 킬링필드라는 대학살의 참극을 겪었고, 이데올로기의 늪의 혼란에 빠졌다가 이제 겨우 안정을 찾아가는 듯했으나 이렇다 할 자원이 없어서, 궁핍을 면치 못하는 듯 했다. 그나마 앙코르 왓(사원)과 같은 문화유적이 있기에 잘 운영 관리하여 관광 프로그램을 개발한다면 희망이 있어 보였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이런 호수의 수상 족들에게 교육에 대한 지원이 그렇게 여유가 있어 보이지가 않았다. 적은 액수이지만, 학교 선생님에게 건네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택시 기사 상왕의 말이 머리를 스쳤다. 자신은 못 배웠지만, 2세들에게는 교육을 잘 시키고 싶다는 의지가 가상했다. 아마도 이곳의 호수 위에 사는 사람들도 부모들은 같은 심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적은 액수이지만 톤레샆 호수의 초등학교에 기부를 하고 교장선생님과 악수하는 필자.     

호수 위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의지를 생각하면서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이런 수상 마을이 몇 십 개 된다는 대답이었고,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는 호수 가운데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호수의 물 색깔은 완전히 황토 빛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환경에서 살아가는지 의아 했지만, 조상 대대로 수 백 년을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이제 호수 관광을 마치고 시엠 립 시내로 향했는데, 저녁에 ‘앙코르의 미소’란 쇼를 보기 위해서였다. 한 사람당 50불정도 받는 것으로 기억되는데, 저녁 식사가 포함된 가격인데, 뷔페가 엉망이었다. 닥터 요와 나는 음식을 먹고 난 다음, 밤에 배가 아파서 설사를 할 정도였다. 식사는 좋지 않았지만, 쇼는 그런대로 볼만했다. 크메르 왕국 시대의 번영과 영화와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을 재현해 보였는데, 캄보디아의 종교사도 포함되었다. 힌두에서 마하야나(대승) 그리고 마지막에는 테라와다(상좌부) 불교의 비구들이 대거 등장해서 캄보디아인들의 삶의 의지가 바로 불교사원임을 은연중 강조하는 것으로 쇼는 막을 내렸다.
보검 이치란 박사(해동세계불교연구원 원장·www.haedongacadem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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