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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세계불교42●라오스불교(2)

이치란 객원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7/10/23 [07:10]
라오스 불교, 태국의 작은집

현대세계불교42●라오스불교(2)

라오스 불교, 태국의 작은집

이치란 객원논설위원 | 입력 : 2017/10/23 [07:10]

▲ 공중에서 본 라오스 메콩 강  

라오스의 불교는 태국불교와 유사하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국력이 약하다보니, 라오스 비구들은 태국으로 유학을 많이 가고 있다. 필자는 라오스를 네 번 정도 가봤다. ‘90년대와 2천대 초 그리고 2014년과 2015년이다. 처음엔 ABCP(아시아불교평화회의) 회의 참석차 두 번 정도 갔는데, 그때만 해도 당에서 주도했다. 아시아불교평화회의는 1970년대 몽골에서 공산사회주의권 불교국가들이 만든 국제 불교 단체였다. 우리나라가 몽골과 수교함에 따라서 몽골에서 아시아불교평화회의가 개최될 때 필자가 한국대표로 참석해서 지금까지 활동해 오고 있다. 이런 인연으로 라오스에 가게 되었는데, 두 번 다 비엔티안에서 열렸고, 최근엔 비엔티안과 루앙프라방을 다녀왔는데, 나중에 갔을 때는 불교가 보였다.

나는 일찍이 유럽에 유학 갔을 때, 한동안 라오스 템플에서 신세를 진적이 있다. 그곳에서 라오스 왕실의 왕사로 계셨던 아잔 마하타완 선사 문하에서 위빠사나를 수련한 적이 있었다. 선사는 국적은 태국이었지만, 태국북부 치앙마이 쪽에서 오신 분으로 라오스 왕실과 깊은 인연이 있었던 분이다. 인연이란 돌고 도는 것이어서 언제 이렇게 서로 얽혀서 연관될지 모르는 것이 인생사다.  
▲ 아침 일찍 루앙프라방 거리에서 탁발하는 비구스님들.  

우리는 라오스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다소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태도는 아주 잘못되었다고 본다. 철학적으로는 다소 차원이 낮다고 인정하더라도 승가공동체로서의 율장에 철저한 정통성은 인정해 줘야 하지 않을까 한다. 불교는 출가 비구 공동체가 존속해야 불교의 참모습이 보인다고 믿는다. 서로 대립반목보다는 상호보완 협력하는 교류가 필요하다고 보며, 경제적으로 후진적이라고 해서 불교마저 뒤떨어졌다고 선입견을 갖는다면 이런 태도는 불자로서 옳은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  
▲ 루앙프라방의 한 라오스 사원   

종교와 이념(사회주의)이 공존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드물다. 라오스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인도차이나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 내륙에 갇혀 있는 나라로서,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되어 있어서 우선 답답한 느낌이 든다. 라오스는 전국토의 70%이상이 산지로 구성되어 있고, 라오스 내에서 움직이기도 매우 불편한 편이고 교통이 제대로 발달되어 있지 않다. 라오스 인구는 약 7백 만 명인데, 몇 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라고 할 수 있겠다. 라오스 족이 55%, 끄므 족(克木人)이 11%인데 이 종족은 중국 56개 소수 민족 외에 속하는 중국 미식별 민족이다. 중국 남부 묘족 계통의 흐몽 족이 8%이며 그밖에 여러 민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라오스 족이 반수 이상을 약간 웃돌고 있다. 라오스 족은 중국 남부 운남성에서 남하한 민족으로서 태국 특히 태국 북동부와 연관이 있고, 언어적으로도 태국어와 가깝다. 라오스 역사상에 등장한 첫 나라는 란쌍 왕국이다. 란쌍왕국(Kingdom of Lan Xang 1354–1707)은 14세기 중반에 현재 라오스 북부와 중부 지역에서 생겨난 왕국이다.  
▲ 라오스의 비구스님들이 예불을 드리고 있다.    
  
란쌍왕국 이후의 역사는 차회에서 더 다루기로 하고 라오스의 현대사와 불교관계를 좀 더 부연해 보자. 프랑스가 물러간 다음, 1975년 라오스 인민 민주공화국이 들어설 때 까지, 라오 이사라(자유 라오스) 운동과 내전이 교차하면서 입헌군주국인 라오스 왕국이 1947년부터 1975년까지 존속하는데, 1947년부터 1953년까지는 프랑스 보호국이라는 명분을 유지했다. 이 기간 동안 라오스는 파텟 라오 주의자들의 활동에 의한 내전을 겪으면서, 1975년 12월까지 존속하다가 라오스 군주국의 마지막 왕인 시사방 와타나(Varman Brhat Maha Sri Savangsa Vadhana 1907-1978) 왕은 파텟 라오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후 공산정권은 수파누봉 왕자(1909-1995)를 명목상의 대통령으로 세우고 1991년까지 대통령직에 있게 했다.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하고 내전을 겪고 나라가 혼란한 상황에서 많은 수의 비구들이 태국으로 이동했다. 친 파텟 라오 성향의 비구들은 새로 구성된 라오스 연합불교승가협회에 참여해서 종교지배층이 교체되었다. 이런 갑작스런 승가지형의 변화로 수계체계에 문제가 발생하고 많은 사원들이 빈 절이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종교집회 또한 마을의 핵심 간부들의 눈총을 받게 되자 라오스 승가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1950년대 말, 공산주의 운동 단체인 ‘파텟 라오’는 승려들을 좌파로 전향시키고 승가의 지위를 민중사상과 태도로 전환하는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이런 노력으로 라오스 승가는 한때 이런 시대사조의 흐름을 외면할 수 없었고, 라오스 왕실과 전통성향의 비구들은 라오스를 떠나야 했다. 이런 정치 이념적 영향으로 승가도 보이지 않게 양분되는 현상을 나타나게 되었는데, 정교분리에 의한 친 왕실에 가까운 비구들과 친 파텟 라오 성향의 비구들이 생겨났다. 이런 현상은 미얀마도 어느 정도 유사한 성향이다. 캄보디아 베트남도 이런 맥락에서 오늘의 인도차이나 불교를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태국은 예외이지만 말이다.     

1979년부터 정부는 전략적인 종교자유정책을 펴자, 라오스 불교는 구렁텅이에서 헤어나게 되었고, 비구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1980년대부터 정치적 완화에 의한 경제개혁으로 사원에 공양을 자유롭게 하고 불교행사 또한 증가하게 된다. 1986년까지 통제되었던 불교축제도 3일에서 7일로 연장되고 수계식도 증가하게 되어 젊은 청소년들이 승가에 입문하는 숫자가 많아지고 있다.  
▲ 대구의 한 사찰에서 라오스 비구들을 초청해서 법회를 봉행했는데, 이때 통역을 담당한 바 있다. 라오스 비구스님들이 불교합창단의 노래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신기해하고 있는 모습.    

라오스 불교는 현재 테라와다(Theraveda Buddhism) 불교이다. 란쌍 왕국은 1527년 포티사랏 왕이 불교를 국교로 삼았지만, 불교는 파눔 왕(1353-1372) 때부터 시작됐고, 이때부터 라오스의 마을에 불교는 깊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라오스 불교는 이른바 라오스 저지대에 사는 라오족의 종교이다. 전인구의 55 %정도의 라오 족은 100% 테라와다 전통을 따르고 있다.

나머지 소수 민족은 ‘삿사나 피’라는 범신론적 신교(神敎)를 믿는다. 다신교적 물활론에 의한 샤먼 성향의 종교이다. 라오스 뿐 아니라 태국의 동부 이산 지역에서도 이 종교를 신봉한다. 라오스 인구의 30%가 이 종교를 믿고 있을 정도이다. 뿐만이 아니라 라오스 주변의 소수 민족들도 이 토속 종교를 광범위하게 믿고 있음이 일려지고 있는데, 이들은 동시에 친 불교적이다.     

하지만 라오스의 주류 종교는 불교이다. 라오스 불교를 전회에서도 대강 언급했지만, 라오스 불교는 몬족의 승려에 의해서 8세기 경 라오스 땅에 전해졌다. 그리고 란쌍 왕국 시대에 라오스 전 영토에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오늘날의 라오스 불교는 이 란쌍 왕국 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라오스의 역대 왕들은 불교의 강한 후원자들이였다.  
▲ 바다가 없는 라오스는 강이 있기에 바다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공산사회주의를 경험하고 있지만, 민중 속에 깊이 박힌 불교는 여전히 라오스의 주류 종교로서 건재하다. 또한 라오스를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이 전부 불교국가들이기에 보이지 않는 힘을 얻고 있다. 라오스 불교는 한마디로 태국불교의 작은 집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라오스인들은 민족성이 유순하고 순수성을 간직한 선량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불교도 부드럽고 소박하다. 라오스 비구스님들을 접하다보면 때가 덜 묻고 욕심이 없음을 이내 알게 된다.      
▲ 루앙프라방 왕궁박물관에서 필자 이치란 박사.    
보검 이치란 박사·해동세계불교연구원 원장·www.haedongacadem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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