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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岩 칼럼
‘갓바위 부처’의 영험과 약사여래 신앙
정성껏 빌면 한가지 소원 들어준다는 ‘갓바위’…한해 500만명 찾아
기사입력: 2017/11/03 [10:09]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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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혼란하고 백성이 어려운 시대, 옛 국왕들은 누구에게서 지혜를 구하고 선조들은 어떻게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했을까. 원효, 설총, 일연이 살았던 시대에도 삼국전쟁과 무신정변, 몽골의 침입으로 혼란하고 백성들이 힘든 시대였다. 왕족과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불교를 대중화시켜 누구나 평등하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한 원효, 몽골의 간섭이라는 시련 속에서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려고 한 일연의 이야기를 삼성현(三聖賢)의 고장 경북 경산에서 만날 수 있다. 경산은 원효와 설총, 일연이 태어난 고장이다. 경산시가 2015년 3월 이들 삼성현을 기리기 위해 경산시 남산면 26만㎡ 규모에 513억원을 들여 삼성현역사문화공원을 만들었다. 팔공산 갓바위는 한해 500만명 이상의 기도객과 등산객이 찾는 명소이다.

한해 500만명이 찾는 팔공산 ‘갓바위’ 


토요일인 10월28일 오전 10시. 경산시 와촌면 갓바위 주차장은 이른 시각인데도 빈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부처님께 바칠 공양미와 초를 파는 가게가 이곳이 기도사찰임을 암시한다. 경남 창원에서 온 L씨(48)는 “수험생인 아들 합격을 기원하기 위해 왔다”며 큼지막한 초 두 개를 샀다. 주차장에서 오르막길을 10분 정도 가면 팔공산 선본사가 나온다. 조계종 직영사찰이자 갓바위를 관리하는 절이다. 선본사를 나와 반대편 금륜교를 지나면 갓바위로 오르는 산길이 시작된다.

갓바위를 오르기 위해서는 대구쪽 길과 경산 선본사쪽, 약사암을 통한 길 등 몇 갈래 길이 있는데 선본사쪽이 가장 수월해 많이 찾는다. 갓바위 정상까지는 900m. 짧은 등산로이지만 가파른 경사로와 계단이어서 웬만한 성인들도 오르려면 숨이 찬다. 몸이 불편해 지팡이도 모자라 기어서 오르는 어르신도 보인다. 젊은 사람들은 20~30분이면 오를 길이 한 시간이 더 걸리지만 이들에게는 갓바위 부처에게 꼭 가야 할 이유가 있다. 성심을 다해 정성껏 빌면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전설이 130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갓바위는 중생의 고통과 병을 치유해 주는 대표적인 성지가 됐다. 갓바위는 신라 선덕여왕 7년(638) 의현대사가 어머니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조성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불상이 만들어진 것은 신라 후대이지만 그 위에 갓이 씌워진 것은 고려 때일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이종하 경산시 문화관광과 관광진흥팀장은 “한 해 500만~600만명의 기도객과 등산객이 찾는다”고 했다. 입시철에는 전국 각지에서 전세버스로 온 단체 기도객들로 붐빈다.      

갓바위는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      

갓바위는 경북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에 있는 통일신라의 불상으로 팔공산(八公山) 관봉(冠峰, 해발 850m)에 있는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이다. 높이 4m, 보물 제431호인 관봉을 속칭 갓바위라고 하는데, 그것은 이 불상의 머리에 마치 갓을 쓴 듯한 자연판석이 올려져 있어서 유래되었다.

병풍석과 같은 여러 개의 바위로 둘러싸인 공간 속에 불상과 대좌를 하나의 돌에다 조각하였다. 갓으로 보는 머리 위의 자연 판석은 상당 부분 부서진 상태이다.

관봉석조여래좌상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조성 배경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불두(佛頭·불상의 머리) 위의 갓으로 불리는 자연 판석은 불상보다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 일명 ‘갓바위 부처’로 알려진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    
                           
관봉 석조여래좌상은 결가부좌(結跏趺坐)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룰 때 취하였던 손 자세로서, 마귀를 항복시키고 지신地神을 불러내어 이를 증명하는 것을 나타냄)을 취한 불좌상이다. 불신(佛身·불상의 몸)에 비해 불두(佛頭)가 약간 큰 듯하며, 움츠린 듯한 어깨, 압축된 듯한 상체의 긴장감 등에서 돌의 크기에 맞춰 조각하였다는 것을 알려 준다.

커다란 육계(肉髻: 석가모니 부처님의 신체 특징의 하나로, 정수리 위에 솟아나온 부분)와 소발(素髮: 머리카락이 표현되지 않은 민머리) 형식의 머리카락, 방형에 가까운 원만한 상호(相好· 얼굴), 큼직큼직한 이목구비(耳目口鼻)를 갖추고 있다. 이마와 머리카락의 경계선이 마치 칼로 베어낸 듯 예리하며, 눈썹 사이에는 백호(白毫 : 원래 흰 털을 뜻하지만, 후대에 보석 등으로 대체됨)가 선명하게 돌출되어 있다. 인중과 코 주위가 깊게 조각되어 있으며, 입은 굳게 다물고 있어 근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항마촉지인을 취한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듯 손끝을 아래로 내려뜨렸으나 왼손은 배 앞에 두어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였는데, 일반적인 항마촉지인의 손 자세와 달리 손바닥 위에 조그마한 둥근 물건이 놓여 있는 모습이다. 불상은 기본적으로 물건을 들지 않는 것이 원칙이나 약사불(藥師佛)의 경우 약호(藥壺)나 약합(藥盒)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불상이 석가모니불의 수인인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지만 약사불상일 가능성도 있다.

법의는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 형식으로 착용하였다. 대좌는 흘러내린 법의(法衣 : 불상의 옷) 자락에 의해 앞쪽이 가려진 상현좌(裳懸座)이다. 비록 환조의 불상이지만, 마애불과 같이 머리와 상체는 입체적으로 표현하였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선각(線刻)에 가까운 기법을 사용하였다. 즉 상체는 건장하고 당당한 느낌을 주지만 하체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느낌이다. 관봉석조여래좌상은 상호와 수인 등에서 통일신라시대 8세기의 특징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상체에 비해 하체가 빈약하고, 형식적으로 표현된 옷주름 등을 통하여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봉 석조여래좌상은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바위를 깎아서 환조(丸彫) 기법으로 조성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대부분의 불상들은 이러한 경우 환조가 아닌 마애(磨崖) 기법으로 불상을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환조 기법으로 불상을 조성할 경우, 불상과 대좌를 따로 만들어 조합하는 것이 상례인데, 여기서는 하나의 돌에다 새겼다는 것이 특징이다.

관봉 석조여래좌상은 산꼭대기에 조성된 동향(東向)의 항마촉지인 불좌상이라는 점에서 경주의 석불(석굴암) 주존과 관련된다. 또한 항마촉지인을 결한 약사불상이라는 점에서는 통일신라 8세기 후반 경주에서 유행하던 불좌상과 연계된다.

한편, 항마촉지인 불좌상이면서 통견 형식으로 법의를 착용하고, 법의 자락이 대좌 앞을 가리는 상현좌(裳懸座)라는 점에서 같은 팔공산 기슭에 조성된 7세기 후반의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의 본존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즉 관봉석조여래좌상은 당시 경주와 팔공산 주변에서 조성되었던 여러 불상들을 참고하여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갓바위의 영험과 기도성취 사례 

공산, 부악 등으로도 불렸던 팔공산은 신라시대에는 국토의 중앙에 있는 산 ‘중악’(中嶽)으로서 토함산 ‘동악’(東嶽). 계롱산 ‘서악’(西嶽), 지리산 ‘남악’(南嶽). 태백산 ‘북악’(北嶽) 등과 함께 나라를 외호하는 5악의 하나로 신성시 되었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는 팔만 구천의 절이 있었다는 말이 전할 정도로 산 전체가 도량이었다.

지금도 경주 남산에 비견할 만큼 산 곳곳에 불교 유적 유물이 널려 있는 성지다, 바로 이 팔공산에 한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준다는 그 유명한 선본사 갓바위 부처님(약사여래)이 있다. 선본사는 팔공산 동남쪽 주봉인 관봉(갓바위) 아래에 있다 본래의 절 이름보다는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이 있는 곳을 윗절이라 부른다. 윗절에는 칠성각 ,산신각, 용왕각과 요사가 있다. 칠성각 등은 독립된 건물이 아니라 하나의 건물로 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지상에서 약 3m가량 높게 지어져 있다. 중앙 1칸이 칠성각이고, 좌우가 산신각과 용왕각이다. 바로 아래는 수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위쪽으로 나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관봉 정상에 그 유명한 갓바위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 갓바위라는 명칭은 머리에 갓처럼 생긴 판석이 올려져 있는데다 관봉이 우리 말로 갓바위이기 때문에 붙여졌다.

이 부처님은 몸, 대좌, 갓 등 전체가 화강암 한 돌로 이루어져있다. 불상 뒷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바위가 광배 구실을 하는데, 이것도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갓바위 부처님은 통일 신라 시대에 석불좌상으로 전체 높이 약 80여평 가량 터를 닦아 놓았다,

상당히 넓은 공간임에도 전혀 넓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기도객이 워낙 많아 비좁게만 여겨진다. 저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오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두말할 필요 없이 갓바위 약사여래 부처님의 영험(靈驗)이다.

안양 불교회관의 신도 임법련화 보살은 지금도 갓바위 약사여래 부처님만 생각하면 환희에 젖는다. 1987년의 일이다, 당시 대학교에 다니던 딸이 어느 날 갑자기 다리가 마비되고 말았다. 조금만 있으면 졸업해서 시집을 가야 할 텐데  반 않은뱅이 신세가 되다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용하다는 병원, 한의원을 쫓아 다녔으나 모두 허사였다. 임보살은 이제 부처님께 매달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갓바위 부처님이 영험하다는 말을 들은 임보살은 즉시 딸을 들처 업고 팔공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갓바위까지 올라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생각 끝에 사람을 사서 딸을 지게에 앉혀 올라갔다, 약사여래불 앞에 딸을 앉힌 임보살은 떼를 쓰듯 억지를 쓰듯 딸의 다리를 낫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빌었다. 그 어렵다는 3천배가 힘든 줄도 몰랐다. 절하는 내내 눈물만 쏟아질 뿐이었다. 절이 끝나자 임보살은 긴장이 풀린 듯 탈진하고 말았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부처님을 쳐다보았다. 부처님은 여전히 미소만 짖고 있었다,

순간 이 부처님도 영험이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 때 임보살의 옆구리를 뭔가 툭툭 치는 것이 느껴졌다, 마비되었던 딸의 다리가 풀리고 있었던 것이다. 환희에 찬 임보살은 무수히 절을 했다, 업혀서 올라갔던 임보살의 딸은 부측을 받으며 걸어 내려왔다, 그 후 집에서 꾸준히 약사여래불 정근을 하였다. 딸의 다리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보문사 선오 스님도 갓바위 약사여래 부처님의 가피를 잊지 못한다. 평소 건강했던 스님은 하복부에 뭔가 찔린 듯 심한 통증을 느꼈다. 병원을 찾았으나 의사는 전혀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러기를 7년, 병명이라도 알면 어떻게 해볼 텐데 답답하기만 했다. 수시로 찾아드는 통증에 스님은 이제 지칠 대로 지치고 모든 것을 놓아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불제자인 내가 부처님께 매달여야지 왜 이러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은 신도들과 함께 갓바위에 약사기도를 가기로 했다. 스님은 기왕 하는 기도라면 제대로 하자는 생각에 갓바위로 향하던 버스 안에서 약사여래 정근을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대구가 가까워지자 다시 하복부에 통증이 시작되었다. 감짝 놀란 신도들은 스님을 가까운 병원으로 모셨다, 이름 없는 작은 병원이었다.

그런데 약사여래 부처님의 가피가 있었던지 그 유명하다는 병원에서도 알수 없었던 병명이 밝혀졌다. 엑스레이 사진에 담석이 선명하게 찍힌 것이다. 병명을 알게 된 것이 갓바위 부처님의 가피임을 확신한 스님은 진통제만 맞고 갓바위에 올랐다. 스님은 아픈 줄도 모르고 3천배를 마쳤다,

절에 돌아와서 약사여래 정근을 계속하길 20일만에 담석이 저절로 배출되었다. 이러한 기도 영험담은 들려고 하면 한도 끝도 없다. 갓바위 부처님의 영험은 사시사철 몰려드는 기도객들이 증명하고 있다. 기도는 윗절 갓바위에서 한다.

한국 약사신앙의 대표적인 성지인 선본사는 아쉽게도 창건이나 연혁에 관한 내용은 거의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현재 절에 전승되고 있는 이야기에 따르면 491년(신라 소지왕 13년)에 극달화상이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창건주로 등장하는 극달 스님은 역사서나 주요 불교 문헌에 전혀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도 527년(법흥왕 14년)이므로 역사적 근거는 희박하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일부 문헌에는 「선본암중수기문」에 극달 화상 창건설이 언급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지만 이 자료의 성격이나 현존 여부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인근의 동화사도 극달 화상이 493년(소지왕 15년)에 창건했다고 전승되고 있고 절에서도 개산조로 모시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현재로는 알 수 없으나 극달 화상이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일 가능성은 있다고 하겠다.

선본사 갓바위 부처님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다. 1962년 동아일보에 보도 되면서부터다. 1960년대 초반 석굴암이 발견되어 세인의 관심을 끝던 중 군위의 제2석굴암이 발견되면서 팔공산도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 했는데 그때 발견된 것이다. 그후 갓바위 부처님의 영험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지금에 이른다. 팔공산은 산 전체가 거대한 불교문화 박물관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끊이지 않는 기도객의 발길 


대한불교조계종의 발표에 따르면 선본사의 2016년 총수입은 101억원을 넘었다. 이 가운데 갓바위의 불공 수입만 41억원에 달한다. 선본사 일반 수입(70억400만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여서 갓바위의 영험함에 대한 불자들의 믿음을 대변해 준다. 특히, 매년 입시철이 가까워 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초월해 이곳을 찾아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이다.

갓바위 정상에는 기도객이 시주한 쌀을 아래로 내려보내기 위해 파이프를 설치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레일을 만들어 쌀과 양초를 실어 나른다. 갓바위 바로 아래 공양간에서는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쉬지 않고 기도객들에게 절밥을 내준다.

약사여래 신앙의 유래 

약사여래 신앙은 달마급다(達摩笈多)가 번역한 『약사여래본원경(藥師如來本願經)』, 현장(玄奬)이 번역한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藥師瑠璃光如來本願功德經)』, 의정(義淨)이 번역한 『약사여래칠불공덕경(藥師如來七佛功德經)』 등의 세 경전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약사여래는 동방의 이상향인 정유리세계(淨瑠璃世界)에 나타나는 부처님으로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열두 가지 대원(十二大願)을 세운 분으로 묘사된다. 그 십이대원은 ①내 몸과 남의 몸에 광명이 가득하게 하려는 원, ②위덕이 높아서 중생을 모두 깨우치려는 원, ③중생으로 하여금 욕망에 만족하여 결핍하지 않게 하려는 원, ④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대승교(大乘敎)에 들어오게 하려는 원, ⑤일체중생으로 하여금 깨끗한 업(業)을 지어 삼취정계(三聚淨戒)를 갖추게 하려는 원, ⑥일체의 불구자로 하여금 모든 기관을 완전하게 하려는 원, ⑦몸과 마음이 안락하여 무상보리를 증득하게 하려는 원, ⑧일체 여인으로 하여금 모두 남자가 되게 하려는 원, ⑨천마(天魔)·외도(外道)의 나쁜 소견을 없애고 부처님의 바른 지견(知見)으로 포섭하려는 원, ⑩나쁜 왕이나 강도 등의 고난으로부터 일체중생을 구제하려는 원, ⑪일체중생의 기갈을 면하게 하고 배부르게 하려는 원, ⑫가난하여 의복이 없는 이에게 훌륭한 옷을 갖게 하려는 원 등이다.

이 열두 가지 대원 중 구병(救病), 현세적 복락, 고난의 해탈 등은 중요한 명제가 담겨 있어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려는 대중심리와 결부함으로써 많은 호응을 얻었다.

특히, 그 신앙은 단적이고 현세 이익적인 경향을 띠기 때문에 민간신앙으로서는 깊은 설득력을 지니게 되었다. 신라에서는 선덕여왕 때 밀본(密本)이 『약사경』을 읽어 왕의 병을 고쳤고, 755년(경덕왕 14)에 월성(月城)의 동쪽 분황사(芬皇寺)에 30만7,600근의 거대한 약사여래상을 안치하였다. 이 약사여래는 사천왕(四天王)과 팔부신중(八部神衆) 및 십이지신(十二支神)을 그 권속(眷屬)으로 삼는다.

통일신라기의 석탑에 그 약사여래의 권속을 조각하는 풍습이 생겨난 것은 이 약사신앙의 한 단면이다. 각처에서 약사여래나 혹은 그 권속을 새긴 불상·벽화 등이 발견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은 경주 남산 칠불암(七佛庵)의 동방불(東方佛), 백률사(栢栗寺) 출토 청동 약사여래입상, 굴불사지(掘佛寺址) 사면석불(四面石佛) 가운데 동방불, 남산 윤을곡(潤乙谷) 마애여래좌상, 경주경찰서 소재 사방불석탑의 기단부 등이다.

조형예술로 표현된 약사여래상은 전부 신라 통일 이후의 작품이다. 경덕왕대의 약사여래상에 대한 기록과 대비시켜 볼 때, 신라의 약사신앙은 680년 이후에 유행하였거나 경덕왕대인 8세기 중반으로 볼 수도 있다. 『약사경』에 대한 교학적 연구는 신라통일기의 약사신앙에 대한 이론적 토대의 구실을 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은 이미 신라 하대에 이르러 약사신앙이 신라불교신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시사하는 일이기도 하다.

현존하는 서목(書目)으로서 『약사경』에 관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이 가운데 백제 의영(義榮)을 제외한 나머지 신라의 학승(學僧)들은 모두 통일 이후에 활약한 인물들이다. 그 전시대에 활약하던 대표적인 저술가로서 원효(元曉)·원측(圓測)·신방(神昉) 등의 서목에서는 『약사경』 관계의 문헌목록이 전혀 없음을 비추어볼 때, 약사신앙은 신라 하대에 이르러 비로소 민간신앙으로서 정착하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약사신앙은 복덕과 장수, 건강과 행운을 기약하는 타력적(他力的) 현세 이익신앙이었기 때문에 특히 민간신앙으로서 많은 영향을 끼쳐왔다. 고려나 조선시대에 이르면 이 약사신앙만이 강조되는 흔적은 별로 없다. 그 신앙의 특성이 병고에 허덕이는 중생의 제도라는 특유한 상황설정에 국한되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상황이 생겼을 때 『약사경』을 독송하는 모임이 열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이 약사신앙이 자연스럽게 사찰 안에 수용되면서, 사찰 안의 중요한 건축물인 약사전(藥師殿)이 건립되었다. 이와 같은 실리적 측면 외에 우리나라의 약사신앙은 동방 유리광세계의 현현을 목적으로 하는 특징을 지닌다. 우리 민족은 약사여래가 있는 동방을 동국(東國), 곧 우리나라로 수용하였다. 그리고 약사신앙은 사방불신앙으로 발전하였고, 방위신앙(方位信仰)과의 밀접한 관련 하에서 독특한 전형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약사신앙은 대중적 경향 때문에 현재에도 여전히 많은 호응을 받고 있다. 다만, 우리나라 불교의 타력신앙이 어느 특정한 불보살에 한정되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여러 신앙의 한 부분으로서 수용되고 있다. 대규모의 사찰에 언제나 약사전이 따로 건립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사찰에서는 약사회(藥師會)라는 모임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모임 또한 병으로부터의 완치라는 쪽으로 크게 기울고 있다.
<문윤홍·시사칼럼니스트·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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