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전체기사포커스범종교가톨릭개신교불교민족종교해외종교이슬람다문화 사회기획특집
전체기사 Trend & View 마음을 비춰보는 포토에세이 종교지도자 칼럼 Pepole & Event 이상훈 박사의 ‘바둑으로 배우는 성경공부’ 매일종교신문 공지 사항
편집  2017.11.18 [15:10]
守岩 칼럼
매일종교신문 공지 사항
안내데스크
신문사소개
광고안내
저작권문의
구독신청
불편신고
독자투고
제휴안내
개인정보취급방침
기사제보
守岩 칼럼
'슈바이처' 이종욱의 아내는 빈민가 천사
故이종욱 WHO사무총장 부인 가부라키 레이코 여사
기사입력: 2017/11/13 [07:15]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大記者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카카오톡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1970년대말 의사 이종욱과 가부라키 레이코의 신혼 시절  

수녀가 되고 싶었다. 스물일곱 살에 한센병(나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경기도 안양 나자로마을로 들어갔다. 가부라키 레이코(마리아 소피아·72) 여사는 45년전 기억을 되살리며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 생각했다"고 술회했다. 1972년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나자로마을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인생은 여간해서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동갑내기 청년이 1976년 그곳으로 의료봉사를 왔다.

이종욱(1945~2006). 훗날 '아시아의 슈바이처' '백신의 황제'로 불리고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이 될 남자였다. 그녀는 그의 청혼을 물리쳤다.

"제가 몸이 자주 아팠고 한센병 환자들과 부대끼며 살았어요. 그 남자까지 불행해지면 어쩌나 불안했습니다."

이종욱은 물러서지 않았다. 마침내 부부가 되면서 아내는 자원봉사자의 삶을 거두고 남편 뒷바라지를 시작했다.   

가부라키 레이코 “개도국 의사 교육하는 한국, 하늘나라 남편도 뿌듯해할 것”     

“워낙 남에게 봉사하는 것을 좋아했고,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꿈이 많았던 사람이라 ‘이종욱 펠로십’이 이렇게 성장한 것을 보면서 무척 자랑스러워할 겁니다.”

한국인 최초로 주요 국제기구의 수장을 지낸 이종욱 전 WHO 사무총장의 부인인 가부라키 레이코 여사. 지난 9월18일 방한(訪韓)했던 그는 남편을 떠올리며 “개발도상국 의료진을 교육하기 위해 이종욱 펠로십을 만들었는데, 벌써 이를 거쳐 간 의료진이 올해 450명을 넘어섰고 내년이면 500명을 돌파한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고 소회를 밝혔다. 

키가 150㎝쯤 되려나. 자8그마한 체구다. 남편 나라에 다시 온 그는 작지만 굳세 보였다.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착륙할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묻자 "뭔가 대단한 일이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페루 리마에서 인천공항까지는 비행기를 갈아타고 꼬박 24시간이 걸린다. 2년 전에도 다녀갔는데 이번엔 뭐가 그토록 특별할까. 가부라키 여사는 "높은 분들 만나고 큰 상도 받아 소감을 밝혀야 하는데 남편은 숱하게 겪었겠지만 내겐 어려운 일"이라며 "혼자라서 더…"라고 했다. 현재 페루에서 사회봉사 중인 가부라키 여사가 한국을 찾은 것은 펠로십을 주관하는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KOFIH)이 마련한 ‘이종욱 자료실’을 둘러보고 ‘이 전 사무총장 기념 중·고교생 그림 전시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가부라키 여사는 “이 전 사무총장은 한국이 빠르게 성장하고, 다른 나라에 도움을 주는 것에 항상 자부심을 느끼고, 지인들에게 은근히 자랑하기도 했다”며 “지금처럼 개도국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보건의료 인력을 양성하고 교육 노하우를 전수하는 모습을 봤다면 한국산 자동차나 전자제품에 뿌듯해했던 것 이상으로 즐거워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부라키 여사는 현재 페루 수도 리마 인근 빈민가에서 빈민가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사회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다. ‘알파카 손뜨개 공방’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총 14명의 여성이 뜨개질을 통해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2002년 처음 공방을 운영할 때만 해도 한 해 수백 달러를 판매하는 데 그쳤지만 최근 수년간은 1만5000∼1만8000달러까지 판매가 늘어났다. 가부라키 여사는 “현재 공방에서 만드는 목도리, 장갑, 모자 등의 제품은 주로 일본과 스위스 사람들이 구매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도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고 했다. 페루의 열악한 의료 사정에 대한 관심도 호소했다. 그는 “현재 페루의 의료 사정은 1970년대 한국의 모습이 연상되는 상황”이라며 “20∼30년 만에 수준 높은 보건의료 시스템을 갖춘 한국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종욱 펠로십에서도 페루를 포함한 중남미 의료진에게 많은 교육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 전 사무총장,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김용 세계은행 총재 등 한국 출신 주요 국제기구 수장이 배출된 것을 계기로 국내에서 관심이 커지고 있는 국제기구 진출에 대해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가부라키 여사는 “국제기구는 겉으로 보기에 화려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힘들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 직장”이라며 “국제기구에 관심이 있는 한국의 젊은이들은 국제기구에 진출하기 전에 ‘봉사하는 삶’에 대한 의지가 확고한지를 먼저 생각해 보라”고 조언했다. 
    
페루 판자촌에서 15년째 여성자립 도운 공로 一家賞 수상     

  가부라키 여사는 지난 9월2일 일가재단(이사장 손봉호)이 수여하는 제27회 일가상(一家賞·사회공익부문)을 받았다. 지구 반대편 페루 빈민촌 카라바이유에서 15년 동안 여성들에게 뜨개질을 가르치고 생산품을 판매하며 자립을 도운 공로다. 

‘무헤레스 우니다스(Mujeres Unidas)’. 페루 수도 리마 북쪽의 가난한 마을 카라바이유에 있는 뜨개질 공방의 이름이다. 우리말로는 ‘여성 연대’라는 뜻의 이곳에서 여성 11명이 옹기종기 모여 뜨개질을 한다. 이 여성들이 알파카 털로 만든 머플러와 모자 스웨터, 판초는 세계 곳곳으로 팔려 나간다. 가부라키 여사는 이곳에서 15년째 여성들에게 뜨개질을 가르치며 자활을 돕는다. 재료인 알파카 털을 구입하고 세계 곳곳에 판로를 만드는 일도 그의 몫이다. 그는 2002년부터 빈민촌인 카라바이유에 공방을 만들고 페루 여성들의 자활을 돕고 있다. 그곳 여성들은 그를 가리켜 ‘카라바이유의 천사’라고 부른다.

최근 공방에서 일하는 여성들과 그 가족들의 병원 진료를 하려면 돈이 필요했는데 상금으로 지원해줄 수 있어 다행이라는 뜻이었다. 일가재단은 15년째 페루 카라바이유의 가난한 여성들의 자립을 돕는 그를 27회 일가상 사회공익부문 수상자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가부라키 여사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봉사에 헌신하는 삶을 사는 데는 그의 남편 고(故 ) 이종욱 전 WHO 사무총장의 영향이 크다. 이 총장은 2003년 7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국제기구의 수장으로 선출돼 지구촌 질병전쟁을 진두지휘했으며 봉사하는 삶으로 ‘아시아의 슈바이처’로도 불렸다. 이 총장은 사무총장 재임 중이던 2006년 5월 뇌중풍(뇌졸중)으로 별세했다.   

1972년 한국 건너와 5년간 한센병 환자 돌보다 故이종욱 사무총장 만나

가부라키 여사가 남편 이 총장을 만난 건 1976년 안양시 나자로마을에서다. 1972년 대학 석사과정(영문학)을 마치고 한국에 온 그는 나자로마을에서 한센병 환자를 도우며 봉사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일본의 고아원에서 일하다가 건너온 것이다. 당시 ‘한국에 가면 내 딸이 아니다’라고 만류하는 아버지를 뿌리치고 택한 한국행이었다. 그는 “나자로마을 소식을 접하고는 꼭 가야한다고 생각했다”면서 “처음 도착한 한국은 정말 몹시 추웠다”고 회고했다. 그곳에서 서울대 공대를 나온 뒤 다시 서울대 의대에 진학한 후 봉사하던 이 총장을 만났다. 가부라키 여사는 “이런 곳에서 봉사하는 의대생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두 사람은 그해 겨울 부부의 연을 맺었다.

결혼 후에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야하는 불편을 겪기도 했다. “한국에서 배우자 비자를 내주지 않아 남편, 어린 아들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게 힘들었어요.” 힘이 드는 건 이 총장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유학은 이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결정된 것이었다. 하와이로 유학을 결정하면서 두 사람은 본격적인 해외생활을 시작했다. 하와이대에서 보건학 박사를 받은 이 총장은 결핵과 한센병 전문의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1983년 WHO 서태평양 지역사무처 한센병 자문관을 맡게 되면서 WHO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 가부라카 여사는 행복에 대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고, 그 일을 통해 조금씩 나은 생활을 하는 사람도 늘어가니까 그걸 보기만 해도 좋다”고 말했다    

가부라키 여사는 살림을 하면서도 틈틈이 봉사활동을 희망했다. 어릴 적 수녀가 되려고 교육을 받았고 이후 일본과 한국에서 봉사를 해온 터였다. 그러다가 다시 봉사활동을 시작한 게 2002년이었다. 당시 WHO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던 이 총장은 눈코뜰 새 없이 바빴다. 스위스 제네바 집에는 가부야키 여사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제네바에서 불어를 배우고 불문학 공부를 했지만 눈이 나빠 오랫동안 책을 보기가 힘들었어요. 혼자 있는 시간도 힘이 들고 책도 보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이렇게 해선 도저히 못살겠다 싶었죠. 아프리카에 가서 어려운 이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었어요. 남편에게 내 생각을 전하니 처음에는 믿지 않았던 것 같아요. 위험하다고 만류하더라고요. 하지만 제가 계속 밀어붙이니 여기저기 알아보면서 결국 페루를 추천해주더군요. 평소 친분이 있던 김용 세계은행 총재가 추천해준 곳이라고요.”

그는 스스로를 가리켜 “한번 마음먹으면 해야 되는 성격”이라며 “동생조차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남의 생각은 안한다고 불평할 정도라고 한다”며 유쾌하게 웃었다.

가부라키 여사는 2002년 남편이 있는 제네바를 떠나 페루 리마로 향했다. 그곳에서 결핵환자를 지원하는 비정부 의료지원단체 소시엔살루(Socios en Salud)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현지 여성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간단한 영어단어조차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고, 수업 중에 걸려오는 전화들로 수강생들이 수업에 빠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영어교육이 아니다”는 판단에 눈을 돌린 게 뜨개질이었다. 당시 소시엔살루에서 여성들에게 클레이 장식과 양초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판매하고 있었는데 수익이 나지 않았다. “클레이 장식과 양초는 너무 흔하고 무거워서 물건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여성들이 불쌍해 조금씩 사는 게 전부였어요. 그러니 수익이 나기 힘들었고요. 그래서 뜨개질과 수놓는 법을 가르쳐 머플러와 스웨터를 만들어 팔자고 생각한 거죠.”

이들이 만든 제품은 페루 국외로 수출됐다. 첫 해에는 1인당 10달러도 채 벌지 못했지만 매년 조금씩 매출액이 늘고 있다. 재료비를 제외한 판매 수익금은 생산한 제품의 양과 질에 따라 분배된다. 여성들은 이 돈으로 아이들 학비와 생활비에 보태고 있다. 

 페루에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사는 부부들이 많다. 남편이 바람이 나고 딴 살림을 차려도 법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여성 홀로 자녀를 키우며 사는 가구도 상당한데 이들은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지 못해 대부분 빈곤하다. 그는 “여성들이 아이들과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보탬이 되어주고 싶어 공방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시행착오도 많았다. 초기에는 평범한 실과 옷감을 사서 머플러를 짜고 수를 놓았지만 별다른 수익을 얻기 힘들었다. 그 뒤 페루 특산물인 알파카 털실을 접하고는 시도했지만 처음부터 좋은 제품을 만들어내긴 어려웠다.

“일반 실보다 비싼 알파카 털실은 다루기가 쉽지 않았어요. 완성된 제품도 까끌까끌해 목에 두르기 어렵더라고요. 차차 알파카에 대해 공부해 익숙해지면서 제품의 질도 좋아졌죠.”

제품을 어렵사리 완성했지만, 그 뒤가 더 문제였다. 많은 제품을 판매할 판로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품의 질이 좋아지면서 매출도 늘기 시작했다. 현지에서 만든 물품이 제네바 WHO본부의 바자, 일본 여자대학 축제, 미국 하버드대 NGO 사무실을 통해 판매했다. 그러자 1인당 10달러도 채 안되던 매출액이 다음해 150만원, 200만원으로 점차 늘었다. 100% 알파카 머플러 제품이 특히 인기다. 한국에서도 입소문을 타고 조금씩 찾는 이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아직까지 지속적인 판로를 확보하지 못해 알음알음으로만 판매되고 있다.

가부라키 여사는 두 가지 꿈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젊은 사람들이 좋은 직장을 갖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공부를 지원해주는 것, 또 하나는 카라바이유의 여성들 뿐 아니라 자녀들과 가족들이 아플 때 충분히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렇기에 그에게 지속가능한 판로 마련은 절실하다고 했다. 다행히 사단법인 국제한인간호재단이 코이카(KOICA) 민관협력사업으로 공장이 있는 카라바이유 지역의 가족과 청소년을 위한 건강가족자활센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과 함께 ‘가부야키 후원회’도 모집하는 등 지속적인 판로 확보와 지원 확대에 희망이 커지고 있다.

문득 가부라키 여사에게 행복이란 어떤 의미일지 궁금했다. 범인(凡人)의 눈엔 골다공증으로 약을 달고 살고 외지의 작은 아파트에서 홀로 사는 삶이 마냥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질문은 장황했지만 그의 간단한 답변에서 행복에 대한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글쎄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고, 그 일을 통해 조금씩 나은 생활을 하는 사람도 늘어가니까 그걸 보기만 해도 좋아요. 행복이죠.”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여성으로 현재 공방 회장을 맡고 있는 욜란다씨를 꼽았다. 머리도 좋고 추진력도 좋지만 다른 이들에겐 가끔 불친절해 싫어하는 사람도 꽤 있다는 욜란다씨. 그 역시 폭력적인 남편과 이혼한 뒤 홀로 세 아이를 키우면서 살고 있다. 손도 빠르고 정확해 판매 수익금 중 가장 많은 돈을 가져간다고 했다. 가부야키 여사는 “욜란다의 어머니가 골다공증이 있으셔서 약을 처방받아야 하는데 상금으로 보탬이 될 수 있겠다”고 했다.

“공방 사람들에게 한국에 가게 됐다고 말하면서 ‘조금 돈이 들어올 거에요. 도움 줄 수 있을 거에요’라고 말해줬어요. 이들에게 해줄게 많은데 제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을 만큼 해줄게 많아졌거든요.”

미소를 머금은 채 차분히 질문에 답변하다 남편 이야기가 나오자 잠시 숨을 골랐다. 11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도 남편 생각이 떠오를 때면 “눈물이 흐른다”고 했다. 배우자이자 동반자였던 남편이 떠나간 자리는 가족 같은 고양이 로미오가 지키고 있다. 아들 충호씨의 함께 살자는 권유도 뿌리친 이유는 아직 리마에서 할 일이 많다는 것이다. 가부라키 여사는 “페루 여성들이 자립하고 홀로 설 수 있도록 돕는 게 목표이지만 아직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며 “한동안은 리마에 더 있어야 할 것 같다”면서 해맑은 미소를 보였다. 다음은 일문일답의 내용.   

가부라키 "남편 점수는 99.9점… 0.1점은 기억에서 지웠죠“   
       
­-한국에서 결혼하고 남편 따라 미국 하와이, 사모아, 피지, 필리핀, 스위스를 거쳐 지금은 페루에서 살고 있는데 이곳에 깃든 추억이 많나요?
"나자로마을에서 일할 땐 그날그날 아주 열심히 살았어요. 4년쯤 지나자 '결혼하자'는 사람이 나타났고 명동성당에서 혼인을 하고 아들도 낳았지요. 일생 하나밖에 없는 경험들이잖아요. 삶에서 중요한 구간을 한국에서 보낸 것 같아요." ­우리말 참 잘하시네요."독학했어요. 일본 성경책과 한국 성경책을 대조하며 읽은 게 도움이 됐지요. 나자로마을에서 설거지하면서도 함께 일하는 분들께 '이 단어는 무슨 뜻인가요?' 묻곤 했어요.“    

―KBS 외국인 장기자랑에서 1등을 했었다면서요.
"이 노래로요. (흥얼거리며) 제목이 '바닷가의 추억'이에요. 가수는 누군지 기억 안 나는데, 제가 문학도 좋아하지만 기타를 치거든요. 한국 살 때 외국인 장기자랑에 한복 차림으로 나가 기타 치며 그 노래를 불렀는데 1등 상을 받아 기분이 좋았지요."     
 
-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사연이 궁금합니다.
 "일본 도쿄에서 성당에 다녔어요. 한국에서 온 신부님이 나자로마을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환경이 열악하고 의료진도 부족한데 '영어 할 줄 아는 자원봉사자가 필요하다' 하셨지요(그녀는 영문학을 전공했다). 간단히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는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 줄도 모르면서 거기 가서 돕고 싶어진 거예요."

­-행동으로 옮길 때 가족도 응원했나요?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 혼자 삼남매를 키웠는데 제가 한국 간다고 하니 무척 서운하셨나 봐요. 떠나는 날 인사드리니 '그래? 넌 내 딸이 아니니까' 하셨어요."

­-두렵지 않았나요? 한센병은 전염병이고 환자를 돌보려면 각오가 필요한데.
"대학 시절 고아원에서 일주일에 두 번 아이들 숙제 도와주는 봉사를 했어요. 그 동네에서 한 정거장 가면 도쿄(東京)에 하나뿐인 나환자 병원이 있었고요. 버스 탈 때 손잡이 만지는 것도 꺼림칙했습니다. 옮을까 봐 무서웠죠. 그런데 나자로마을에서는 그런 공포가 없었어요. 이상한 일이죠. 제 마음에 굉장히 큰 변화가 일어났구나, 생각했어요." ­수녀가 될 작정이었다고요?"(웃으며) 가톨릭 신자로서 욕심이 있었어요. 수녀원에서 강의하는 교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남편을 처음 만난 날 기억하시나요?
"1976년 2월9일이에요. 젊고 잘생긴 청년이 의료봉사를 하고 싶다며 찾아왔지요. 그 사람이 환자 상처를 소독해주고 붕대 갈아주는 모습을 지켜봤어요. 진료 끝나면 제가 있는 사무실로 와 '어떤 음악 좋아하세요?' 묻기도 했죠. 일주일에 하루 이틀 오다가 나중엔 매일 다녀갔어요.“     

몇 달 뒤 이종욱은 청혼을 한다. 그를 밀쳐냈다 받아들이기까지 과정을 몇 차례 캐묻자 가부라키 여사는 “왜 그것까지 알아야 하죠?”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인생을 기록하려면 구멍이 없어야죠.
“수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어요. 그때 몸이 자주 아팠고요. 한센병 환자들과 5년 가까이 지냈는데 저에게 면역(免疫)이 있을까, 의심스러웠죠. 의사는 ‘괜찮을 거다’ 했지만 ‘위험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어요. 제가 결혼하면 그이까지 피해를 보잖아요. 또 당시에 나병 환자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의사 아내가 그렇다는 게 알려지면 병원에 누가 오겠어요. 그런데 설득 당했지요.”  

­-뭐라고 하던가요?
“그이가 딱 한 마디 했어요. ‘아프면 내가 고쳐줄게.’ 촌철살인(寸鐵殺人) 같다고 할까, 그 말에 감동했어요.”

-­어떤 기분이었나요?
“이 세상에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

-어디가 얼마나 아팠나요? 그럼 봉사고 뭐고 그저 집에 가고 싶을 텐데요.
“밥은커녕 물도 못 마실 만큼요. 몸은 바짝 마르고 우울증이 겹쳤죠. 일본에 잠깐 돌아갔을 땐 아버지가 저를 데리고 다니며 스테이크·스시·튀김을 먹였어요.” ­

-화해했군요.
“수녀가 되겠다던 딸이 결혼한다니 좋아하셨죠. 한·일 관계가 나빴는데 의학 공부한 똑똑한 사위라며 반기셨어요. 결혼식 날 서울로 모셨지요. 신혼여행 안 가고 아버지가 좋아할 만한 곳을 이곳저곳 보여 드렸어요.” ­

-첫사랑이었나요?
“저에게는요. 서울대 의대 졸업하면 병원장 딸이다 뭐다 중매가 줄을 섰겠지요. 신혼 때 시어머님이 남편한테 ‘그 아가씨 있잖아, 누구랑 결혼했다더라’는 얘길 가끔 하셨어요. 남편은 듣기 싫은지 돌아 눕거나 일 핑계 대고 병원으로 나갔지요(웃음).”

­-결혼하면 배우자에 실망하곤 하는데 ‘의사 이종욱’과 ‘남편 이종욱’은 달랐나요?
“아뇨. 양쪽 다 히어로(hero·영웅)였어요.” ­

-양말을 뒤집어 벗어놓는다거나, 얼룩 한 점 없는 분이었다고요?
“100점 만점에 99.9점이랄까요.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였고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어요. 단점이 뭐였는지는 기억에서 지웠어요(웃음).” ­

-이종욱 박사는 1981년 남태평양 사모아의 작은 병원에서 일하며 의료봉사를 했습니다. 한센병 환자들을 열정적으로 돌봐 ‘아시아의 슈바이처’로 불렸고 1983년에 WHO 서태평양 지역사무처 한센병 자문관으로 발탁됐지요.
“그 시절 남편은 병원 일로, 저는 육아로 바빴어요. 집 밖은 ‘자이언트 아프리칸 스네일’이라는 달팽이 천지였어요. 만지면 두통과 구토가 생기고 심하면 죽기도 했어요.” ­생전에 집 한 채 소유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높은 자리에 있어도 늘 낮아지려고 노력하신 것 같습니다. “차분하고 일을 잘했죠. 하지만 야심이 없진 않았습니다. WHO가 남편의 재능을 발견해준 것도 있겠지만 하나씩 단계를 밟으며 올라갔지요. ‘가족이 짐 될 수도 있겠다’ 생각한 적도 있어요.”

◆다시 자원봉사자의 길로     

이종욱은 WHO 본부 예방백신국장이었던 1995년 소아마비 발생률을 세계 인구 1만명 당 1명 이하로 낮춰 ‘백신의 황제’라는 칭호를 얻었다. 2003년엔 WHO 사무총장으로 선출됐다. 한국인 첫 유엔기구 수장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는 청빈했다. “가난한 나라가 낸 분담금도 있는데 호강할 수 없다”며 1,500㏄ 하이브리드 차를 탔고 비행기도 1등석을 사양했다. 1년에 150일은 ‘출장 중’이었다. 
▲ 가부라키 여사가 페루 빈민촌 카라바이유에 만든 공방에서 현지 여성들에게 뜨개질을 가르치는 모습.    
         
-야심가 남편과 살긴 쉽지 않았을 텐데요.
“바깥에 신경 쓸 일이 워낙 많았어요. 아들도 미국에서 대학을 다녀 스위스 제네바 집에 저 혼자 있곤 했지요. 외로웠어요.”

-이종욱 총장이 ‘항상 행동하는 사람(Man of Action)’으로 불린 것 아세요? ‘안 된다고 생각하면 수많은 이유가 있고 그럴 듯한 핑계가 생기기 때문에,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일단 밀고 나가야 해’라고 말씀했지요.
 “몰랐어요. 듣고 보니 결혼도 속전속결, 그런 식으로 했네요(웃음).” ­

-질병 퇴치의 최전선에서 싸웠지만 정작 자신은 너무 일찍 떠나셨지요(이종욱 총장은 2006년 5월 제네바 사무실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져 별세했다).
“가끔 머리가 아프고 피곤하다고 했지만 건강한 사람이었어요. 언젠가 최고혈압이 138로 나왔는데 저를 보곤 ‘거봐, 괜찮지?’ 했어요. 의사인 남편이 그러니 믿었지요.”

-내조만 하다 2002년 페루로 가 다시 봉사자의 삶을 살고 있는데 계기가 있었나요?
“제가 나쁜 사람이니까 떠났죠(웃음). 제네바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앉아 있는 데 지쳤어요. 고아원이나 나자로마을에서 일하며 보람을 느끼던 때를 떠올리니 더 싫증이 났습니다. ‘아프리카나 동티모르 가서 난민을 돕고 싶다’ 했더니 위험하다며 남편이 막았어요. 그러다 페루에서 결핵환자를 돕는 단체(소시어스 엔 살루)를 소개해줬지요.”

-처음엔 영어를 가르쳤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런데 전화받고 나갔다 들어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 수업이 엉망이 됐어요.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남편 입장이 난처해질 것 같아 리마 북쪽의 빈민촌 카라바이유로 들어갔습니다. ‘무헤레스 우니다스(Mujeres Unidas)’라는 공방을 열었습니다.”

-공방 이름은 무슨 뜻인지요.
“‘여성 연대’예요. 페루에서는 여성 홀로 자녀를 키우는 가구가 많아요. 저는 가난한 여성들에게 뜨개질을 가르치고 알파카(낙타과의 포유류) 털로 스카프·모자·스웨터 등을 만들어 판매합니다. 교육하고 재료 구입하고 판로를 만드는 일이 제 몫이죠. 한국·일본·스위스에서 바자를 열어 팔아요.” 

 -재료비며 운영비는 어떻게 마련했나요?
“처음엔 남편이 남몰래 사비로 대줬어요. 돌아가신 다음에는 국제한인간호재단, 이종욱글로벌의학센터,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한국국제협력단의 지원이 큰 힘이 됐습니다. 남편이 없으니 저도 독립심이 생겨서 열심히 일했지요.”

◆가부라키 “가장 큰 후원자는 여전히 남편”     

가부라키 여사는 일가상 시상식에서 “제가 이 상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감히 ‘네’라고 답하고 싶다”며 “페루의 공방 여성과 그들의 부모·자녀에게 의료 지원이 절실하지만 우리 수익으론 엄두를 못 냈는데, 이 상금(1000만원)으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자원봉사자의 길을 돌아보면 어떤가요?
“매우 어려운 삶이었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지요. 페루에서는 가능한 일이라서 한 게 아녜요. 해야 했기에 제안하고 설득하며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2006년 이 총장 대신 파라다이스상(특별공로부문)을 받았을 때 “남편은 내게 집 같은 존재였다”고 하셨지요. 그럼 남편을 떠나보내며 집을 잃으신 건가요.
“스위스에서처럼 여전히 월세로 살고 있지만 이젠 페루 카라바이유가 내 집 같아요. 스페인어도 배웠고요.” ­

-공방의 최대 후원자는 누구인가요?
“이종욱 총장이죠. 남편이 세상 떠날 때 우리 공방으로서는 최대 후원자를 잃은 거였어요. 그런데 ‘이종욱 총장의 아내’라는 것 때문에 지금까지도 저희 공방에 기부해주시는 한국분이 많아요. 그럴 때마다 ‘남편이 도와주고 있구나’ 생각해요.

­-지금 공방에는 현지 여성 몇 분이 일하나요? 페루에서 ‘카라바이유의 천사’라고 불리신다던데요.
“11명요.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고 싶었어요. 그들에게 사랑을 배웁니다. 천사는 제가 아니라 이종욱 총장이지요.”

­-요즘 가장 큰 근심은 뭔가요?
“당장은 건강한데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물건 팔 데가 없어질까 걱정이에요. (눈물을 글썽이며) 지금까진 남편이 도와주고 있어요. 제가 어린애 같죠? 그래도 괜찮아요. 남편이 너무 멀리 가버리니까 미안했는지 가깝게 도울 분들을 보내주고 있어요.”  
▲ 페루에서 ‘카라바이유의 천사’로 불리는 가부라키 레이코 여사  

­-지치고 외로울 땐 어떻게 견디나요?
“남편 사진을 보면서 주문을 욉니다. ‘아나타(あなた·당신) 도와주세요, 아나타가 필요해요.’ 평소에 남편을 그렇게 불렀어요.”

­-인생에서 후회스러운 일도 있는지요?
“2002~2006년엔 1년의 반은 페루, 나머지 반은 스위스에서 살았어요. 그렇게 남편과 떨어져 있던 탓에 돌아가신 것 아닌가 생각이 들 때마다 사무치게 눈물이 나요. 후회하고 또 후회하죠.” ­

-보통 사람은 좋은 직업, 좋은 집, 좋은 차를 소유하는 데 집착합니다. 물욕을 초월한 분 같은데 행복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초월한 게 아니라 이것밖에 없어요. 사람과 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일하고 서로 이해하는 게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부는 닮은꼴이었다. ‘행동하는 사람’은 이종욱 총장뿐만 아니라 가부라키 여사를 가리키는 말처럼 들렸다. 그녀는 조금 큰 여행 가방만 한 체구였다. 팔은 작은 나뭇가지처럼 가늘었다. ‘인생은 빌린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가부라키 여사가 옆에 있는 남편의 흉상을 쓰다듬으며 혼잣말로 한참 중얼거렸다. 뭐라 속삭였는지 물었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왜 안 움직여요? 왜 안 움직여요?’라고 했어요.”
<문윤홍·시사칼럼니스트·moon4758@naver.com>  
                                       

     

     

     

     

    

ⓒ 매일종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카카오톡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주간베스트 TOP10
배너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안내데스크신문사소개광고안내저작권문의구독신청불편신고독자투고제휴안내개인정보취급방침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범 종교의 진정성을 두루 살펴 보고 이해함으로써 각 종교와 사회의 화평과 상생, 조화를 이룬다.
회장 이옥용 /발행-편집인 신민형 / 양형모 상임고문 / 편집국장 이중목
우) 140-846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1가 70번지 (83길 21)
대표 전화: 02-703-8267 | 팩스: 02-3211-4419 인터넷 매일종교신문
등록번호:서울 (아)01319(범종교신문 등록 2009년 9월 1일,2013년 6월 15일 제호변경)
기사제보 : minhyung-s@hanmail.net
Copyright ⓒ 2009-2013 매일종교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