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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풀어쓴 ‘붓다 탄생설화와 傳記의 신격화’①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7/11/16 [19:14]
불교의 기원과 4대 성인 탄생과의 비교

쉽게 풀어쓴 ‘붓다 탄생설화와 傳記의 신격화’①

불교의 기원과 4대 성인 탄생과의 비교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17/11/16 [19:14]


본 원고는 장정태 박사가 한국항공대에서 강의한 ‘한국불교와 민간신앙의 습합’ 가운데 불교부분을 발췌한 내용입니다. 장 박사는 일반 대학생을 위해 불교 탄생설화와 전기의 신격화를 알기쉽게 풀어 놓았습니다. ①붓다 탄생설화 ②붓다 傳記의 신격화 등 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편집자 주)    

불교의 기원

기원전 5세기경 인도에 나온 샤카무니, 즉 붓다에 의해서 제창된 가르침으로, 그리스도교, 이슬람과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 현재 ①스리랑카, 태국 등의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기원전 3세기에 전도된 남전불교(남방불교)로, 팔리어 불전을 이용하는 상좌부 불교 ②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여러 나라는 인도 북서부에서 서역(중앙 아시아)을 거쳐서 퍼진 북전불교, 한역불전을 기본으로 하는 대승불교 ③티벳, 몽고 등의 내륙 아시아 여러 지역 등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 외에, 미국이나 유럽에도 교도나 사상적 동조자가 있다. 후기에 네팔 등을 거쳐서 전해진 대승불교로, 티벳어역의 불전을 이용하는 등 이들 여러지역의 불교는 역사와 전통을 달리하고, 교의나 교단의 형태도 다양한데, 모두 교조 석가를 불타(佛)로서 숭배하고, 해탈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미국을 비롯 서구에 불교가 전파된 계기가 된 것은 중국이 티벳을 점령하면서 티벳불교인 밀교가 전세계 사상계를 지배하는 계기가 된다. 리처드 기어 등 세계 유수의 유력인사들이 신앙하는 것은 역사의 반전이다.

상좌부 불교를 우리는 흔히 소승불교라 하는데 대승의 입장에서 자신들은 큰 수레, 소승은 작은 수레라 하면서 개인의 깨달음과 거리가 있는 불교라 부른다. 소승의 입장에서 대승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거리가 있는 불교라 부른다. 최근에는 소승불교란 표현 대신 근본불교, 상좌부 불교라고 부르고 있다.

자이나교에서도 최고의 성자는 ‘붓다’

붓다의 성은 고타마 이름은 싯다르타라 하며 대략 B.C 463년 무렵에 샤카족의 국왕인 정반왕과 마야부인 사이에 장남으로 카파라성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붓다가 태어난 기원전 6세기 중엽 무렵은 우리 인류 역사상 아주 이상한 시기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중국에서는 공자(B.C 551~BC 479), 노자(B.C. 570 추정 ~ B.C. 479 추정), 인도에서는 자이나교를 창시한 마하바라(B.C. 599 추정-B.C. 527 추정), 이란에서는 조로아스터교(B.C. 660~B.C. 583), 그리스에서는 자연학자 · 수학자 · 종교가 피타고라스(B.C. 570?~B.C. 496?)와 같은 신비적 자연철학자 등 많은 철학자, 작가 등이 이 시대에 등장한다.

29세 때 인생의 고뇌로부터의 해탈을 구해서 출가하고 6년 고행 후, 33세에 마가다국 가야성 교외(현재 보드가야) 보리수 밑에서 선정에 들었다. 고뇌가 일어나는 원인과, 극복에 관한 연기의 이치를 깨달아 붓다가 되었다. 바라나시 교외의 녹야원에서 원래 수행 동료였던 5명의 수행자를 상대로 자신이 깨달은 진리(법)을 설명하여 제자로 하였다.(초전법륜) 붓다는 세치혀로 동료였던 선배수행자들을 자신의 제자로 삼았다. 이후 사리불의 250명, 목건련1,000명의 제자 고향 석가족 사람등을 제도하면서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 45년간 교화후 80세에 쿠시나가라에서 열반하였다. 그의 시신은 화장후 유골을 신자들이 나누어서 탑에 제사지내게 된다. 카필라바스투 교외의 룸비니원, 부다가야의 보리수, 바라나시 교외의 녹야원, 쿠시나가야는 성지로 후세사람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출가하기 전 태자로 있을 때 가비라성 밖으로 놀러 나갔다가 동문 밖에서는 노인을, 남문 밖에서는 병자를, 서문 밖에서는 죽은 사람을, 북문 밖에서는 출가승을 보고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해탈하려고 출가수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붓다는 원래 “깨달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그것은 고유명사가 아니다. 석가가 붓다로 불리는 것은, ‘그가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부처) 가르침 때문에 불교가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불교가 생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진리는 그것을 체득하는 사람이 있던 없던, 그것과는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이며, 석가는 그것을 깨달아 모범을 보인 것뿐이다. 붓다가 자기를 숭배하지 말고, 진리를 위하라고 말한 의도가 여기에 있었다.

‘붓다’라는 호칭은 불교와 같은 시기에 발생한 자이나교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자이나교에서도 최고의 성자를 ‘붓다’라고 부른다. 이 말은 깨달은 사람, 즉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란 뜻이다. 불교는 그 당시 널리 사용되었던 이 호칭을 채택한 것이다. 한문 번역 불전에서는 이 말을 ‘각자’로 번역하고 있지만 드물게 ‘지자’라고 번역된 경전도 있으며, 진리를 아는 사람, 올바르게 깨달은 사람을 ‘정각자’라고 부르고 있다.

깨달음을 얻은 붓다는 일설에는 한 동안 깨달음을 만끽하면서도 앞으로 가르침을 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는 심사숙고, 혹은 주저를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가 깨달은 경지가 하도 높고 어려워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붓다는 홀연히 이 불타는 집(화택)같은 사바세계에 사는 철모르는 우리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기로 하고 선정을 마치고 일어선다. 그가 처음 찾은 사람은 그가 고행을 포기했다고 해서 앞서 그를 저버린 다섯 명의 친구들이었다.

우리나라 절에서는 스님들이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들을 수 있다. 이것은 도가적인 것으로 대단히 소극적인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출가한 지 6년째의 일이니 그가 35세 때이다. 그 뒤 붓다는 40여 년 동안 깨달음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북인도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모든 것은 바뀌어 가거니 게으름 없이 힘써라”(유언)

80에 이른 붓다가 사라쌍수 밑에 눞고,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다. 붓다가 일체의 우상, 그 최대의 것인 신마저도 파괴하고, 오직 자기에게만 충실함으로써 고뇌에서 해탈하는 길을 세워 놓고 돌아가자, 그 법의 흐름은 의외의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다. 인간은 역시 약했기 때문에, 우상이 필요했었던지, 그 후세의 제자들은, 배격할 뿐 교조주의적 성격이 전무했던 까닭에 자유로운 교리 해석이 속출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후세에 들어 붓다 당시와는 매우 변모된 불교가 생겨나기 위해 이르렀다.    
▲ 왕비 마야가 흰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태어났다는 붓다의 탄생설화    
  
붓다 탄생 설화의 의미- 4대 성인 탄생과의 비교

붓다는 자신의 집이 아닌 룸비니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은 미리 정해 놓은 곳이 아니라 붓다의 모친이 아기를 친정에서 낳는 당시의 풍습대로 친정으로 가던 길에 갑자기 산고를 느끼고 붓다를 낳은 곳에 불과하다.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성인들께서는 길에서 나서 생활하다 돌아가셨다. 다시 말해 철저하게 남을 위해 사셨다는 이야기를 한다. 예수께서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것을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셨다 표현하지만 어디에서 태어난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한 인간이 어떻게 살다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가 그것이 중요하다. 한번 왔다가는 삶 적극적으로 사는 것을 두분 붓다와 예수의 삶속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예수, 공자, 맹자의 공통점 잘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못했다는 것이다. 모두 아버지에 대한 추억, 기억이 없다. 성령으로 잉태한 예수, 홀어머니의 지극한 교육관으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란 교육관을 만든 맹자,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은 안씨의 딸 징재와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다. 숙량흘은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딸만 아홉을 두었고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다리 장애인이었다. 건강한 아들을 원했던 그가 안씨의 딸과 혼인하기를 구하자 그 딸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혼인을 했다. 야합(野合)이란 숙량흘은 70살이 넘었는데 안징재는 16세여서 예에 맞지 않음을 일컬은 것으로 보편적 상식의 혼인관계가 아니었다. 어머니 안씨가 이구산(尼丘山)에 기도하여 공자를 얻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아버지 압둘라(압달라 Abdallah)는 시리아 쪽으로 나가던 카라반의 상인으로 그의 탄생 직전에 사망했으며, 어머니 아미나(Amina bint Wahb)도 그가 여섯 살 때 사망하여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어린 시절 양치기를 하며 평범하게 성장한 무함마드는 청년이 된 뒤 시리아를 왕래하는 무역상이 되어, 부유하고 고결한 성품의 미망인 카디자(Khadijah)의 대상에 고용되었다. 무함마드의 정직하고 성실한 성품에 감동한 카디자가 구혼하여, 무함마드는 595년에 25세의 나이로 40세의 미망인 카디자와 결혼했다. 생활에 여유를 얻게 된 무함마드는 40세가 된 610년, 세속적 생활에서 이탈하여 메카 교외의 히라산(山)에 있는 동굴에서 명상생활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해 처음으로 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을 통하여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

예수는 어머니가 되는 동정녀(童貞女) 마리아와 약혼자인 목수 요셉이 호구조사의 등록을 하러 간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예수가 태어나던 날 밤 천사가 목자들 앞에 나타나 예수의 탄생을 고하며,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루가 2:4). 예수 탄생 뒤 그 일가는 헤롯왕의 유아살해(幼兒殺害)를 피하여 이집트로 여행하고, 헤롯이 죽은 후 나사렛으로 돌아갔다.
4대 성인으로 추앙받는 공자, 예수, 마호메트, 붓다 그 가운데 붓다를 제외하고는 집안 좋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동산과 직원을 거느리고 있는 부자다.

길에서 갑자기 태어난 것도 문제지만 전설에 의하면 붓다는 모친의 옆구리로 나와 연꽃 위로 일곱 걸음을 걸은 뒤 하늘과 땅을 가리키면서 “하늘 위에서나 하늘아래에서 존귀한 자는 오로지 나일 뿐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일단 이 이야기 가운데 모친의 옆구리로 나왔다는 것은 당시 힌두교의 전설적인 관례를 따라 사람들이 탄생할 때 첫째 계급인 브라만(승려,학자)은 머리로, 두 번째 계급인 크샤트리아(왕족,무사)는 옆구리로, 세 번째 바이샤(상공인)는 배꼽, 수드라(농노)는 발뒤꿈치로 태어난다는 설화를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생각된다. (제왕절개수술로 소개하기도 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외친 것과 하늘 위에서나 하늘 아래서 내가 제일 존귀한 존재다. 이것은 자기 아만이 아니라 최초의 인간선언이다. 내가(붓다 자신) 존귀하듯 모든 생명을 가진 생명체들은 하나 같이 존귀한 것이다.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은 그 스스로 최고의 가치를 가진 것이다. 높고 낮음은 그 사람이 사는 방법, 직업에 따른 차별일 뿐 인간이 스스로 높고 낮음의 차별은 없다는 것이다. 나머지 이야기 역시 많은 상징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붓다의 이러한 출생 신화와 관계해서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중국의 운문종의 창시자였던 운문스님은 만일 자기가 그때 갓 태어난 붓다의 옆에 있었다면 그 아기 붓다를 때려 패서 뼈다귀를 절구에 갈아 개먹이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라는 폭언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운문스님의 옆에 있던 제자는 한술 더 떠서 자신의 생애 동안 이렇게 붓다를 찬탄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우리 범부들이 스스로 참된 나를 찾을 생각은 안하고 공연히 석가모니를 신성시해서 쓸데없는 신화나 만들어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외부의 대상에 매달려 스스로 깨달으려는 노력이 없는 나약함을 야단친 일성으로 생각된다.

기독교에서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했다. 예수의 부활에 의문을 갖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고 어떤 때는 신앙(심)이 약한 징조라고 비판받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불교는 교주 붓다에 대한 비판, 조사 스님에 대한 비판에 너그러운 면이 있다. 

불교 신앙에 있어서 붓다 숭배는 원래 존재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석존께서 입멸하신 후, 교단이 발전하여 시대가 지남에 따라 아무런 숭배 대상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은 실제로 지극히 어렵게 되었다. 여기서 붓다 숭배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붓다는 생전에는 어디까지나 인간이었다. 일반 신자와 같이 살아 있는 몸뚱이를 가진 인간이면서도, 깨우침의 문을 열고 투철한 경지를 가진 성자로서 존경받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붓다께서 돌아가신 후, 붓다의 위대함에 대한 추모와 존경의 마음은 점차로 석존을 미화하고 신격화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신자들이 마음대로 공상한 미화나 신격화가 아니라, 어떤 일정한 불교문화의 흐름에 따른 것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태어나신 붓다께서 7일만에 어머니 마야부인과 이별하게 된다. 동생인 마하빠자아띠가 양모가 되어 부처님을 키우게 된다. 붓다의 성도후 직접 계를 받고 불교 역사상 최초의 비구니가 된다. (당시 풍습이였지만 지금 우리 주변에서도 이모는 친척 고모는 남, 친할머니 보다 외할머니, 친가보다 외가가 더 가까운 친척이다. 어머니 마야부인을 잃었지만 가장 안정적인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큰 나라는 아니지만 왕자로써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을 위한 삼지전이란 궁전을 소유하고 자신만을 위한 연못, 외출할 때에는 먼지와 햇볕을 막기 위한 일산을 든 시종이 있었다. 그리고 왕자로써 그에 합당한 교육을 받았다.)    

출가 이전, 이후 깨달음에 이르는 기록이 없는 붓다    

출가 이전 생애에 대한 기록들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계시를 받고 사람들 사이에 직접활동을 시작하는 30세 이전의 생활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것과 같다. 이것은 아마도 깨닫기 전이나 계시받기 이전의 사적인 생활은 그 후의 진리로 사는 삶과 비교해볼 때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예수의 경우 30세 이전 삶에 관해 민희식 교수의 『신약성서와 법화경』에서 성경에 기록되지 않고 있는 예수의 13세에서 30세까지의 숨겨진 생애에 대해 그동안 바티칸 비밀서고에 감추어져 있던 비밀문서를 입수하여 예수의 인도·간다라에서의 불교수행, 기독교의 사상적 뿌리, 기독교에서 쉬쉬해 왔던 역사적 진실들을 밝히고 있다.    

붓다가 출가 이전 삶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처럼 출가 이후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 전하는 것이 없다. 파키스탄 국립박물관에 전하는 갈비뼈가 완전히 드러나고 얼굴은 흡사 해골의 모습으로 변한 고행상을 통해 생사를 넘나드는 치열한 수행을 했다는 추정만 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고행이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미쳐 강가에서 몸을 씻고 목욕을 마친 붓다에게 한 소녀가 우유를 바쳤다. 이 우유죽은 소녀가 붓다를 나무의 정령으로 잘못 생각하고 관습적으로 받친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모습을 보고 후일 최초의 제자가 되는 5비구, 직전까지 함께 수행했던 사람들로부터 불신과 함께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이런 주위의 질시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보리수 아래에 앉았다.     

깨닫기 바로 전날 밤 예수가 광야에서 받은 유혹과 같은 마왕들의 유혹을 받게된다. 흔히 이때의 유혹은 외계에 실재하는 악마들이 붓다의 허영이나 권력욕, 성욕등을 자극하여 그를 파멸시키려 한 것으로 묘사되나 사실은 모두 붓다의 내면에서 일어난 싸움이었을 것이다. ‘내가 주인이 되기 위해 마지막 남은 번뇌의 씨앗을 소탕하는 작업이 아닌가 생각된다.’ 깨달음을 얻은 붓다는 일설에는 한 동안 깨달음을 만끽하면서도 앞으로 가르침을 펼것인가 말것인가에 대해서는 심사숙고 혹은 주저를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가 깨달은 경지가 너무높고 어려워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붓다는 홀연히 이 불타는 집같은 사바세계에 사는 철부지 우리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기로 정하고 定을 마치고 일어선다. 그가 처음 찾은 사람은 그가 고행을 포기했다고해서 앞서 그를 저버린 다섯 명의 친구들이었다. 전도 선포후 40년 동안 진짜 길 위에 삶은 시작된 것이다. (삼국유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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