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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풀어쓴 ‘붓다 탄생설화와 傳記의 신격화’②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7/11/17 [08:56]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쉽게 풀어쓴 ‘붓다 탄생설화와 傳記의 신격화’②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17/11/17 [08:56]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 통한 탄생 설화의 의미    

붓다는 여섯 개의 상아를 가진 흰 코끼리의 모습으로 이 도솔천에서 내려와서 마야부인의 모태에 들어갔다고 한다.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간 이유를 경전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어느 경전에는 흰 코끼리가 마야부인으로 하여금 오른쪽으로 3번 돌게 한 후, 오른쪽 옆구리를 헤치고 들어갔다고 말하고 있다.     

즉 붓다이나 스투파를 예배하는 것과 같이 경의를 표시하려고 하는 마음에서 자연히 오른쪽 옆구리를 통해서 모태로 들어갔다고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보다 조금 뒤에 등장하는 경전에는 “붓다는 산도를 통하지 않음”이라는 기록이 있어서, 붓다와 같은 성인이 어찌 보통 인간들과 동등한 출산의 길을 통해서 태어날 수 있겠는가 라는, 존경의 마음이 당시의 불교도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는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모태에 들어갈 때에도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갔을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오른쪽 옆구리에서의 입태와 출산 중에서 어느 쪽이 먼저였는가 하는 사실을 현재로서는 결정하기 어렵다.

【옆 구리를 통해 탄생한 것과 관련 제왕절제수술이란 주장도 있지만 인도인의 신분은 브라만(승려). 크샤트리아(왕이나 귀족). 바이샤(상인). 수드라(일반백성 및 천민) 등 4개로 구분되며 최하층인 수드라에도 속하는 않는 불가촉천민이 있다. 불가촉천민은 '이들과 닿기만 해도 부정해진다'는 생각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각 계급에서도 구체적인 직업에 따라 계급이 세분되어 바이샤와 수드라의 경우 2천여개 이상으로 세분된다.    

1947년 카스트제도는 법적으로 금지되었으나 인도사회에서는 여전히 카스트에 따른 차별이 존재하고 있다. 신분이 다른 계급간에는 혼인을 금지하며 이름에서부터 신분간의 차이가 있다. 카스트는 힌두교의 '업'과 '윤회'사상을 근거로 정당화되며 사람들에게 이를 숙명으로 여기게 한다.     

카스트제도는 기원전 1300년께 고대 인도에서 인도-유럽 계통인 아리안족이 인도를 침입하여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을 정복하고 지배층으로 등장하면서 자신들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성립했다.】  
▲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걷고 오른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외치는 룸비니의 불상.     
 
태어나자마자 일곱걸음 걷고 ‘天上天下 唯我獨尊’ 외친 의미    

붓다는 태어나자마자 곧 일곱 걸음을 걷고 나서 오른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7걸음의 7이라는 숫자는 당시 인도 사람들이 신성하다고 여겨오던 숫자였다. 동시에 “모든 세계에서 나 혼자만이 존귀하다”고 외친 것은, 모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신해서 붓다는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고 말한 것으로서, 이는 붓다에서 불교의 가장 기본이 되는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 선창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 전설은 후대의 불교도가 붓다가 가르친 가장 기본적인 사상, 즉 인간의 존엄성을 표시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붓다 탄생 연대를 추정하는 기준으로는 붓다가 입멸 후 약 백 년경에 세운 아쇼카왕의 돌 비석과 중국 제 나라 때 인도스님 샹카비드라가 가지고 왔다는 중성점기에 근거하여 전하고 있다.     

아쇼카왕의 돌비석은 프랑스 고고학자 휴우레르씨가 붓다가 탄생한 룸비니 공원에 있던 룸민디라 사원을 발굴하다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붓다가 열반한 뒤 약 백 년경에 그곳을 순례한 아쇼카왕이 세운 것으로 밝혀졌다.    

신들로부터 사랑받는 왕은 즉위 관정 후 20년에 스스로 여기에 와서 제사를 드렸다. 여기서 부처님 붓다가 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담을 돌기둥을 세우게 했다. 붓다가 여기서 탄생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룸비니 마을은 세금을 면제받고 또 생산의 8분의 1 만 지불하게 한다.(돌기둥의 명문)

그런데 그 기둥은 서기 630년경 당나라 현장법사가 그 곳을 방문했을 때는 벼락에 맞아 쓰러져 있었다.     

천왕이 반드시 태자의 탑 옆 멀지 않은 곳에 큰 돌기둥이 있었는데 그 위에 말의 상을 만들어 놓았다. 아쇼카왕이 세운 것이다. 뒤에 악룡의 벽력 때문에 그 기둥의 중간이 부러져 땅에 넘어져 있었다. (대당서역기) 아쇼카 왕 즉위 연대는 서력 기원전 268년 내지 267년으로 추산된다.    

중성점기-부처님 돌아가신 뒤 여러 현성들이 율장을 전해 받으면서 해마다 한 점씩을 찍어 그 지내온 년수를 표시한 것인데 역대삼보기에 의하면 부처님 돌아가신 부처님 돌아가시던 해 7월 15일 우바리 존자가 자자를 마치고 한 점을 찍고 해마다 이와 같은 행위를 계속해 왔다.   

불멸연대기는 불전불기와 남전불기가 있다. 북전불기(486+80) 는 남전불기는(368+80)2576년
1956년부터 57년 사이 실론, 타일랜드,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등 남방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는 부처님 입멸 2500주년 기념식에서 정했다.     

문자로써 한 것이 아니고 말로써 베풀어진 가르침    

붓다 자신은 아무 것도 글로 남기지 않았다. 그의 모든 가르침은 ‘말’로써 베풀어졌다. 그 직계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한 곳에 모아서 경전의 형태로 정리한 것은 붓다가 입멸한 직후였지만 문자로써 한 것이 아니고 말로써 했다. 붓다가 열반한 바로 그 해 안거 때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스승에게서 들었던 가르침들을 기억해 내어 서로 확인한 뒤 암송해서 머릿속에 정리했다. 이것이 제1차 결집이다. 이것은 제자들만이 참석한 것으로 신도들에게 베풀었던 붓다의 수많은 가르침은 대부분 제외되었다. 이후 약 100년이 되어 다시 결집이 행해졌는데 이것이 제2차 결집이다. 그 이후에도 몇 번의 결집이 더 있었다. 초기의 경전은 모두 제자들의 기억에 의해 구술되었다.    

붓다의 원 이름은 싯달타, 싯달타는 ‘목적을 달성한다’는 뜻으로 일체의 뜻과 미덕 성격이 모두 성취되도록 하기 위하여 지은 이름이다.     

싯달타가 출가할 때 빔비사라왕이 “어디 사는 누구십니까? ”물으니, “히말라야 산 기슭에 있는 나라 사람인데 氏로 말하면 아딧차(태양을 의미한다)이고 성으로 말하면 샤카족입니다.”하였다. 이에 의하여 부처님을 “샤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샤카는 샤카무니의 준 말로서, 중국에서는 스쟈모우니라 쓰며 능인 적묵이라 의역하였다. 샤카족은 고래로 어질고 착하며, 용맹과 지혜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생각이 과묵 침착하여 말이 적은 까닭에 그렇게 불렀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에서 쓰는 한자를 그대로 음역하여 ‘석가모니’라 불렀다. 샤카는 ‘잘 했다’는 뜻이고 무니는 ‘거룩한 이’ ‘성자’의 뜻이니 샤카모니하면 ‘샤카족 출신의 성자’란 뜻이다.    

샤가족 나라의 전 인구는 백만 정도밖에 안되는 작은 나라다. 이 종족의 일부는 로히니강을 중심으로 딴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샤카족은 수도를 카필라성에 두고 콜리야는 서울을 천비성에 두었다. 부처님의 아버지 정반왕은 샤카족 출신이고 어머니 마야부인은 콜리아 출신 샤카족의 정치체제는 일종의 공화정체, 순수 지배계급의 합의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었다. 사실 붓다가 태어난 나라는 아주 작은 나라여서 항상 이웃해 있는 큰 성읍 국가로부터 침공의 위협을 받았다. 성 도후 마가다국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카피라국 사람들은 죽거나 노예로 잡혀가는 일이 있었고 이 소식을 접한 붓다는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는 속설이 있다. (삼국유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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