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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岩 칼럼
‘명불허전’ 나훈아 드림콘서트
歌皇의 화려한 귀환…진솔한 인생론과 행복론도 곁들여
기사입력: 2018/01/04 [08:14]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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歌皇의 화려한 귀환…진솔한 인생론과 행복론도 곁들여      

가수 나훈아(본명 최홍기·70)가 11년 만에 개최한 콘서트가 단연 화제다. 그는 지난 11월2일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 ‘드림콘서트’로 화려한 컴백을 했다. 오랜 잠적생활 탓에 뇌졸중 등 온갖 구설에 시달리던 그가 불세출의 콘서트를 직접 기획하고 연출했다. 전성기를 뛰어넘는 농익은 가창력으로 무대를 장악함으로써 모든 소문을 잠재웠다. ‘가황(歌皇)’이란 말이 거저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이 콘서트는 짜임새 있는 작은 공연으로 재편되어, 부산을 거쳐 12월17일 대구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그의 공연은 티켓 오픈에서부터 난리가 났다. 티켓팅이 ‘피켓팅’이 되었다. 말 그대로 ‘피를 부르는 티켓팅’이었다. 아이돌 콘서트에서나 볼 수 있었던 열기(熱氣)였다. 티켓을 독점 판매했던 Yes24는 오픈하자마자 서버가 다운되는 소동을 겪으며, 서울공연 9,000석이 불과 7분 만에 매진되었다. 부산과 대구도 비슷한 시간대에 매진됐다. 표를 예매한 사람의 절반 이상이 뜻밖에도 30대 젊은이들이었다. 인터넷에 서툰 부모를 대신해서 자식들이 뛰어들었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이번 콘서트는 실로 엄청난 볼거리를 제공했다. 칠순의 나훈아는 펄펄 날아다녔다. 온갖 연주자, 춤꾼들 다 데리고 나와 탭댄스, 지르박에 우리 춤까지 추었다. 노래도 트로트에 국한되지 않았다. 동요로 시작해서, 팝송에다 타령까지 불렀다. 사회자도 없고, 찬조가수도 없었다. 오직 혼자서 죽기 살기로 노래를 불렀다. 한복에서 정장까지 별의별 옷이 다 등장했다. 그 옷들을 전부 무대에서 벗고 입었다. 하얀 이를 내밀며 짓는 ‘썩소’도 여전했다. 관중은 함께 울었고 함께 웃었다. 구수한 입담도 살아있다. 부산 사투리가 일단 먹힌다. “오늘 내가 전부 알아서 할 끼이께네, 엑스포 쇳대 잠가뿌라.” “대구만 오면 어린장이 하고 싶어지내예.” 그는 이상하게 말재주가 있다. “나보고 국회의원 하라 카는데, 그라면 노래는 누가 부르노? 이 아주무이들은 우짜노?” “나보고 뇌경색 걸려서 걷지도 못한다 카는데, 쎄가 만발이나 빠질 사람들이제, 지나 잘 하지.” 자기 광고도 잘 한다. “근대 내 마이 안 늙었지예?” 그러고는 ‘씨익’ 웃는다. 관중이 넘어간다. 정녕 미워할 수 없는 사내다. 진행을 이어가는 기교도 탁월하다. 무대에 얼마전에 죽은 북한 김정남의 사진이 나온다. “김정남은 노래방 가면 내 노래 ‘고향으로 가는 배’를 10번 정도 부르면서 펑펑 울었다 아입니꺼.” 그리고 그 노래를 부른다. “미국에서 고속도로를 운전하며 라디오를 트는데 내 노래 ‘사나이 눈물’이 나온다 아입니꺼. 차 세워놓고 따라 부르며 정말 많이 울었어예.” 그리고 그 노래를 부른다.


공연은 ‘청춘을 돌려다오’에서 절정에 오른다. 러닝에 찢어진 청바지가 여기서 나온다. 서울공연 때는 아예 윗옷을 찢어버렸다. 공연이 끝나자 관람객 모두가 10년은 젊어진 얼굴이었다. 힘없는 노인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들의 이야기꽃이 만발했다. “한 사람이 기절했다더라.” “내 옆의 아줌마는 공연 내내 목 놓아 울기만 하더라.” 이런 얘기들은 약과다. “내년(2018년)에는 티켓이 백만 원이라도 온다.” “나훈아 봐야 해서 죽지도 못한다.” 이제 부끄러움은 저리 가고 없다. “나는 요실금 팬티까지 입고 왔다.” 그 설레에 엄마를 모시고 왔던 한 처녀의 말이 압권이다. “내가 잘 따라왔지, 아빠하고 왔으면 엄마는 이혼당했다.”나훈아를 뽕짝 가수라고 우습게 보는 사람은 없다. 최고의 클래식 마니아도 그의 공연은 높이 산다. 그를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2018년에는 전국 18개 도시로 확대투어를 계획 중이라고 한다.  
▲ 나훈아 드림콘서트 포스터    
  
나훈아의 삶과 인생을 열창한 드림콘서트   

12월19일 대구 엑스코 컨벤션홀. ‘남자의 인생’. 자막이 뜨고 무대에 은하수가 펼쳐졌다. 이어 흘러나온 첫 곡은 반달. 공연의 큰 주제인 ‘드림 어게인(Dream Again)’을 연상시키는 장면이었다. 별무리 속에 등장한 가황은 기타를 들고 ‘반달’과 ‘머나먼 고향’을 불렀다.

별무리가 지고 땅으로 내려온 가황은 무희들을 대동했다. ‘큰 소리로 울면서 이 세상에 태어나...’ 지나온 삶을 음미하듯 부른 노래는 ‘사내’였다. 무희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었다. 광대는 본디 가면을 이르는 말이다. 의도한 상징이라면 자신의 노래 인생과 삶의 철학을 한 무대에 압축해 보여준 셈이었다. 이어 ‘홍시’, ‘너와 나의 고향’, 그리고 ‘아이라예’를 연속해서 불렀다.

세상을 배워가는 청년 나훈아, 중장년의 가황이 눈에 보이는 듯한 흐름이었다. 노래를 부르며 ‘회초리 치고 돌아앉아 우시던’ 어머니의 가면을 이해하고 ‘미워도 한 세상, 좋아도 한세상 마음을 달래며 웃으며 살리라’고 결심하던 지난 시절을 회상했을 것이다.

신곡 ‘아이라예’는 지역 팬들을 위한 선물이었다. ‘그리운 대구 아가씨’란 대목을 부르면서 한복을 차려입고 대구시민극장 무대에 오르던 시절을 떠올렸을까. 보풀이 인 양복 한 벌로 일주일을 버티고 틈만 나면 기타를 잡고 뚱땅 뚱땅 작곡을 하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눈앞을 스쳤을 지도 모른다.

다음 곡은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아마도 당대 최고의 여배우 김지미와 헤어진 후 사자후처럼 쏟아내던 ‘울긴 왜 울어’와는 다른, 무대를 비운 동안의 삶을 채웠을 소슬한 비애와 눈물을 고백하는 듯한 노래였다. 이어서 부른 신곡 ‘몰라’에선 ‘사랑은 둘이서 하고 이별은 혼자가 되고 사랑은 누구도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몰라’라는 노랫말로 이혼소송으로 겪은 심적 고통을 드러냈다. 중년의 한 여자관객이 말했다. “아이고, 마이 힘들었던 모양이네. 그래, 사람 일은 모리지. 우예 아노. 모린다, 몰라.”

다소 흥겨운 리듬의 ‘몰라’가 끝난 후 다시 애잔한 신곡이 뒤따랐다. ‘당신아’. 그 당신이 누구인지는 이심전심(以心傳心), 말 안 해도 안다는 표정들이었다. 관객들은 가만히 숨을 죽이고 가황의 절절한 고백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아, 당신아! 보고 싶다, 당신아! 아닌척하고 살았지 미련이 없는 것은 아냐. 모른 척 했을 뿐이지 밤마다 너를 안고 울었어.’ 여성 관객이 다시 나지막이 속닥거렸다. “마이, 생각나는 모양이네. 아이고, 우리 오빠야 힘들겠다.”  
  
대형 스크린을 가득 채운 나훈아 얼굴    

‘당신아’가 끝나고 객석에서 환호성이 쏟아졌다. 대형 스크린에 나훈아의 얼굴이 떴다. 몇몇이 벌떡 일어섰다. 앉은 이들은 엉덩이를 동동 굴렀다. 계단식 좌석에 진도 3.0에 버금가는 진동이 전해졌다. 이제 시작이었다. 꿈을 안고 광대의 길을 나서 삶을 깨닫고 우여곡절 끝에 그는 문득 나타나 우리 앞에 선 것이다.

‘잊으라 했는데. 잊어 달라 했는데. 그런데도 아직 난 너를 잊지 못하네.’

‘영영’.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그 무엇이 바로 노래이자 관객이라는 것,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우렁찬 떼창이 터져 나왔다. 당신이 우리를 잊지 못했듯, 우리도 당신을 잊지 못했다는 화답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3000여명의 관객이 목청껏 노래하며 가황의 귀환을 환영했다. 1인 뮤지컬이 끝나고 에필로그 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10곡의 노래 속에 미처 녹여놓지 못한 말들을 세세하게 털어놓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직 입을 열지는 않았다. 대신 자막이 떴다.

‘여러분 나훈아입니다.’ 가황은 말없이 관객들을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첫 인사를 어떻게 할까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한 무리의 청년들이 무대로 올라왔다. 합창단이었다. 그들은 가황을 마주 보고 서서 관객의 목소리를 대신 쏟아냈다. ‘소식일랑 주지 않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코빼기도 볼 수 없고, 이 몹쓸 사람아, 오랜만일세.’

나훈아가 화답했다. ‘적지 않은 이 나이에 혼자 울고 웃으면서, 인생을 또 다시 배웠습니다. 걱정 끼쳐서 죄송합니다, 할 말은 많아도, 말 못합니다.’

신곡 ‘예끼 이 사람아’다. 노래가 끝나고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씨익 웃으며 뱉은 첫 마디가 이랬다. “뭔가 미안하고 죄송하고, 우째 무신 말을 해야 할 지.”

언론에 속상한 마음도 내비쳤다. “약국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데, 입이 돌아갔다, 걷는 게 불편하다, 언론이 이러쿵저러쿵 하던데. 직접 보니까 멀쩡하지예?”

박수가 쏟아졌다. 박수 소리를 감상하듯 잠시 객석을 쳐다봤다. 무대를 떠나 있던 사이 겪었던 일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를 소개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사막을 달릴 때였다. 라디오에서 자신의 노래가 흘러나오더라고 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펑펑 울었다. 평생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를 ‘사나이 눈물’이었다. 노래를 시작했다.

‘뜨거운 눈물, 사나이 눈물’ 하는 대목에서 잠시 노래를 멈추었다. 입을 앙 다문 모습이 스크린에 그대로 비쳤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썹을 한번 쓰윽 훔치고 노래를 다시 이어갔다. 관객들도 노래를 부르는 가수만큼이나 용을 쓰는 분위기였다.

다음 노래를 부르기 전에 정치와 관련된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언젠가 “국회의원 해보라”고 찾아온 정치인이 있었다고 했다. 나훈아는 이렇게 대꾸했다.

“내가 정치하마 노래는 누가 하는교? 정치하는 사람들이 아프게 한 국민들의 마음을 내가 노래로 달래주는데, 노래는 누가 하는교?”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훈아 때문에 내가 몬 산다!” 하는 목소리. 와하하, 웃음이 쏟아졌다.

무대의 대형 화면에는 김정남의 얼굴이 떠 있었다. 노래방에서 ‘고향으로 가는 배’를 10번이나 연이어 부르고 고개를 떨군 채 통곡을 했다는 김정남. 가황의 말마따나 그의 노래는 남북의 정치상황을 모두 초월해 ‘국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다. 나훈아가 노래를 그만두지 말아야 할 이유를 웅변하는 듯한 일화였다.

‘고향으로 가는 배, 꿈을 실은 작은 배...’

가황이 눈을 감은 채 ‘고향으로 가는 배’를 읊조리듯 불렀다. 노래의 힘을 노래로 알리는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지나온 삶을 주제로 한 1인 뮤지컬에 이은 에필로그는 신곡 ‘죽는 시늉’으로 끝을 냈다. 노래를 듣기 전에 옆 사람과 손을 잡으라고 주문한 나훈아. 노래를 부르는 중에 박수가 터져 나오자 너스레를 떨었다.

“지금 손뼉 치는 사람은 손 안 잡고 있는 기지요?” 와하하, 쏟아진 웃음소리에서 마음이 활짝 활짝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돌아온 불후의 광대, 진솔하고 화끈한 인생론 또는 행복론     

나훈아의 ‘렉처(Lecture·강연) 콘서트’가 시작됐다. 나훈아의 인생론, 행복론이 구수한 입담과 흥겨운 노래로 펼쳐지는 시간. 그는 ‘수컷 동정론’으로 렉처를 시작했다.

“예전에는 여자의 일생, 여자의 길, 여자의 팔자 이런 류의 노래가 많았는데, 요새는 디비되가지고(거꾸로 되어서) 남자가 불쌍합니다.”

이렇게 당부했다. “남자들 집에 오마 기죽이지 마소. 남자가 집에서 기 죽으마 밖에 나가서 아무 것도 몬 합니데이.”

신곡 ‘남자의 일생’을 부른 뒤 객석을 향해 “40대 밑으로 손뼉을 쳐보라”고 말했다. 꽤 우렁우렁한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살아온 세월을 우예 말로 다 하겠습니꺼? 내가 노래로 대신 하겠습니더.”

모든 악기 소리를 멈추고 기타 두 대만 앞으로 불러냈다. “숨소리까지 들으면서 노래의 맛을 느껴보라”고 했다. ‘울어라 열풍아’, ‘추풍령’, ‘나그네 설움’, ‘옥경이’를 연속으로 불렀다. 여기저기서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옥경이를 부를 때 무대에서 황금비가 내렸다. 꽁꽁 닫혔던 성벽 안으로 숨어든 제우스를 연상시키려고 준비한 연출이라면 대성공이었다. 손을 맞잡으면서 옆 사람과 마음을 튼 뒤여서인지 가수와 관객은 물론이고 관객 사이에도 끈끈한 정이 생긴 듯한 분위기였다.

가황이 잠시 무대를 비웠다. 스크린에 불이 타오르는 장면이 가득 찼다. 수도승차림으로 나타난 나훈아. 짧게 각설이타령을 불렀다. ‘나훈아’를 벗어버리고 ‘광대’가 되는 순간이었다. 불후의 광대가 선택한 첫 곡은 ‘공’이었다.

‘살다 보면 알게 돼, 일러주지 않아도. 너나 나나 모두 다 어리석다는 것을. 살다 보면 알게 돼, 알면 웃음이 나지. 우리 모두 얼마나 바보처럼 사는지.’

띠리리, 하는 후렴구에서 노래를 불쑥 끊고 말했다.

“사람이 죽기 전에 공통적으로 하는 후회가 있답니다. 그기 뭔고 하마, 내가 와 하고 싶은 거 실컷 몬 해봤노, 하는 거랍니다. 자식 걱정, 마누라, 남편 눈치 보다가 세월 다 보내고 내가 와 그래 살았는공 하는 깁니다. 여러분, 내가 제일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내 행복이 제일 중요한 깁니다!”

언필칭 ‘나훈아의 행복론’이었다. 띠리리, 후렴구를 이어가다 다시 끊고 당부하듯 말했다. “내가 번 거 다 쓰고 죽으소. 가고 싶은데 있으마 뒤로 돌아보지 말고 가뿌이소. 무조건 행복하게 살아야 됩니데이!”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뒤쪽 어딘가에서 “나훈아가 최고다. 나훈아 아이마 누가 내 맘 알아주겠노!”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흘러가는 시간을 묘사한 신곡 ‘모래시계’를 부른 뒤 다시 너스레를 섞은 행복론을 이어갔다.

“72세 된 독일 할매가 아를 낳았습니다. 거짓말 아입니데이. 여러분, 행복하마 아를 놓을 수 있습니다. 아를 나라는 이야기가 아이고, 우리도 마음만 먹으마 할 수 있다, 이 이야깁니다. 행복해야 아를 놓든 말든 합니데이. 마음 독하게 먹고 행복합시데이!”

11년 동안 못 돌려준 무엇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신나게 노래를 부르면 “몸속에 있는 나쁜 균들이나 나쁜 세포들이 다 죽는다”면서 목청껏 따라 부르라고 했다. 선 자리에서 의상도 바꾸었다. 하얀 런닝, 찢어진 청바지, 빨간 혁대, 백발의 청년으로 변신. 그리고 터져 나온 ‘청춘을 돌려다오’. 땀을 뻘뻘 흘리며 노래를 부른 뒤 다시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은 조금 부족합니다. 나쁜 균을 더 쥐기야(죽여야) 됩니데이. 오늘 마 밤새도록 해도 됩니더. 거, 문 걸어 잠가뿌라!”

확인 사살을 위해 부른 노래는 ‘고장 난 벽시계’. 엉덩이를 들썩이는 통에 다시 지진이 난 것처럼 바닥이 흔들렸다. 노래를 마치고 소년처럼 후다닥 뛰어나갔던 가황이 다시 돌아와 외쳤다.

“문 걸어 잠가라!” 그렇게 가수도 관객도 지친 기색 없이 ‘고향역’과 ‘건배’를 불렀다. 조명이 꺼지고 가황이 다시 무대에서 사라지자 앵콜을 외치는 소리가 드높아졌다.

“문에 쇳대(열쇠) 채아라(채워라)!”

가황은 다시 ‘내 청춘’, ‘갈무리’를 연이어 불렀다. 떼창 사이사이로 주변 사람에게 중계를 하듯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훈아 오빠야 체력이 20대네!”

“오늘 노는 거 보니까, 100살 까지도 끄떡없겠네. 가황 만세다!”

그렇게 2시간에 걸친 콘서트가 끝났다. 노래 11곡으로 완성한 나훈아전에서 절절한 고백, 행복 렉처까지, 음악 만찬을 즐긴 관객들은 공연이 끝난 후에도 기념사진을 촬영하느라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두 시간 내내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질렀을 텐데도 피곤한 기색이라곤 없었다. 소녀처럼 볼에 홍조를 띤 얼굴들이었다. 가황의 귀환은 그렇게 중년의 여인들을 꿈 많은 소녀로 돌려놓았다. 말 그대로 ‘드림어게인(Dream Again)’이었다.      

나훈아 VS 남진, '오빠'는 아직도 건재하다
    
“라이벌이 있어 우린 발전할 수 있었다.”(남진)대한민국 대중가요사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두 사람이 있다. 세기의 라이벌 나훈아와 남진이다. 둘은 영·호남의 중심지역 부산과 목포 출신. ‘윽수로’ 능청스러운 나훈아의 경상도 사투리와 ‘징하게’ 정겨운 남진의 전라도 사투리는 이들의 트레이드마크다.두 사람의 인기는 지역감정도 뛰어넘었다. 전세대와 전계층, 전국민이 나훈아인가 남진인가를 두고 설전을 벌였다. H.O.T냐 젝스키스냐, 엑소냐 방탄소년단이냐를 두고 목에 핏대를 올리는 것은 귀여울 정도다. 산업화 시대 일에 지친 노동자들은 두 사람의 노래를 듣고 위로를 얻었다. 배운 것 없고 배고프던 그 시절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남진, ‘님과 함께’) 살 수 있길 꿈꿨다. ‘코스모스 피어 있고 이쁜이 꽃분이 모두 나와 반겨주는 고향역’(나훈아, ‘고향역’)에 금의환향(錦衣還鄕)하길 바랐다.  
▲ 세기의 라이벌 나훈아 남진     
 
투박한 외모로 ‘소도둑’ 별명까지 얻은 나훈아의 반전은 고운 고음. 당대 배우들도 부러워한 부잣집 도련님 외모의 남진이 가진 무기는 굵은 저음. 정반대의 매력을 가진 둘은 60년대 말부터 70년대까지 나라를 두 동강 내듯 인기를 양분했다. 가수왕을 뽑는 시상식에서 상을 못 받은 쪽 소녀 팬들은 대성통곡을 했다.데뷔는 남진이 1년 선배다. 남진은 1965년에 ‘서울 플레이보이’, 나훈아는 1966년에 ‘천리길’로 각각 마이크를 잡았다. 1972년 남진이 ‘님과 함께’로 가요계를 휘어잡을 때 나훈아는 ‘물레방아 도는데’로 선배의 뒤를 따랐다. 매번 신곡 발표마다 나라를 들썩인 이들은 명실상부 한국가요사 최고의 톱스타였다. 그렇게 정상의 자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던 나훈아와 남진은 51년이 지난 지금까지 최고의 라이벌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런 두 가왕이 연말 콘서트로 각각 팬들과 만났다. 그동안 꽁꽁 숨어지내며 이혼소송 재판에 참석하는 것 외에는 공식 활동이 없던 나훈아가 먼저 등판했다. 나훈아는 지난 11월 3~5일 서울 공연으로 화려한 컴백을 알렸다. “내 별로 안 늙었지예”라며 관객에게 웃음을 안긴 그는 결국 공연장에서 눈물을 흘렸다. 무대에서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며 팬들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나타내기도 했다. 나훈아는 11월24~26일 부산 공연에 이어 12월 15~17일 대구에서 ‘나훈아 드림콘서트’를 끝냈다. 남진은 나훈아와 불과 일주일 차이로 공연을 개최했다. 12월 24일과 25일 이틀간 서울 한남동의 한 호텔에서 ‘크리스마스 디너쇼’를 열었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대결구도도 형성됐다.앞서 남진의 디너쇼 개최 소식이 처음 전해졌던 11월3일은 나훈아의 서울 콘서트가 열리는 날이어서 당시 가요팬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남진과 나훈아가 나란히 1, 2위에 올라 중년팬들의 추억을 자극했다는 후문이다. 40여년의 세월을 거슬러 다시 ‘라이벌 대결’의 구도가 자연스럽게 형성되기도 했다.혈기왕성한 젊은 시절, 나훈아와 남진은 서로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중압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흔의 오빠’들에겐 서로의 존재가 든든한 울타리다. 남진은 나훈아가 칩거하던 10여년 동안 “함께 무대에 서고 싶다” “가요계 영원한 동반자”라며 러브콜을 보내기도 했다. 아마 썩히기엔 너무나 아까운 후배의 재능 때문이었으리라. 한 무대는 아니지만 2017년 연말 팬들을 만난 나훈아와 남진. 이들을 향한 대중과 언론의 사랑은 현재진행형이다.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 ‘오빠’는 건재하다.
<문윤홍·시사칼럼니스트·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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