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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채운 '성경의 난제해석'-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여호와의 명령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심

매일종교신문 | 기사입력 2011/11/14 [13:09]

나채운 '성경의 난제해석'-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여호와의 명령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심

매일종교신문 | 입력 : 2011/11/14 [13:09]

나채운 '성경의 난제해석'


아브라함에 대하여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여호와의 명령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과 천사

 

 

성경을 읽는 중에 가장 자주 일어나는 이론(異論)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을 번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셨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인간을 희생의 제물로 드리는 전율할 잔인한 행위를 성경이 정당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몇 해 전에 한 정신이상자가 실제로 하나님께 대한 희생의 제물로서 그의 아들을 죽였을 때 이교도들은 성경이 그러한 행위를 고취시켰으며, 따라서 그에 따르는 책임이 있다고 몹시 비난하였다.

적지 않은 신자들이 성경 속에 나타나는 이 이야기로 말미암아 혹은 당황하고 혹은 실족케 된다. 성경 속에 나타나는 이러한 난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난점도 성경의 많은 다른 난점들을 해결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곧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사실을 보다 정확하게 주의해서 살펴보는 것이다.

첫째, 성경 그 어느 곳에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죽이라고 명령하시는 구절은 없다. 성경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늘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죽이라고 명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실제 성경이 말하는 사실과는 다르다. 성경이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고 명하셨다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번제를 위하여 그를 제단에 올려놓으라������고 명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단지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번제로서 제단 위에 올려놓으라고 명령을 받았을 뿐이며,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실제로 죽여서 번제로 바칠 것을 명령하실지 않으실 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이삭을 번제로 바칠 것을 요구하셨는가? 성경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은 이삭을 번제로 요구하시지 않았으며, 결코 이삭을 죽이지 말 것을 명령하셨다(창 22:11, 12).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렸다������(Abraham offered up Issac)라는 것이 성경이 진술하는 바이고(히 11:17)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이지 않았으며, 또 그렇게 하도록 명령을 받지도 않았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죽여서 그 앞에 번제로 바치도록 명령하신 것이 아니었으므로,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드리려 하는 것을 보시고는 그것을 중지시키고 이삭 대신 한 마리 양을 준비하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는 온전한 제물로서 제단에 올리라고 명하시고, 아브라함은 명령을 받은 대로 실제로 행하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전혀 어떠한 면으로도 사람을 실제로 죽여서 산 제물로 드리는 희생 제물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 이야기의 참 뜻은 그러한 잔인한 희생을 금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명령이 아니고 금지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온전히 바치는 것은 정당화 한다(롬 12:1). 아브라함과 이삭에 관한 성경의 기록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을 죽이라고 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가 분명히 명령받은 것(즉 그의 아들을 제단에 바치는 것)을 넘어서 그 아들을 죽이려고 할 때(이것은 명령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적극적으로 그것을 금지하셨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사자를 보내셔서 하늘로부터 들리는 음성으로 이삭의 피를 흘리지 말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창 22:12)고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로부터 그를 불러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기사는 절대로 인간의 희생제물을 권장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엄중히 금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 구절들을 좀 더 주의 깊게 세밀히 상고해 봄으로써 여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난점들이 해소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심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는 성경의 기록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당황하게 하고, 또 가끔 불신자들이 성경을 비평하는 공격의 자료로 쓰여졌다. 그 사람들은 말하기를 만일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고, 그 강퍅케 하신 결과로 바로가 하나님을 대적했다면, 하나님 자신이 바로의 죄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따라서 바로를 그 반역으로 인해 벌하는 것은 정당치 않다고 주장한다. 개역 성경 출애굽기 4:21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로 되어 있다(또한 출애굽기 7:3, 14:4을 참조하라).

이 구절들을 보면 하나님의 처사나 성경의 기록에 대해 비판할 만한 소지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따라서 해석상에 난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며, 또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으며, 또 그러한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을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난점은 다 사라지고 만다. 만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을 바로 행하고 싶어 하는 사람의 마음을 일부러 강퍅케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게 만드셨다면 그건 정말 정당한 처사로 여기기 어려운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 본문에 나타난 상황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본다면 하나님의 의도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는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한 설명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가 그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강퍅케 했다는 것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출애굽기 4:21에는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겠다는 예언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기 전에 바로가 어떻게 행할 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아시고 계심을 뜻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9:12 이하를 통해 우리는 이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보게 되는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는 기록이 나오기 전에 먼저 바로가 스스로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에 대한 기록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출애굽기 5:1, 2에 보면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바로 앞에 나아가게 된다. 그들은 바로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하자 바로가 대답하기를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출애굽기 7:10 이하에서 우리는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 가서 그들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자라는 증거로서 표징(표적)을 행하였으나 바로가 그들을 듣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흠정역(the Authorized Version)출애굽기 7:13에는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듣지 아니했다������로 되어 있으나 개역(the Revised Version)에는 좀더 정확하게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졌다������로 기록하고 있다. 즉 이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는 표현을 사용치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결국 바로는 아주 잔인하고 압제적인 폭군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장 가혹한 탄압과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돌아보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셔서 그들을 압제로부터 건져 내기로 작정하신 것이다(출 2:25, 3:7, 8). 하나님은 모세를 그의 대변자로 바로에게 보내어 그의 백성을 보내 줄 것을 요구했으나 바로는 교만한 반항심으로 하나님을 멸시하고 도리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잔인한 압제를 가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신 것은 바로 이 때였다. 그리고 이것은 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방법을 이행한 것이다. 하나님은 만일 사람이 악을 택하면 그들을 악에게 내버려 두고(개역성경 살후 2:9-12) 만일 굳은 마음으로 죄를 택하면 하나님은 마침내 그들을 죄에 내어 주는 것이다(개역성경 롬 1:24-26, 28). 이것은 단호한 처사이긴 하지만 정당한 처사인 것이다. 만일 이 이야기에서 아직도 어떤 난점이 있다고 하면, 그 모든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신 방식을 생각할 때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억지로 물리적인 힘으로 통제하신 것이 아니며, 마음은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지․정․의를 뜻하는 것이다.

의지(意志)는 강제적인 힘으로 통제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열차가 어떤 이론(理論)에 의해서 끌려질 수 없는 것처럼 의지도 완력에 의해서 움직여지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면 그 방법은 오직 바로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권능과 심판에 대해 보여주시는 것이었다. 만일 바로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이신 전능자 하나님의 존재와 권능과 심판에 대한 계시에 대해서 올바른 태도를 취했다면 그 모든 것들이 그의 회개와 구원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오히려 악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오히려 마음이 강퍅하게 된 것이다.

복음이 그것을 옳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향기이지만, 그것을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사망의 냄새인 것이다(고후 2:15, 16). 그렇다면 구원의 여부에 대한 책임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인 복음에 있지 않고 그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복음을 거절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강퍅하게 되어 정죄 받고 멸망 받는 것이며, 따라서 그에게는 그 복음이 사망에 이르게 하는 사망의 냄새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복음의 설교도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을 가져다주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을 가져다준다. 즉 그것을 믿고 그것을 따라 행하는 사람에게는 생명과 용서와 평안을 가져다주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정죄와 사망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 설교를 듣고 온유한 마음을 갖게 되지만 어떤 사람은 오히려 마음이 더욱 강퍅해지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요 3:17). 그러나 그를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정죄와 영원한 멸망을 받게 되는 것이다(요 3: 18, 36, 10:2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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