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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효사상⑴정조의 성장배경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8/02/05 [07:09]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 지켜보면서 정신적 충격

정조의 효사상⑴정조의 성장배경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 지켜보면서 정신적 충격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18/02/05 [07:09]

조선에는 27명의 왕(1대 태조-27대 순종)이 있다. 이 가운데 ‘대왕’이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임금은 많지않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1397-1450, 재위 1418-1450)처럼 누구나 동의할 만큼의 업적이 필요하다.     

정조대왕은 화성을 축조했다. 15-16세기 조선은 오랜 성리학의 지배에 벗어나 실용학문으로 전환을 모색하는 과도기적 체계다. 이때 사용된 다산 정약용의 ’녹로‘와 ’기중기‘는 그 대표적 과학문명이다. 실사구시 정신과 어진 임금(정조)의 애민정신을 담고있는 이 견고한 건축물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단순히 거대한 건축물만으로 정조를 대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정조의 수원화성 축성은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이 깊다. 당대 최고의 명당에 모시고자 하는 바람과 세자에게 양위후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살고 싶어하는 효심의 건축물이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 8세에 王世孫으로 책봉    

정조의 이름은 성(祘), 자는 형운(亨運)이다. 정조의 이름 ‘성(祘)’의 본래 음은 ‘산’인데, 정조는 서성(1558-1631)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발음을 ‘성’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서성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데 그 후손이 크게 번성했기 때문에 정조도 왕실의 번창을 위해 음을 바꾼 것이다.

정조는 1752년(영조 28)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사도세자는 용이 여의주를 안고 침실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틀림없이 아들을 낳을 태몽이라 여겨 새하얀 비단에다 용을 그려 벽에 걸어 두었다고 한다.

용 태몽 이야기는 숙종 대 이후 자주 등장한다. 숙종의 태몽은 숙종의 할아버지 효종이 꾸었다. 현종의 비 명성왕후의 침실에 어떤 물건이 이불로 덮여 있는 것을 보고 효종이 열어 보니 바로 용이었다고 한다. 영조의 태몽 역시 용꿈이었다. 궁인 가운데 한 사람이 꿈에서 흰 용이 보경당에 날아가는 것을 보았는데, ‘보경당’은 창덕궁 내 전각으로 영조가 탄생한 곳이다. 정조의 아들 순조에게도 용꿈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전에 왕자가 태어날 징조는 대개 궁궐 주변에 상서로운 기운이 감도는 식이었는데, 숙종 대 이후 용 태몽이 등장한 것은 왕의 권위를 수식할 필요가 그 만큼 컸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정조의 형인 의소(懿昭 1750-1752) 세손이 정조가 출생하기 불과 6개월 전에 세상을 떠난 터라 정조의 출생은 왕실의 대단한 경사였다. 정조가 태어나자 영조는 혜경궁에게 “이제 이 아들을 낳았으니 종묘사직에 대한 걱정은 없게 되었다.” 하고는 손으로 이마를 어루만지며 “여기가 나를 꼭 빼어 닮았다”고 하면서 매우 기뻐하였다. 영조는 정조가 태어난 그날 정조를 바로 원손으로 삼았다.

왕실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태어난 정조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 영조는 세손을 자주 곁에 앉혀 두고 글을 읽게 하고 뜻을 묻곤 했는데, 그때마다 정조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여 영조를 기쁘게 하였다. 영조는 그런 정조를 보고 영특하고 슬기롭기가 남다르다고 늘 칭찬하였다.

정조는 8세가 되던 1759년에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되었다. ‘임오화변’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정조의 삶은 지극히 순탄하였지만, 이 사건으로 정조의 삶은 크게 바뀌었다. 임오화변 당시 11세에 불과했던 세손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세손은 아버지의 입관에도 참여하지 못하였고 성복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곡할 수 있었으며 발인과 반혼날에 아들로서 궐 밖까지 나가서 보내고 맞이하는 절차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정조는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양자(養子)로 입적(入寂)하여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즉위 후 내린 윤음에서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였다. 영조 사후 왕위에 오른 정조는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있다.    

빈전(殯殿)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였다.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아! 과인은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 세자(孝章世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거니와, 아! 전일에 선대왕께 올린 글에서 ‘근본을 둘로 하지 않는 것[不貳本]’에 관한 나의 뜻을 크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예(禮)는 비록 엄격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나, 인정도 또한 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향사(饗祀)하는 절차는 마땅히 대부(大夫)로서 제사하는 예법에 따라야 하고, 태묘(太廟)에서와 같이 할 수는 없다. 혜경궁(惠慶宮)께도 또한 마땅히 경외(京外)에서 공물을 바치는 의절이 있어야 하나 대비(大妃)와 동등하게 할 수는 없으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대신들과 의논해서 절목을 강정(講定)하여 아뢰도록 하라. 이미 이런 분부를 내리고 나서 괴귀(怪鬼)와 같은 불령한 무리들이 이를 빙자하여 추숭(追崇)하자는 의논을 한다면 선대왕께서 유언하신 분부가 있으니, 마땅히 형률로써 논죄하고 선왕의 영령(英靈)께도 고하겠다."하였다.    

정조가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하였지만, 이는 사도세자를 생부로 두었다는 천륜을 새삼 거론한 것이다. 정조는 종통 상 백부인 효장세자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생부와의 관계를 거듭 밝힐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정조는 종통 상의 부친인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왕하고 종묘에 올림으로써 계승관계를 명백히 하였고, 생부에 대해서는 혈연상의 아들이 국왕으로 현달하였기 때문에 그에 걸맞게 추승의 조치를 취하였던 것이다.

사도세자와 관련된 ‘임오화변’의 일을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던 정치적 상황에서 정조는 스스로 죄인의 아들임을 밝힘으로써 가슴 속에 숨겨두었던 분노를 표출하고, 그 누구도 감히 대항할 수 없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하였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즉위로 인하여 환경은 변화하였다. 정조에게는 생부에 대한 엄정함이 박절함으로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정조는 즉위 직후에 사도세자를 장현세자로 추승하고 수은묘를 영우원으로 수은묘를 경모궁으로 격상하였으며, 그에 걸맞게 사당을 확장한다든가 관리 기구의 위격을 높인다든가 주변 시설을 보강하였다. 이제 장헌세자를 위한 추모 공간은 영조의 의리를 존중하여 종묘와 왕릉에는 못 미치지만, 국왕으로 높아진 아들을 양육한 공로를 추무하려는 사정도 반영하여 여타의 궁원으로 높은 대우를 받게 되었다. 정조는 영조에 의해 확립된 궁원제를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약간의 수정을 가하고 관리체계와 제향의 격식을 정비하는 방식으로 경모궁-영우원의 위상을 강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조가 바꾼 이름들은 모두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으로서 이처럼 이름을 바꾼 것에 대해 대신들의 이해를 구하고 있다.

정조는 즉위 직후에 왕권을 위협하는 환척(宦戚)과 노론 벽파 일당을 숙청하면서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 발전시켰다. 그는 서설에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란 편액을 걸고 전벽(殿壁)에 ‘정구팔황(庭衢八荒)’넉자를 크게 써 붙일 만큼 후기사회에 이르러 격화된 붕비와 폐습을 조정, 보합하고 민본적인 혁신정치를 펴려고 하였다. 규장각과 초계문신제(抄啟文臣制)의 운영, 5군영의 일대개혁과 장용영의 강화, 숙종 이후 실각했던 남인과 소론의 등용, 서북인과 서얼 출신 인재의 등용, 활자의 개량과 많은 서적을 편찬하는 등 왕조 중흥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각종 제도의 개혁에도 힘쓰고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목표로 하는 실학을 크게 발전시킴으로써 조선후기의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저술로는 정조의 시문과 윤음, 교지 및 기타 편저를 망라한 184권 100책의 방대한 문집『홍재전서』를 남겼다.

효성 또한 지극하여 생부 장헌세자의 묘를 수원 화산으로 이장하여 정조 13년에서 24년까지 11년 동안 13차례 현륭원에 원행하였다. 호학숭문(好學崇文)과 문무겸전의 계몽주의이자 학자군주였던 그는 일생동안 추구하던 개혁왕정이 열매를 맺기도 전에 1800년 6월 28일 49세 일기로 창경궁 영춘헌에서 서거하였다.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文成武㤠聖仁莊孝)’라 했다. 처음 묘호는 정종(正宗), 전호는 효원(孝元) 그리고 능효는 건릉이라고 하였다. 1800년 11월 생부가 묻혀있는 현륭원 동쪽 둘째 산등성이에 해당되는 해좌지원(亥坐之原)에 장사를 지냈다. 그로부터 22년 후인 순조 21년(1821) 3월 9일에 왕비 효의왕후가 홍서하자 선릉부근에다 자리를 정하려고 하였으나 영돈녕부사 김조순이 상소하여 현재의 능침에 대한 풍수지리상 우려 점을 소상히 말하고 吉土를 새로 고를 것을 청하였다. 대신들과 예관들이 능묘 자리를 물색한 끝에 현륭원 우측(서쪽) 산등성이 자좌(子坐)의 언덕으로 옮겨 왕후와 동릉이실(同陵異室)로 합장하였으며, 능호는 옛 이름 그대로 건릉이라고 하였다.

효의왕후 기씨는 영조 29년(1753) 12월 13일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좌참찬 김시묵과 남양 홍씨의 딸로 서울 가회방에서 태어나 9세 때 간선(揀選)에 응하였다가 10세 되던 2월에 세자빈에 책봉되고 1776년 3월 왕비가 되었다. 한편 정조는 광무 3년(1899) 고종이 황제에 오른 뒤에 정종선황제(正祖先皇帝)로 왕후 역시 경모궁과 영우원에 행차하는 격식을 정한「궁원의」를 만들었다. 1782년 문효세자가 탄생한 이후부터 사도세자의 국왕추숭 문제를 염두에 두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문효세자가 1786년 다섯 살 어린나이에 갑자기 서거하자 정조는 죽은 아들을 가까이에 두고 싶어 궁궐에서 가까우면서 길지인 효창원에 묻었다. 얼마후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가 임신한 상태에서 갑자기 죽자 정조는 문효세자 옆에 의빈 성씨를 묻어 사후에라도 모자의 정을 나눌 것을 바라서였다.

일제 강점기 문효세자와 생모 의빈 성씨의 무덤을 모두 서삼릉으로 이장했다. 해방이후 김구와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조성되어 있다. 정조는 왕자생산을 위해 수빈 박씨를 맞아들였다. 그리고 1789년 영우원을 더 좋은 길지로 옮겨 지식을 얻는다는 계획을 실행하였다. 그 기간 중 정조는 10차례나 행차하여 예를 표하였다. (삼국유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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