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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對譯)‘洞察!天問天答’(不滅の自覺) 質問2

眞鏡 | 기사입력 2018/02/08 [06:57]
私は、必ず「自分」を悟らせます。

(韓日對譯)‘洞察!天問天答’(不滅の自覺) 質問2

私は、必ず「自分」を悟らせます。

眞鏡 | 입력 : 2018/02/08 [06:57]
質問2:「自分」を信じると言う人もいて、「自分自身」を信じなさいと言う人もいます。 「私は誰であり、何であるか」という探求をすることとは、どんな相関関係があって、どんな意味がありますか。    

「自分自身」を信じると言い、「自分自身」を信じなさいと言いますが、信じると言う人も信じなさいと言う人も、「自分自身」を知らないのは同じです。なぜなら、そのように言うその裏面には、信じる心に対する明確な「目的」があるということです。

常に自分の基準に符合する「よく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は、成就と満足という設定がある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そのような設定は、「生きてきながら」蓄積された経験と体験に依存をしています。そして、そのように設定に「依存的なことは、結局、肉体との同一視で照らされている「今の私」だけを「自分自身」と考えているからです。    

したがって、「自分自身」を知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肉体と「自分自身」を同一視しており、同一視していることは、「自ら」である自分が「自ら」肉体に依存していることさえ知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即ち、「自ら」である自分が「自ら」のすべてを尽くしていながらも、自分が何をしているかを知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ことです。知らない理由は、「自ら」自分が「自ら」自分を知ることができないからです。    

したがって、「自分自身」を信じることと「私は誰であり何であるか」を探求することとはどんな相関関係もありません。  

질문 2: ‘자기 자신’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며, ‘자기 자신’을 믿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라는 탐구를 하는 것하고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으며,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자기 자신’을 믿는다고 말하고, ‘자기 자신’을 믿으라고 말하지만,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믿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는 그 이면에는, 믿음에 대한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 기준에 부합하는 ‘잘 되어야 한다’는 성취와 만족이라는 설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설정은 ‘살아오면서’ 축적된 경험과 체험에 의존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설정에 ‘의존’적인 것은 결국 육체와의 동일시로 비추어지고 있는 ‘지금의 나’만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육체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으며,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인 자기가 ‘스스로’ 육체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인 자기가 ‘스스로’ 모든 것을 다하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르고 있는 이유는 ‘스스로’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믿는 것과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것과는 어떤 상관관계도 없습니다.  

(質問)私は、必ず「自分」を悟らせます。    

断言しますが、最高の*上根機は、どんな人かというと、本当に「私は誰なのか」「私は何であるのか」、このような議題をおいて、熟考し、探求する人が最高の上根器です。カルマでもなく、功徳でもなく、「選択」を受けることでもなく、特定の民族でもなく、特定の宗教的信仰心でもなく、特定の修行と苦行でもなく、特定の地域でもなく、特定の文化でもありません。    

大多数の求道者と修行者が看過しているのが、自分は生まれた「誰と何」と考えて、即ち、肉体との同一視を当然に受け入れながら、即ち「私」は「誰であって何である」と考えながら、「私」は「誰であって何であるか」を探求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    

だから、本当に滲み出る「私は誰であって何であるか」に対する探求をするとしたら、先ず、するべきことは何かというと、本当に私は「何」なのか。本当に私は「誰」なのか。 「これ(肉体)は本当に私なのか」と自ら自分に対してもう一度疑って見て、疑問を持って見ることです。   

自己に対して疑いを持たない者がどのように本当の自分自身に生まれ変わることができますか。自分が自分を誤解していて、その誤解による「偽りの自分」が自分を取り囲んでいるのです。だから、このような洞察は、「自分の不信」を見つけ出すのではなく、「今の自分」を疑うことだけが唯一の道です。    

「道がこうだ、悟りがこうだ、真理がこうだ」のような言葉を並べる者ではありません。だから今はもう「私は何である」に留まらずに、「私は誰なのか」に越えてきて下さい。この言葉が理解されていない理由は何かというと、「私は誰である」「私は何である」にだけ、自分「自ら」留まっているからです。    

どんなに純粋ですか。「私は誰であり、何であるか」、即ち「自分自身」に対する関心が「自覚」に続き、「自覚」することにより、すべてが出発して「始ま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したがって、最終的に自分自身を信じることは、自身を知ることであり、自分を知ることは、「独り独立的だ」という理解を持つことです。即ち、「自分自身」に対して責任を果たすということです。    

(질문) 저는 반드시 ‘나 자신’을 깨우칠 것입니다.    

단언컨대, 최고의 상근기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정말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이러한 의제를 놓고, 숙고하고 탐구하는 사람이 최고의 상근기입니다. 카르마도 아니며, 공덕도 아니며, ‘선택’을 받아서도 아니며, 특정 민족도 아니며, 특정 종교적 신앙심도 아니며, 특정 수행과 고행도 아니며, 특정 지역도 아니며, 특정 문화도 아닙니다.    

대다수의 구도자와 수행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자기는 태어난 ‘누구와 무엇’으로 여기며, 즉 육체와의 동일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즉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고 여기면서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를 탐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 어린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를 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뭐냐 하면, 정말 나는 ‘무엇’일까? 정말 나는 ‘누구’일까? ‘이것이(육체) 정말 나일까?’ 하고 스스로 자기에 대해서 한 번 더 의심해보고, 의문을 가져보는 것입니다.     

자기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거듭날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가 자기를 오해하고 있으며, 그 오해로 인해서 ‘거짓된 자기’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통찰은 ‘자기 불신’을 찾아내는 게 아니라, ‘지금의 자기’를 의심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도가 이렇다, 깨달음이 이렇다, 진리가 이렇다’ 이런 말을 늘어놓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는 ‘나는 무엇이다’ 에 머물지 말고 “나는 누구인가?”로 넘어 오세요. 이 말이 이해되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나는 누구이다’ ‘나는 무엇이다’에만 자기 ‘스스로’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순수합니까!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즉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 ‘자각’으로 이어지며, ‘자각’함으로 모든 것이 출발하고 ‘시작’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안다는 것이고, 자신을 안다는 것은 ‘홀로 독립적이다’라는 이해를 갖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해서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質問)結局、「信じる心」を通じて得ることができるものは何もないということでしょうか  

初めから「不信」でなければ、大丈夫です。自分「自ら」自分を正しく知ればよいのです。

(질문) 결국 ‘믿음’을 통해서 얻을 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까?   

처음부터 ‘불신’하지 않으면 됩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바로 알면 되는 것입니다.    

(質問)「自ら」という言葉をよく使われます。   

すべてが「私」の志であり、意志であり、すべてが「私の心持ちである」、即ち、すべてを「私が行う」という事実を強調するためです。    

例えば、受容することも「私」がしますが、受容しないことも「私」がするということです。することも「私」がしますが、しないことも「私」がするということです。「選択」をするのも「私」がしますが、「選択」をしないことも、結局は「私」がするということです。そのようにできる理由は、「私」は、真に「自由」だからです。         

(질문) ‘스스로’라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모든 것이 ‘나’의 뜻이자 의지이며, 모든 것이 ‘내 마음먹기다’, 즉 모든 것을 ‘내가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어서 수용하는 것도 ‘나’가 하지만, 수용하지 않는 것도 ‘나’가 한다는 것입니다. 하는 것도 ‘나’가 하지만, 하지 않는 것도 ‘나’가 한다는 것입니다. ‘선택’을 하는 것도 ‘나’가 하지만, ‘선택’을 하지 않는 것도 결국은 ‘나’가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가 있는 이유는 ‘나’는 참으로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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