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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정조의 효사상⑶정조의 ‘효’ 인식과 통치이념
어머니 혜경궁 홍씨 모시고 살고자 했던 수원 화성에 담긴 효성
기사입력: 2018/02/08 [07:09]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장정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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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의 능 행차는 단순히 사도세자 능을 참배하는 효의 표현 뿐 아니라 백성들을 직접 만나는 기회로 삼았다. 사진은 수원시에서 열린 정조대왕 능행차 재현 모습.      

어머니 혜경궁 홍씨 모시고 살고자 했던 수원 화성에 담긴 효성
       

정조의 능 행차는 단순히 사도세자 능을 참배하는 효의 표현 뿐 아니라 백성들을 직접 만나는 기회로 삼았다. 사진 수원시에서 열린 정조대왕 능행차 재현 모습.    

성리학적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이상적 사회를 염두에 두었던 정조의 효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일화, 문집으로는 찾아보기 어렵다. 정조의 저서 『홍제전서』에서는 효에 관한 언급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은 정조 스스로 일찍 사도세자를 여윈 것도 한 단면일 수 없다. 조선 전 시대를 아우른 『효경』의 내용 가운데 임금으로써 실천해야 하는 효의 실천이 정조의 효를 기초로 한 정치를 살펴볼 수 있다.    

효는 천지자연의 불변적 원리이고, 합리적인 인간의 일이며, 모든 사람들이 실천해야 할 길이다. 불변적 원리이자 합리적인 인간의 일이므로 모든 사람이 기꺼이 기준과 법도로 삼아야 한다. 자연의 질서를 잘 따르고 육지와 바다의 특성을 잘 살려 생산력을 높여 세상을 잘 살게 한다. 그러므로 교화가 엄숙하지 않아도 이루어지고, 정치가 엄격하지 않아도 다스려진다. 옛날 훌륭한 임금은 효를 핵심 내용으로 삼아 교화를 할 때만이 모든 백성들이 감화한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솔선하여 백성들을 두루두루 사랑하자. 백성들도 자기 부모를 버리는 자가 없었다. 도덕적인 행동과 옳은 일을 베풀자, 백성이 고무되어 착한 행동을 하였다. 앞장서서 공경과 겸양을 실천하자. 백성들이 다투지 않았다. 예와 악으로 백성을 인도하자. 백성들이 화목하게 되었다. 좋아하고 미워하는 태도를 분명히 밝히자, 백성들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게 되었다. 통치의 수단인 사회규범으로 효 사상을 잡고 있다.     

정조의 효심을 나타내는 일화 가운데 원소에 송충이가 만연하여 솔잎을 좀 먹으므로 왕은 송충이 몇 마리를 잡아오라 하여 그것을 입에 넣어 삼키며 “네가 아무리 미물인 벌레이기로서니 천산의 솔잎을 긁어 먹을 수가 있느냐? 차라리 네 오장을 먹으라”하는 것이었다. 좌우의 군신들이 대경실색하였으나 정조의 효심에 머리를 조아렸다. 이와 같은 정조의 효심은 이후 정조=효의 실천군주이며 수원을 효의 도시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왕위를 세자에게 양위 후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살고자 했던 이유에서다. 한국사회에서 효의 역사는 『예기』나 『효경』과 같은 유가 경전이 전래된 경유 등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고려중기 일연에 의해 저술된 『삼국유사』는 총 다섯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5권「효선」편은 세속적인 윤리인 효(孝)와 종교적인 신앙인 선(善)과의 관계를 정립하여 불교의 윤리실천을 이루기 위한편이다. 윤리적인 효와 불교의 선은 갈등과 충돌이 일어난다. 이러한 효와 선의 갈등문제를 해결하고 조화시켜주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효선」편에 소개된 효의 실천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 조상들의 효에 대한 가치와 실천방법을 알 수 있다. 우리의 효사상은 중국에서 유교사상이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민족을 지켜왔던 사상이다. 이는 조상숭배의 풍습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이나 유물 그리고 유적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부모의 묘소를 쓰는 행위에서도 엿 볼 수 있다. 대다수 후손들은 조상의 묘소가 후대 자손의 발복을 위한 의례 정도로 생각하는데 그 근원은 부모가 사후에도 유택에서 편안한 생을 이어갈 것을 바라는 마음에서 좋은 자리를 찾는 것이다. 이는 무덤이 죽음을 맞이하는 공간으로서 장소가 아니라 생활의 공간이란 의식을 하는 것이다. 성묘를 하는 의례가 부모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찾을 수 있다. 공자가 말하였다.    

“옛날 훌륭한 임금은 아버지를 효도로 모셨기 때문에 하늘을 관찰하는 데도 밝았고, 어머니를 효도로 모셨기 때문에 땅을 살피는 데도 밝았다. 어른과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공순하였기 때문에 위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잘 다스려졌다. 하늘과 땅을 잘 밝히고 살피면 신명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비록 최고 지도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존경해야 할 분이 있다. 바로 부모가 계심을 말하는 것이다. 반드시 우선해야 할 분이 있다. 바로 형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조상의 사당에 공경을 다하는 것은 부모를 잊지 않은 것이다. 몸을 닦고 행실을 삼가는 것은 선조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서이다. 조상의 사당에 공경을 다하면 선조의 영혼이 나타나 감응한다. 이는 효도와 우애의 지극함이 신명에 통하고 세상에 빛나서 통하지 않는 데가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시경』에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서쪽에서나, 동쪽에서나, 남쪽에서나, 북쪽에서나,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다.’”    

정조의 ‘효’를 통한 통치이념-백성을 직접 만나는 능행길    

정조의 능 행차는 단순히 사도세자 능을 참배하는 효의 표현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백성들을 직접 만나는 기회로 삼았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행길에서 많은 백성들을 만났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백성들에게 자애로운 아버지 (君主)라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다시 말하면 정조는 백성들과 거리를 좁히는 데 전력을 다하였고, 사망 직전까지도 백성들의 일반 민원사항을 직접 보고 판결할 정도였다. 이런 정교(政敎)는 백성의 부모로서 군주의 위상을 확보하는 ‘효치(孝治)’의 실천이다. 동시에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 신하들과의 토론과 대화를 통해 다양한 문제 해결을 고민하였다.

이와 같은 모습은 서학[천주교]의 유입으로 성리학적 이념의 붕괴에 대한 고민과 청으로부터 유입되는 자유주의적 사유를 경계하고 있다. 정조가 취한 ‘문체반정’ 정책과 그가 아끼던 박지원의『열하일기』에 대한 인쇄불허에서 알 수 있다.     

요즘 사대부들은 평소에 의리 공부를 게을리 한다. 그러니 어찌 식견이 높고 지성인다운 사람이 나올 수 있겠는가? 관직에서 일을 처리할 때 갑자기 의외의 일이 발생하면 한편으로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남들 하는 대로 대충 따라 하기만 한다. 그렇게 살아온 그들의 반평생을 곰곰이 살펴보면, 모두 부산스럽고 혼란한 곳으로 떨어져 그런 폐단에 빠지게 되고, 결국 조그마한 일 하나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게 된다. 사대부의 기풍이 무너지고 나약한 것이 요즘처럼 심한 때가 없었다.

사람들은 인재난이 지금처럼 심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 사대부들의 풍기는 실로 한심한 지경이다. 경전의 뜻을 풀이할 때는 구두를 분간하지 목하고, 문장을 할 때는 대강 어물쩍거리며, 언행은 조금도 삼가 하지 아니한다. 몸 가짐이 방자하여 예의에 어긋나도 고칠 줄 모르고 입을 열면 말이 천박하며, 안락하게 지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지도 알지 못하여, 마침내 고칠 수가 없는 풍속을 자아내었다. 이는 실제로 지로하여 이끌어 주지 못한 데 그 이유가 있으니, 나는 매우 부끄럽다. 그러나 정말 이를 고칠 수 없을까? 먼저 너희 측근들이 서로서로 힘쓰고 격려하여 이러한 풍습을 온전하게 혁파한다면, 멀리 있는 신하들도 그것을 보고 느껴 반드시 몇 년 안에 효과가 있을 것이다.     

정조는 효의 개인적 기능인 자신과 부모에 대한 효성을 넘어 사회로 더 나아가서는 정치로까지 확대했다는 점에서 정조의 효 사상을 단순하게 효치로만 바라보기에는 미흡한 면이 있을 만큼 효에 대한 확고한 정신을 가지고 정치를 하였음을 볼 수 있다. 선친을 추존하고 능침천봉과 화성건설 그리고 화성행궁에서의 진찬례 등 정조의 행위 하나하나가 당대 백성들에 대해 모범을 보이는 것으로, 즉 교화의 중심이요, 주체였다는 것은 그의 효사상이 가족제도를 비롯하여 정치제도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혼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우리 사회에 많은 시사를 하고 있다 하겠다. (삼국유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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