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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한명의 자녀를 둔 엄마의 소박한 꿈

문용대 | 기사입력 2018/02/14 [06:42]
설날 앞둔 다문화가정의 실상과 애환

열 한명의 자녀를 둔 엄마의 소박한 꿈

설날 앞둔 다문화가정의 실상과 애환

문용대 | 입력 : 2018/02/14 [06:42]

설날 앞둔 다자녀 다문화가정의 실상과 애환
    

우리 민족 고유의 설 명절을 앞두고 고향에 다녀오기 위해 많은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명절 때가 되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기분이 들뜨게 됩니다.     

그러는 사이 말 못 할 어려움을 겪고 있을 사람이 생각납니다. 13년 동안 고향에 가지 못하고 앞으로 언제 갈 수 있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난 해 열한 명의 자녀를 둔 가정 이야기를 듣고 그분들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 가정은 한국 남성과 일본 여성의 국제가정입니다. 소위 다문화가정이지요. 수소문 끝에 서울에 사는 신성훈(가명, 47세)씨의 부인 전다혜(가명, 46세)씨와 통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9월 아기들이 잠자는 오전 시간에 집을 방문했습니다. 전씨를 만나고 나서 그분과 자녀들 생각이 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집안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나는 오래 전 직장에서 일할 때 신입사원 교육하던 일이 생각납니다. 나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아이 둘만을 낳아 키웠습니다만, 독일 등 선진국의 출산장려 제도를 소개하면서 정부 정책과는 달리 출산을 장려했습니다. 그 당시는 ‘아들딸 구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가 이미 옛것이 되었고,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이라는 표어가 유행일 때입니다.     

남아선호사상 때문에 딸을 낳으면 아들을 또 낳으려 하다 보니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라는 또 다른 표어가 생겨났습니다. 산아제한을 하기 위해 예비군 훈련 때 피임수술을 하면 훈련을 면제해 주기도 했지요. 심지어 정부에서는 세 아이 이상을 두면 1,000만 원 이상의 벌금을 물게 하고, 셋째 자녀부터는 건강보험 혜택도 받지 못하게 했습니다. 정부의 이런 산아제한 정책이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정도가 아니라 기가 찰 노릇이지요.    

점점 심해지는 인구 감소와 노령화가 우리나라뿐 아니라 많은 나라의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지금, 다자녀 출산은 미래를 위해 최우선적으로 권장돼야한고 봅니다. 애국하는 방법이 많겠지만 다자녀 가정이야말로 그 어떤 애국운동 못지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열 한 명의 자녀를 둔 가정 이야기를 나는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그 가정에 도움이 되게 할 방법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실 열 한 명의 자녀 가정에 도움이 될 방법은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전씨는 가정 이야기의 노출을 꺼립니다. 개인적으로 도움을 주던 소방공무원 때문에 4~5년 전 잠깐 TV와 신문에 소개된 적이 있을 뿐 취재 요청을 거부해 왔다고 합니다. 전씨 자신도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흥미로운 가십거리가 될 뿐, 오히려 지탄을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 역시 그분들의 뜻을 왜곡시킬까봐 기사화되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가까이 지내는 사람조차 이해하지 못하더라.'는 말을 듣고 보니 또 다른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설 명절을 앞둔 다문화 다자녀 가정의 애환을 수필가 문용대 기자가  전해준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없는 다문화 설 명절 체험행사 장면.     

전씨는 신씨와 1995년 결혼 후 1996년부터 한국에서 살아 우리말을 사용하는 데 불편을 느끼지 않습니다. 반지하인 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집안이 어두웠고 밖을 향해 선풍기와 제습기를 틀어 놓았지만 습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장마철에 빗물이 들어오지는 않는지 물었더니 다행히 그렇지는 않다고 합니다. 좌우 통로에는 옷들이 걸려 있는 게 아니라 가득 쌓여 있습니다. 나는 의류 사업이라도 하는 줄 알았습니다. 들어 보니 이곳저곳에서 보내 온 옷인데 계속 자라는 애들에게 입혀야 하기도 하지만 자녀 4~5명일 때 입힐 옷이 없어 너무 힘들 때를 생각하면 도저히 버릴 수가 없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많이 낳았는가요, 부부가 미리 많이 낳기로 계획을 했습니까?"라고 다짜고짜 질문을 했더니 전씨는 짧은 한숨을 쉬고 나서 말을 이었습니다. "저는 피임을 시도했지만 몇 번째 실패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운명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주시니 받아야지요." 그분들은 슬하에 5남 6녀, 열 한 명의 자녀를 두고 있습니다. 주위에 잘 아는 사람들까지 아기 많이 낳는다고 나쁘게 말을 많이 해 자녀가 6~8명일 때까지는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죄인처럼 지냈으나, 그 후로는 '아이들을 많이 낳는 것이 맞는 것이다. 틀린 것이 아니다. 죄인은 더더욱 아니다'라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합니다.     

건강은 어떠냐는 질문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학생 때나 미혼 때 수영, 탁구, 테니스, 배구, 럭비 등 안 해본 운동이 없을 정도로 운동으로 다져져 체력이나 인내심이 남보다 월등히 좋았습니다. 그런데 셋째 아이를 낳은 후 지금까지 몇 차례 자연유산과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해왔던 탓에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어요. 저는 출산을 10번 했는데 평소에는 바빠서 고향을 생각도 못 하다가 임신 때마다 입덧이 심해 먹지 못하고 힘들 때는 고향 생각이 나서 많이 울었습니다. 남들은 내가 아기를 쉽게 낳는 것으로만 알아 야속한 생각이 들어요. 건강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대화를 하고 있을 때 한 아기가 잠에서 깼고, 조금 후 또 다른 아기도 깼습니다. 그들은 지난해 2월에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엄마가 한 아기를 안은 사이 내가 다른 아기를 안아주었습니다. 아기한테서 땀 냄새가 많이 나는 것만 보아도 엄마가 얼마나 힘들까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오전에 늘 엄마가 혼자 아기들 목욕을 시켰지만, 너무 힘들어 요즘은 셋째아이에게 시키는 때가 많아졌다고 합니다. 이날 오후에도 셋째가 와서 목욕을 시킬 것이라고 합니다.     

남편 신씨는 계약직 승용차 운전사로 230~250만 원의 월급을 받다가 최근 정식 직원이 되면서 월급도 300여만 원으로 올랐다 합니다. 전씨는 쌍둥이가 운을 가지고 태어난 것 같다며 기뻐합니다. 다자녀라는 이유로 직장에서 몇 차례 해고를 당했지만 다시 어렵게 일자리를 찾았다고 합니다. 아마 자녀에게 장학금으로 돈이 많이 지급돼야 하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지원받는 것과 관련해 물었습니다.     

"다섯째까지는 지원받은 것이 없었고, 여섯째부터 3명 이상에게 주는 출산장려금 30만 원을 받았어요. 지난해 제왕절개술로 쌍둥이가 태어났을 때는 출산장려금으로 각 500만 원을 받은 것이 큰 힘이 됐습니다."  

살고 있는 집은 보증금 1천만 원에 월세 40만 원짜리인데 다행히 월세 40만 원은 동 주민센터 지원금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기 젖이 모자라 열한 명 모두 모유를 못 먹이고 분유로 키웠다고 하니 모유 값 그리고 기저귀 값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습니다. 열세 명의 식구, 그 중 다 자란 청소년기에 들어 선 아이들이랑 먹는 쌀값과 부식비는 얼마나 많이 들 것이며, 그 밖 사소하게 들어가는 액수에 비해 300여만 원의 월급으로 생활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것입니다. 사교육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 어느 학교 식당에서 배식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평소 늘 그랬듯이 일이 끝나자 말자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뛰어 다녀야 하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고 합니다.     

일손이 모자라 늘 속상하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들 양치질이라도 정성껏 잘 해주고 싶지만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또 아쉬운 것은 뮤지컬을 좋아해도 비싸서 보여주지 못하고, 주말에 가족이 함께 놀이동산이나 어린이대공원에 가서 작은 추억이라도 남겨주고 싶은 소박한 꿈조차 이뤄주지 못하는 아쉬움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 가정에 대해 더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소관 동 주민센터 주민복지팀장과 대화를 했습니다. 그 분은 세 차례나 전씨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어 어려운 일본 이름도 외우고 있고 사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복지팀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와 희망적인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출산장려금을 지원해 주었고 현재 월 40만원이 주거비로 지원되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많이 어렵습니다. 자력으로 온 식구가 전씨의 일본 고향을 다녀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야지요. 그래서 전씨의 소박한 꿈인 아이들의 외가를 다녀오게 하는 방안을 앞으로 강구해 보겠습니다.”    

친목 모임에서 일본에 갈 예정이라는 나의 말을 들은 전씨는 "좋겠습니다" 하면서 눈시울을 붉히는 듯했습니다. 그의 친정아버지가 2005년에 돌아가셨는데, 그때 고향에 갔다 온 후 13년이 지난 지금까지 못 갔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방학 때 엄마 고향엘 가고 싶어 해도 가지 못하고 지냅니다. 내가 보기에 이 가정의 시급한 문제는 아이들이 커가기 때문에 지금의 집에서 생활하기에는 한계에 달해 넓은 곳으로 옮겨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살고 있는 집은 공부(公簿)상 20.5㎡(6.2평)로 돼 있으나 중개했던 부동산중개사에게 확인한 결과 반 지하 두 집을 합쳐 18평정도의 집에 열세 명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식구가 살 집을 찾기가 쉬운 일이 아닐 것이기에 큰 걱정입니다. 이 가정에 대한 근본적 문제는 앞서 나로서는 감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우선 소박한 꿈인 아이들이 오페라라도 관람할 수 있고, 다가오는 방학 때나 명절 때 아이들의 외가인 전씨의 일본 고향에 남편 신씨와 자녀들이 함께 다녀오게 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용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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