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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승무 목사의 ‘일상 속 묵상’
本心卽真心, 真心卽本心 (본심즉진심, 진심즉본심)
“조건 없는 나눔과 형제애를 교회 현장에서 구현해야”
기사입력: 2018/03/07 [08:24]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하승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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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혼돈(混沌)의 시대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한국사회는 참으로 ‘혼돈(混沌)의 시대’입니다. 정(正)과 속(俗)의 혼돈, 실제와 사실의 혼돈, 의와 불의의 혼돈, 모든 것이 혼돈의 도가니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인간관계도 말 그대로 혼돈입니다. 성폭행, 성추행이 난무하고 죽마고우가 적이 되고 스승과 제자가 원수 되고 법조문의 허점을 교묘히 악용하여 어떻게 하면 상대를 속여서 이득을 취할까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사악함이 발악의 극치를 달리는 모양새입니다.
▲ First Two Days of Creation(Genesis 1: 1-8) by William de Brailes(좌) Chaos. State 1. by Wenceslaus Hollar(우)     

얼마 전에 친한 목사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자주는 못 만나지만 벌써 23년이라는 세월을 호형호제하며 함께해온 분입니다. 그런데 오래 전에 제가 목사가 되고부터 어느 날 존칭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형님 목사님! 우리 옛날처럼 편하게 지냅시다’했더니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시냐! 했더니, 이제는 목사님인데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저는 그래도 옛날처럼 격이 없이 지내고 싶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면 저는 앞으로 형님 목사님을 만나기가 좀 부담스럽습니다. 그것이 좋겠습니까? 라고 되물었습니다. 저의 말이 정말 진심인줄 알고 공적인 자리 외에는 예전처럼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 형님 목사님과 저는 호칭뿐만 아니라 어떤 의견으로 인해서 서로를 오해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 온 탓도 있지만 서로의 본심이 무엇인지, 진심이 무엇인지 잘 알기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서로를 이해합니다. 제가 택배로 선물을 받고도 바쁜 나머지 감사하다고 연락을 못해도 오해를 하지 않습니다. 문자나 카톡 답장을 제대로 못해도 그러니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형님 목사님과 저는 서로의 본심(本心)을 잘 알기에 매사에 오해 없이 진심(眞心)으로 상대를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이 형님 목사님 외에도 한 분을 더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가 목사과정을 마치고 전공 분야의 신학과정 중에 있을 때 전공 교수님은 아니었지만 인격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스승님 중에서 ‘이승미’ 교수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 교수님은 제가 존경하는 몇 안 되는 분 중에 한 분입니다. 제가 잘나가는 목사가 아닌지라 스승님 내외분을 잘 섬기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교수님은 늘 제자를 위해 기도를 아끼지 않습니다. 스승님은 형님 목사님과 반대로 꼬박꼬박 저에게 존칭쓰는 것을 고집합니다. 편하게 하대를 해도 좋은데 참으로 몸들 바를 모를 정도로 대해주시니 민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두 해 전인가 설이 다가오자, 한번은 인터넷 주문으로 과실 배를 보내드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 배달되었던 것입니다.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제자가 미안해 할까봐 그 당시에는 전혀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또 한 번은 사모님이 당뇨인지라 혼합잡곡을 구매하여 한번 보내드렸는데, 저희 집에서도 같은 것을 주문해서 지어놓은 밥을 먹고 나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냥 먹을 정도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뵐 때마다 언짢은 내색 없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제자 목사를 따뜻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사회적인 관계에서는 선물 한번 잘못하면 인간관계는 물론 원수 되기가 십상입니다. 스승님의 경우였다면 오해를 해도 수백 번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님은 오히려 제가 어떤 대가와 상관없이 성경의 교사(Theologian)로서 가르치는 직무를 묵묵히 해 나가는 것을 아주 대견해 하시며 박사과정도 어렵게 마친 것을 아시고 한 학기라도 학비를 도와주지 못한 것을 늘 미안해 하셨습니다.     

평소에 교수님은 은퇴 이후 매월 받는 사학연금을 쪼개어 개척 교회하는 제자들 교회를 돌아가며 헌금하시고 제가 방문이라도 할 때면 매번 차비하라고 바지주머니에 찔러주시니 천안을 지나칠 때마다 뵙고 싶어도 오히려 뵙는 것이 송구할 정도입니다.   

저는 사회단체 활동을 오랜 세월 해 본지라 종교와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왔습니다. 단체의 장도 해보고 임원도 여러 번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고 나서 목회자 사회에 들어와 보니, 역시 이곳도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 마찬가지구나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제 성깔이 조금 까칠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역시 이 사회도 이해관계가 많이 작용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참으로 행복한 목사입니다. 늘 곁에서 지켜봐주시는 나의 예수, 나의 그리스도이신 주님이 계시고 비록 큰 교회 담임목사가 아니어도 혈육 그 이상으로 서로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해 주고 상대를 배려해 주는 스승님과 선후배 동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 유대인의 피의 연대와 형제애    

저는 유대인들에게 딱 한 가지 부러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고요? 혈통을 중요시한 끈끈한 연대입니다. 유대교는 아직까지도 ‘이스라엘’이라는 선민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선민사상’의 핵심은 야훼 하나님께서 여러 민족 중에서 그들 민족만이 선택했다는 사상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시대뿐만 아니라 영원히 유대민족을 특별히 선택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유대사회는 과거의 ‘신앙적인 의미가 함께 포함된 혈통’보다는 ‘유대인’이라는 ‘생물학적인 혈통’을 더 중요시 여기는 것 같습니다. 민족과 국적은 달라도 가계(家系)에 유대인의 ‘피’가 섞여 있다면 유대인으로 간주하여 해외 어느 지역에서든지 해당 국가의 유대협회에 도움을 요청하면 형제애로 조건없이 도와줍니다. 언어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지만 도움을 받은 유대인들은 어느 지역에서나 자리가 잡히면 해당지역 유대협회에 정기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경우에는 모두가 발 벗고 나섭니다.     

성경에 계시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이 지구상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유대민족을 어는 시점에 이르렀을 때 그들을 먼저 선택하시고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타락한 모든 민족을 향한 구원의 계획을 실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목적을 성취하시고자 하나님의 품에서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꺼이 십자가의 희생물로 삼았습니다. 창세기로부터 계시된 이 복음은 모든 종족의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승천을 통하여 구원의 완성과 영원한 복락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리스도교와 유대교가 건너뛸 수 없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유대교는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말라기까지 시간, 장소, 시대를 초월하여 일관되게 지속적이고도 반복적으로 계시되어 이 땅에 성육신하신 ‘그’ 예수가 ‘그리스도이자 인류의 메시아’이심을 완강히 부인하고 거부해 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유대민족만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선민사상’을 굳게 믿고 있기에 구약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논리를 갖고 있습니다. 유대교는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여 적용함으로서 ‘혈통주의’에 따른 유대인이라는 피의 연대를 무엇보다 중요시합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은 민족과 인종을 가리지 않고 ‘골육지친(骨肉之親)’ 처럼 서로 나누며 도와줍니다.    

3 오순절 성령 강림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교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승천 이후에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에 따라 베드로와 열 한 사도는 성령의 오심을 고대하는 가운데 실제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한 날에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뿐만 아니라 여러 민족,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삼천이나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행 2:41)   
▲ 천장에 오순절 성령강림을 표현한 모자이크(Cathedral Basilica of St. Louis in Missouri)  

이 때 주님의 약속대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드디어 ‘성령 하나님’이 강림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앞으로 그리스도 신앙공동체의 삶의 자세와 지침에 대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이는 교회의 본격적인 출발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시인하는 복음의 계승자들은 유대교의 혈통주의나 인간의 유전(遺傳)이 아니라, 민족과 인종을 초월한 ‘영적 이스라엘’의 백성들로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고 하신 주님의 명령은 그리스도 신앙공동체 안에서 삶으로 어떻게 실행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사도행전 2장)    

물론 사도행전 2장 44절 45절에 나타난 본문을 문자적으로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의미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혈통주의’ 그 이상으로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명까지 내어주신 주님의 핏값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는 모두가 빚진 자입니다. 주님께 생명을 빚진 우리는 조건 없는 나눔과 형제애를 교회 현장에서 구현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공동체요,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의 ‘지상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세속화된 현대교회 안에서는 사도행전의 나눔의 정신과 실제적인 모범은 형식적인 활동과 행위로만 남아 있습니다. 혈통주의에 근거한 유대교의 ‘피’의 연대와 형제애에조차도 근접하지 못하는 종교적 방편에 의한 행위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나눔과 봉사’의 성경의 진정한 의미는 도덕적 행위 수준으로 하락하고만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움으로 회복하는 것’은 하루속히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실현된 ‘사도행전의 나눔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의 정신으로 하루속히 회귀하는 것만이 세속주의에 물들어 있는 현대교회가 정통 그리스도교로, 개혁된 교회로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세상 논리에 짓눌린 주님의 자녀들이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물심양면으로 참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 내야 하는 것이 현대교회를 향한 주님의 뜻이자, 명령인 것입니다. 끝.    

기도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생명까지 기꺼이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이 뼈에 사무치게 하옵소서! 이 땅에서나 천국에서나 사람의 제일된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주님 나라 가는 날까지 교회를 통하여 지상 천국을 이루어 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나이다. 아멘!    

* 하승무 목사는 한국예수교장로회(OPCK) 기관 목사이자, 시인이다. 현재 한국장로회신학교 역사신학 교수로 봉사하고 있다.<kpts@kpt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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