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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참된 의미와 깨달음
생활속의 ‘색즉시공 공즉시색’…깨달음과 실천은 어떻게?
기사입력: 2018/04/05 [08:32]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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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의 ‘색즉시공 공즉시색’…깨달음과 실천은 어떻게?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불교경전 ≪반야심경≫에 나오는 명구(名句)로, 물질적 세계와 평등무차별한 공(空)의 세계가 다르지 않음을 뜻한다. 원문은 ‘색불이공공불이색(色不異空空不異色)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며, 이는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로 번역된다. 범어(梵語) 원문은 ‘이 세상에 있어 물질적 현상에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실체가 없기 때문에 바로 물질적 현상이 있게 되는 것이다. 실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물질적 현상을 떠나 있지는 않다. 또한 물질적 현상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부터 떠나서 물질적 현상인 것이 아니다. 이리하여 물질적 현상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다. 대개 실체가 없다는 것은 물질적 현상인 것이다’로 되어 있다.

이 긴 문장을 한역(漢譯)할 때 열여섯 글자로 간략히 요약한 것이다. 따라서 색은 물질적 현상이며, 공은 실체가 없음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원래 불교에서는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사고방식을 지양하고 이와 같이 평등한 불이(不二)의 사상을 토대로 하여 교리를 전개시켰다. 따라서 중생과 부처, 번뇌와 깨달음, 색(色)과 공(空)을 차별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대립과 차별을 넘어선 일의(一義)로 관조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 명구 또한 가유(假有)의 존재인 색 속에서 실상을 발견하는 원리를 밝힌 것이다. 그리고 색과 공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여 색이 변괴(變壞)되어서 공을 이루는 현상적인 고찰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색의 당체(當體)를 직관하여 곧 공임을 볼 때, 완전한 해탈을 얻은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불교의 전통적인 해석방법이다.

이 구절에 대한 고승들의 해석은 많지만, 가장 명쾌하고 독창적으로 해설한 이는 신라의 원측(圓測)이다. 원측은 그의 『반야바라밀다심경찬(般若波羅蜜多心經贊)』에서 유식삼성(唯識三性)의 교리에 입각하여 이 구절을 해석하였다.

원측은 색즉시공에 대하여, “변계소집(遍計所執)은 본래 없는 것이므로 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은 마치 허깨비와 같은 것이어서 인연 따라 일어나는 까닭에 공이다.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생겨나지 않는 것이므로 마치 공화(空華)와 같고 그 자체가 또한 공한 것이다.”하였다. 다시 말하면, 변계소집에 의하여 일어난 색은 본래 없는 것을 망념으로 그려낸 것이기 때문에 공하다는 것이고, 의타기성에 의하여 생겨난 색은 인연 따라 존재하고 멸하는 가유(假有)의 색이기 때문에 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원성실성의 입장에서 보면 색이란 일어남도 일어나지 않음도 없는 공의 본질이기 때문에 역시 공하다는 뜻이다.

원측은 계속하여 색과 공이 하나인가 다른 것인가를 밝히면서, 만약 하나라고 하면 일집(一執)에 빠지게 되고 다르다고 하면 이집(異執)에 빠지게 되며, 하나이면서 다른 것이라고 하면 서로 위배되는 것이 되고, 하나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라고 하면 희론(戲論)이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 명구의 가르침은 색이나 공에 대한 분별과 집착을 떠나 곧바로 그 실체를 꿰뚫어보라는 데 있다.

‘색즉시공’을 근본삼아 ‘공즉시색’ 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핵심사상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계는 자성이 없는 허상의 세계이지만 인연으로 인해 분명히 존재하는 세계이므로 집착 없이 최선을 다하여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비록 여덟 글자밖에 안 되는 짧은 구절이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불법(佛法)의 핵심을 놓치게 되어 수행하는 데 있어 많은 혼란을 겪게 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조사 어록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달리 표현한 말이다. 이 말의 의미는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서 산과 물이 없어지거나 혹은 산과 물이 서로 뒤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어 차별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육신이 몸담고 있는, 차별지(差別地)인 이 세상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수행자는 세상의 공한 이치만을 깨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공한 세상을 열심히 사는 방법 또한 깨치도록 노력해야 한다.

색즉시공은 이 세상이 실체가 없는 허상이므로 중생들이 세상사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는 가르침이며, 공즉시색은 비록 공한 세상이지만 집착이 없이 열심히 세상을 살도록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가르침이다. 하지만 역대의 많은 조사들은 색즉시공을 주로 보여주었을 뿐 공즉시색까지 잘 보여주지는 않았다. 즉, 출가하여 산속에서 수행하면서 속세에 대한 집착을 놓는 모습은 보여주었지만 세상 속에서 중생들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을 구제하는데 대승 수행자의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다. 이러한 치우침은 불교가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 많은 조사들이 색즉시공만 강조한 이유는 중생이 세상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세상의 공(空)함을 강조하여 그 집착을 조금이라도 놓게 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중생에게 공즉시색까지 가르칠 경우 색즉시공의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공즉시색만을 마음에 새겨 세상사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사들의 이러한 반쪽 가르침은 결국 소승적 수행으로 치우치는 원인이 되었다.

대승불교의 핵심은 색즉시공을 근본으로 삼아 공즉시색하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이 허상임을 깨치면서 동시에 집착 없이 세상을 위하여 열심히 사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 곧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 바로 대승불교의 핵심이다. 따라서 색즉시공 뿐만 아니라 공즉시색까지 가르쳐야 불법(佛法)을 온전히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현실을 외면하면서 도피하는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종교가 된다. 세상 속에서 중생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면서 세상을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이 바로 대승불교이지만, 공즉시색의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이를 현실에서 실천하는 데 있어 수행자들은 큰 혼란을 겪게 된다.

경전에서 차별심을 버리라고 한 것은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다. 진리의 세계, 즉 깨달음의 경지에 가기 위해서는 양단(兩端)을 놓아야 하므로 차별심, 분별심은 물론 최후의 인식마저도 놓아야 한다(一亦莫守). 왜냐하면, 깨달음의 경지는 양단의 견해를 초월한 절대 평등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진리의 세계가 아니요, 업보로 인하여 생겨난 차별의 세계이다. 따라서 수행자는 그 누구보다 이 세상과 차별상을 명확히 구별해야 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차별하되 차별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근본적인 입장에서는 본래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자와 여자를 분명히 구분하고,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분명히 구별하여 상황에 맞게 행동하되 마음속에 차별이 남아있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차별심 없이 세상을 사는 대승불교의 가르침이다. 결국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위하여 열심히 사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생활 속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불교 경전은 팔만사천에 달한다. 그걸 270자로 요약한 게 ≪반야심경≫이다. 그래서 불법의 골수가 반야심경에 다 들어 있다고 한다. 그런 반야심경도 여덟 자로 요약한 것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색은 뭐고, 공은 또 뭐야?”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 주로 이런 반응이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은 더 황당하게 생각한다. “역시 불교는 너무 어려워.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없잖아.”과연 그럴까. 살아있는 물고기를 손에 쥐면 어떻게 될까? 펄떡펄떡 뛴다. 마찬가지다. ‘색즉시공 공즉시색’도 펄떡펄떡 뛰면서 ‘슉슉’하고 숨을 쉬는 단어다. 살아있단 뜻이다. 이제 두 손으로 그 ‘물고기’를 잡아보라. 그리고 나의 일상을 향해 ‘휘~익!’ 던져보라. 지지고 볶는 일상 속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들여다볼까.


#풍경1 - 먼저 ‘색즉시공’이다. 바쁜 아침 출근길, 옆차가 느닷없이 끼어든다. “빠~앙!”하고 경적을 울린다.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온다. 그 화가 바로 ‘색(色)’이다. 그런데 색을 붙들면 항상 나만 괴롭다. 게다가 ‘옆차도 분명 급한 이유가 있겠지’란 생각도 든다. 그래서 브레이크를 밟고 양보를 해준다. 순간 화는 사라졌다. 어디로 갔을까. ‘공(空)’으로 들어간 것이다. 색이 공이 되는 순간이다. 그게 ‘색즉시공’이다. 컴퓨터로 따진다면 일종의 ‘포맷’이다.그러면 이런 질문이 들어온다. ‘왜 포맷을 해야 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화가 난 마음을 계속 붙들면 어떻게 될까. 회사에 가서, 점심을 먹고, 퇴근할 때까지 ‘아침의 짜증’을 안고 있다면 ‘색즉시공’이 될 수가 없다. 왜일까? 내가 계속 ‘색’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색’이 쌓이고 쌓여서 나의 업(業)이 된다.그래서 ‘툭! 툭!’ 내려놓는다.


출근길의 짜증뿐만 아니다. 칭찬 후의 뿌듯함도, 이별 뒤의 아쉬움도, 성공한 뒤의 자만심도 ‘툭! 툭!’내려놓는다. 그렇게 마음이 포맷될 때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출렁이는 창조의 바다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다. 다시한번 볼까. “탁!”하고 화를 내려놓는 순간을 들여다보라. 더 이상 ‘옆차’에 마음이 묶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공간이 생긴다. 이젠 어떠한 마음도 일으킬 수 있는 창조의 공간이 내 안에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포맷한 마음의 자리가 ‘공’이다.    

#풍경2 - 그러면 ‘공즉시색’은 뭘까. 간단하다. 공(空)이 색(色)으로 화(化)하는 것이다. ‘지지고 볶는 마음’이 아니라 ‘포맷된 마음’에서 생각과 행동을 내는 것이다. 거기에는 출근길의 짜증, 부부간의 말다툼, 아이의 성적표를 보고 난 실망감 등으로 인한 연쇄 파도가 없다. 짜증의 연장선이 아니라 내게 정말 필요한 마음을 골라서 쓰는 것이다.

‘오늘 회의에선 어떤 아이디어를 낼까?’ ‘올해 명절 부모님 선물로 뭐가 좋을까?’ ‘어제 다퉜던 직장 동료에게 어떻게 사과하지?’ 결국 출근길의 생산성이 달라지는 것이다. 출근길뿐만 아니다. 나의 하루, 나의 일상, 나의 삶에 대한 생산성이 달라지는 것이다. 온갖 색깔과 모양으로 마음을 그리고, 다시 백지로 돌아가고, 다시 마음을 그리고, 다시 백지로 돌아가고. 그렇게 창조와 포맷, 창조와 포맷을 거듭하며 마음을 굴리는 일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자연을 보라. 저 앞의 나무와 새, 바람과 구름, 산과 들도 매 순간 색으로, 또 공으로, 색으로, 또 공으로 몸을 바꾸며 존재한다. 그래서 겨울이 간 자리에 봄이 오고, 봄이 간 자리에 여름이 오는 것이다. 이 거대한 우주가 그렇게 숨을 쉰다. 그 호흡법이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문윤홍·시사칼럼니스트·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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