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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현 취재수첩●波瀾萬丈 충무공 이순신 삶과 현충사
4월 28일 이순신 탄신일 맞아 되돌아보는 충무공 일생
기사입력: 2018/04/09 [08:15]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황광현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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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 점령 증표로 식재된 신위대가 현충사에 버젓이....
 
충남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방화산 기슭에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의 영정을 모신 현충사(顯忠祠)가 자리 잡고 있어 나라 사랑 정신과 위엄이 풍긴다. 공(公)은 서울 건천동(중구 인현동, 현재 명보그장 부근)에서 출생하여 10살 되던 해 아산 외가로 내려와 21살에 보성 군수 방진의 따님과 혼인하여 살던 옛집이 있다. 이곳에서 십 년 간 무예를 연마하여 서른 두 살 되던 해(1576년, 선조 9년)에 무과에 급제했다. 충무공 이순신 탄일인 3월 8일 음력을 1945년 광복 후부터 양력으로 환산 매년 4월 28일은 국가 기념일로 지정하여 다례를 올렸다. 돌아오는 탄일은 제473주년 째이다. 공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 후 왜란 상황에 대해 선조와 조정이 염려하자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함이 남아 있습니다’로 화답하였던 파란만장한 삶을 되돌아 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명가도(征明假道)    

조선중기는 국방문제에 당론의 차이로 힘 있게 추진되지 못하고 있을 때 일본의 정부는 조선과 정반대로 흐르고 있었다. 백여 년 간에 걸친 전국시대의 혼란이 도요토미 히데요시[風神秀吉]에 의해서 수습됐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는 지방 세력가인 다이묘[大名]들의 관심을 밖으로 분출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조선과 대륙을 정복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지배자가 되려는 야욕을 품게 됐다. 일본은 조선의 침략에 앞서 정탐꾼(승려)을 보내어 산천과 정치정세에 대한 정보를 세밀하게 수집하며, 서양의 총포술을 도입하여 개량한 조총(鳥銃)으로 군사들을 무장시켰다. 이어 일본은 조선침략의 구실로 명나라를 치러가는 데 필요한 길을 빌리고자 요청했다. 이른 바 정명가도(征明假道)이다. 조선은 물론 이러한 제의를 단호히 거절하자 이를 빌미로 일본은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 4월에 약 20만 명의 왜군이 부산을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발단됐다.    

왜군의 침략 작전은 육군과 수군이 동시에 진격하되 육군은 세 길로 나눠 북진하고, 수군은 남해와 서해를 돌아서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여 북진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본 수군은 경상도 해안 지역을 약탈하면서 전라도 해안을 향하여 접근해 오고이었다. 이 때 전라도 해안 경비의 책임을 맡은 이는 일찍이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운 바 있는 이순신(李舜臣)이었다. 공은 1년 전의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전라좌수사에 부임한 이래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을 예견하여 수군을 훈련시키고 무장을 갖추며, 군량미를 저장하여 두었다. 특히 그는 돌격선의 필요를 절감하여 조선초기에 만들어졌던 거북선[龜船]을 개량하여 재건하였는데 왜군과의 해전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조선 수군은 배의 성능과 대포의 성능에서 왜군을 능가하였으며, 화공술이 뛰어나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유교의 충의정신이 나라사랑 주춧돌 구실    

해전에서 잇단 승리와 때를 같이하여 육지의 사방에서도 나라에 대한 충의를 걸고 싸울 의병(義兵)이 일어나 자발적으로 부대를 조직하여 향토방위를 위해 일어났다. 이 자발적인 무장부대는 농민이 주축였으나, 그들을 조직하고 지도함은 전직 관료와 사림 또는 승려들이었다. 의병의 신분 구성이 다양하듯이 그 사상적 기반도 다양하였지만, 유교의 충의정신이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유교의 발전됨이 국방을 소홀히 한면도 있지만, 국민들에게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배양하여 그 저력이 서서히 들어났다. 의병들은 향토지리에 익숙하고 향토조건에 알맞은 무기와 전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적은 병력으로 대군과 적대하기 위해서 정면 충돌보다도 매복•기습•위장 등과 같은 유격전술을 많이 써서 왜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특히 유학이 발달한 남부지방이 가장 의병 투쟁이 강하였다.    

한편 수군에서도 이순신으로 하여금 전라도•경상도• 충청도의 삼도수군통제사를 맡게 하고 군비를 증강시켰다. 그러나 공은 일본간첩의 농간으로 모함을 받아 파직되고, 원균(元均)이 그 직을 대신하여 부산쪽으로 진격하다가 칠전도와 고성(固城) 앞바다에서 대패했다. 다급해진 선조와 조정으로부터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여 12척의 적은 함선을 이끌고 서해로 향하는 313 척의 왜선을 명량(鳴梁, 해남군)에서 대파하였다(1597년 9월 15일). 육지와 바다에서 참패를 당한 왜군은 전의(戰意)를 잃고 패주하여 남해안 일대에 몰려 있다가 마침 도요토미가 죽자 그를 핑계로 일본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독전 북소리가 최후의 진혼곡이었는가    

공은 1598년 11월 19일 새벽 노량 앞바다에서 왜선을 가로막고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독전 북소리는 도망가는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리라. 적의 유탄이 공의 왼편 겨드랑을 관통했다. ‘방패로 내 앞을 가려라 적이 내 죽는 것을 못 보게 해라.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향년 54세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임진왜란 7년간의 전쟁은 조선측의 승리로 끝나게 됐다. 일본은 영토를 얻은 것도 없고, 조선의 항복을 받아내지도 못했다. 전쟁의 초반에는 조선이 고전했지만 장기화되면서 국민의 잠재된 국방능력이 발휘돼 왜군을 압도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은 쪽은 조선이었다. 전국 8도가 전장으로 변하여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기근과 질병으로 쓰러졌다. 토지대장과 호적이 없어져 국가운영이 마비 상태에 빠졌다. 왜군의 방화와 약탈로 문화적 손실이 매우 컸다. 불국사와 경복궁, 서적, 기타 문화재가 소실되거나 약탈당했다. 그리고 수만 명이 포로로 잡혀가 나가사기[長崎]의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유럽 등 노예로 팔려갔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통하여 도쿠가와[德川] 시대의 일본문화가 성장하는 도약대가 됐다. 활자, 그림, 서적을 약탈하고, 이름 있는 선비들과 우수한 활자 인쇄공들을 포로로 데려가 성리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과 인쇄문화를 발전시켰다. 또 조선에서 데려간 도자기 기술자에 의하여 일본의 도자기 문화가 큰 발달을 보았다.     

조선 다음으로 큰 피해는 명나라였다. 만주의 여진족은 조선과 명이 전란에 시달리는 틈을 타 급속히 세력을 키워 명나라를 멸하고 중원의 지배자가 돼 청나라로 국명을 변경했다.     

임진왜란 중 이대(신위대)를 점령 증표로 식재    

공의 옛집 앞 뜰에는 꽃잎이 적색으로 8중 겹인 홍매(겹홍매화, Pruns glandulosa for. sinensis Koehne.)가 방문객을 맞이했다. 방긋방긋 웃는 자태로 꿀벌과 교감 하고, 화사한 꽃봉오리를 담으려는 사진작가의 몸놀림. ‘고결, 결백, 충실, 인내’의 꽃말 속에 공의 파란만장한 삶이 함축되는 듯 싶어 정감이 짙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런가. 현충사에서 바라 본 왼쪽의 통용문 밖에 넓이 1미터, 80여 미터 곡선 길 양쪽에 이대(신위대)가 정원수로 식재돼 있었다. 이대는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가 북진정책(한국수목도감 1987년)의 일환으로 왜군이 진격하면서 고을마다 점령 증표로 식재했다. 이대(신위대, Pseudosasa japonica Makino)는 일본이 원산지이다. 이는 우리 정서에 원치 않은 슬픔의 나무요, 현충사의 건립 취지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대(신위대)는 교체 정원수요, 또는 ‘과거의 한 때 아픈 역사가 있었다’는 안내 입간판을 식재된 이대 주변에 세워 교육적 활용이다. 이곳을 비롯하여 중부 이남의 유적지, 사찰, 공공기관 등 주변에 널리 이대가 식재되어 있는 현실이다. 이의 검토가 2세 교육을 위해 시급하지 않을까
(글•사진: 황광현 대기자)   
이대(신위대): 왜군 점령 증표로 식재된 신위대가 현충사에서 왼쪽 통용문 뒤쪽에 정원수로 식재돼 있다. 마당히 교체해야 할 것이며 또는 ‘과거의 한 때 아픈 역사가 있었다’는 안내 입간판을 세워 교육적 활용을 해야 할 것이다.    
옛집: 충무공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부터 살던 집으로 이후 종손이 대대로 1960년까지 살았던 곳이다.
홍매: ‘고결, 결백, 충실, 인내’의 꽃말을 지녔다. 4월 초순에 꽃이 피어 꽃말에서 이 충무공의 충의 향기가 풍긴다.    
현충사 참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정신과 위업을 선양하며 영정을 모신 곳이다. 1706년 아산지역 유생들이 세운 사당에 1707년 숙종 임금이 ‘현충사(顯忠祠)’라는 현판을 내렸다. 이후 1966년부터 1974년까지 현충사 성역화 사업이 진행되면서 현재의 현충사를 다시 세웠다.    
난중일기: 이 충무공이 1592년부터 1598까지 친필로 작성한 임진, 정유 재란의 진중을 일기로 기록했다. 국보 제76호로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2013년 등재 됐다(문화재청 현충사 소장).  
한산도 생활: 이 충무공의 삼도수군통제사 시절 모습이다(문화재청 현충사 소장).    
명량해전: 울돌목이라 부르는 명량은 전남 해남군의 서쪽 우수영과 진도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이다. 1579년 9월 16일 이 충무공이 12척의 배로 313척 왜선을 섬멸했다(문화재청 현충사 소장).  
▲ 학익진 전법(鶴翼陣戰法):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군을 격퇴할 때 펼쳤던 진으로, 학의 날개를 닮아서 붙인 이름이다. 즉 적은 수의 전투선을 가로로 넓게 펼쳐서 줄을 지어 쳐들어 오는 많은 왜군을 격파하는 비법이다(문화재청 현충사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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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긴박한 시기 화평 18/04/09 [09:05] 수정 삭제
  어느때보다도 긴박하고 위증한때 이순신장군 일대기 되돌아보게 한 기사와 일제침략한재인 신위대가 버젓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하는 기자의 취재글에 공감하며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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