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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岩 칼럼
‘참된 나’와 참부처
‘참된 나’라는 부처님은 늘 나와 함께 있어
기사입력: 2018/04/11 [08:28]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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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가르침이 위대한 까닭은 우주의 실상을 깨달아 일체의 고통을 소멸하는 길을 밝혀 놓았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지상에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발자국씩 걸으면서, 한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이렇게 외쳤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무량생사 어금진의(無量生死 於今盡矣) 차생이익 일체인천(此生利益 一切人天)
하늘 위와 하늘 아래 나 하나 홀로 높네 끝없는 나고 죽음 이에서 다하리라. 이 생에서 모든 사람과 천인을 이익되게 하리.

이 게송(偈頌)을 통하여 부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런데 이 게송의 참뜻을 모르는 이들은 '하늘 위나 하늘 아래 나 하나 홀로 높다(天上天下 唯我獨尊)‘라는 구절에 대해 "그토록 건방진 말이 어디에 있느냐"라고들 한다. 그러나 이 선언이야말로 누구에게나 통하는 보편타당성을 지닌 말이요, 바로 우리를 깨우치고자 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참부처를 진정으로 만나고 싶다면 외형으로 부처를 구하는 어리석음을 먼저 버려야 한다. 참된 부처는 불변하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이며 진여자성(眞如自性)이다. 진여자성은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지만 각자의 업보와 인식에 가려 보지 못할 뿐이다. 즉, 일체중생 모두가 근본적으로 진여자성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밖으로 따로 부처를 구하려고 노력해서는 영원히 깨우치지 못한다. 참부처는 자신의 업보를 소멸하고 인식을 모두 버리면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진여자성의 참부처를 만나려면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은 전지전능한 능력과 분부신 외모를 가진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자기가 원하는 부처님의 모습일 뿐 실제 부처님은 그렇지 않다. 석가모니 부처님 시절 어떤 노인이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자 노구를 이끌고 먼 길을 찾아왔다. 부처님은 “불법이 나의 모습이나 말에 있지 않은 데 어찌 나를 보려고 왔는가?”라고 물었다. 이 법문은 참부처가 부처님의 형상이나 음성에 있지 않고 지혜를 통한 깨달음에 있음을 설하고 있다. 참부처는 일체 현상을 초월한 것이므로 현상으로는 볼 수 없으며 다만 깨닫는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이를 두고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고 단언하고 있다.

수행을 하는 동안 부처님의 법문이 없이는 깨달을 수 없고 그 법문으로 평생 동안 일깨워주기 때문에 존경과 감사에 대한 마음이 지극해진다. 그래서 부처님의 지혜와 깨달음의 위대함을 공경하며 말로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미사여구로 표현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부처님의 몸에서 금빛 광명이 빛났다고 경전에선 말하고 있다. 이는 부처님의 모습에서 광명이 나왔다는 뜻이 아니라 부처님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온몸으로 법문한 것을 뜻한다. 금빛 광명이란 진리의 법문을 뜻한다. 즉, 법문은 들음으로써 세상의 법칙과 실체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지혜가 생기고 그만큼 밝아졌다는 뜻이다. ≪금강경≫에 보면 부처님이 함이 없이 탁발을 하고, 함이 없이 발을 씻고, 함이 없이 자리에 앉았다는 구절이 있다. 즉,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主而生其心)을 직접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제자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자 다시 문자로 법문하였다. 나아가 부처님은 문자로도 알아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방편이나 기복으로 중생구제의 법문을 펼쳤다. 이처럼 부처님은 사력(死力)을 다해 온몸으로 법문을 하기 때문에 온몸에서 금빛 광명이 나온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 다만 몸이 금빛으로 빛난다고 한다면 그것이 중생들에게 무슨 이득이 되겠는가. 그 광명은 부처님의 지혜의 법문이므로 위대하고 공경할 가치가 있으며 당연히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부처님이 불가사의한 존재이므로 진짜 광명이 나왔다고 여긴다면 이는 어리석은 것이다.

또한 부처님의 법문을 사자후(獅子吼)로 표현했다. 사자후란 사자가 우렁차게 울부짖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법문을 사자후로 비유하는 것은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으로서 이 세상의 어떤 이론으로도 대적할 수 없는 최상의 법이기 때문이다. 즉 부처님의 법문은 우주의 실상을 확실히 정립하여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이 세상의 어떤 가르침도 모두 척파해 버린다는 뜻이다. 이러한 근본 의미를 모르고 목소리를 우렁차게 내거나 함부로 고함을 치는 것은 사자후가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이처럼 경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신비스럽게 묘사되어 있는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의 위대함과 가치를 최고로 표현한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를 부처님의 실제 모습으로 착각하면 어리석다.

경전에 묘사된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습을 살펴보면 범인(凡人)과 다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만약 몸에서 금빛이 나오고 이마에서 광명이 나오며 사자후와 같은 목소리로 말하는 등의 이적(異蹟)이 인간들의 눈에 실제로 보였다면 외도들이 부처님 앞에서 감히 불법을 비난할 수 없었을 것이며 데바닷타 같은 사람이 부처님을 헤치려고 평생을 따라다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부처님도 배가 아프면 고통스러워했으며 석가족이 모두 죽을 때에도 바라볼 수 밖에 없었고 제자들이 죽었을 때는 슬퍼했다. 이처럼 부처님은 그 모습이 일반 중생들과 다르지 않지만 우주의 실상을 꿰뚫어 봤고 진여자성을 깨우친 분이었다. 외적으로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았으나 그 근본은 티끌만치도 움직임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보이지 않는 지혜의 깨달음을 알지 못하고 경전에 미화되어 있는 거룩한 형상에만 집착한다. 그래서 부처라 하면 경전에 나오는 것처럼 삼십이상 팔십종호(三十二相 八十種好)를 갖춘 외모를 가져야 하고 이적을 보여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부처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비유컨대 만약 인간이 축생으로 환생한다면 축생의 모습으로 일생을 살 수 밖에 없는 것과 같다. 인간세계에 출현한 부처님은 인간의 모습이고 육신을 벗기 전까지는 인간의 한계를 그대로 지닐 수밖에 없다. 중생은 존재하지 않는 부처를 구하므로 부처를 찾을 수 없고 실제 부처님이 나타나도 만날 수가 없다.

부처님의 지혜와 깨달음보다는 신비스럽고 거룩한 외형에 집착함으로 결국 방편에 메이고 만다. 진정으로 부처님을 만나고 싶다면 부처님을 외형으로, 현상으로 구하려는 어리석음을 먼저 버려야 한다.

참된 부처는 불변하는 본래면목이며 진여자성이다. 진여자성은 불변하는 것이므로 변하는 육체나 마음을 자신으로 여기는 상태에서 결코 부처가 될 수도 없고 부처를 볼 수도 없다. 결국 이 세상에 나타났던 석가모니 부처님도 하나의 화신(化身)이며 화신은 공(空)한 것이므로 화신으로 참부처를 삼는 것은 잘못이다.

수행이란 닦아서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공한 것을 모두 버려서 본래부터 있었던 공하지 않는 진여자성을 찾는 것이다. 진여자성은 항상 있지만 각자의 업보와 인식에 가려 보지 못할 뿐이다. 즉, 일체 중생 모두가 근본적으로 진여자성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밖으로 따로 부처를 구하려고 노력해선 영원히 깨우치지 못한다. 자신의 업보를 모두 소멸하고 인식을 모두 버려서 어디에도 끄달림이 없고 매임이 없을 때 진여자성은 저절로 드러난다. 그러면 그대로 참된 부처를 깨닫게 되고 그때에 참된 부처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인간으로 오신 부처님이 참부처가 아니라 부처님의 화신이라고 해서 부처님을 믿고 따르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다. 화신으로 오신 부처님은 중생에게 참부처를 깨닫게 하기 위한 선방편이기 때문이다. 즉 화신의 부처님과 법문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삼아 참부처인 달을 보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 앞에서 정성을 다해 예를 올리되, 스스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여 참부처를 깨닫는 것이 올바른 수행이다.

≪금강경≫에서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一切有爲法 旅夢幻泡影)이라 했다. 모든 삼세 부처님 스스로가 자신을 포함한 모든 현상이 꿈과 같고 그림자와 같은 허상이므로 메이지 말라고 분명히 밝혀 두었는데 이것을 잊어버리고 다시 형상을 부처로 삼거나, 닦은 마음을 부처로 삼거나, 범문 자체를 부처로 삼는 어리석음에 절대 빠지지 말아야 한다. 이같은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으면 현상이 끊어진 진여자성의 참부처를 만나게 된다.                   

‘참된 나’가 곧 참부처     

앞에 언급한 '나 하나 홀로 높다'는 말씀 속의 '나'는 어느 한 개인의 '나'가 아니라 모든 이들이 다 갖추고 있는 '참된 나'(眞我)를 가리킨다. '참된 나'야말로 하늘 위 아래를 통 털어 가장 높고 가장 존귀한 것임을 천명한 것이요, '참된 나'를 찾아 부처를 이룰 때 가장 높고 위대한 개인이 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러면 '참된 나'란 무엇인가? 바로 참된 부처님이다. 먼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라. '내가 어떠한 부처님을 어떻게 모시고 있는가'를. 대부분의 불자들은 나름대로 부처님을 모셨다고 생각한다. 과연 어떠한 부처님을 모셨는가? 법당에 계신 등신불을 모셨는가? 복을 주는 관세음보살, 영가를 천도해주는 지장보살을 모셨는가? 물론 그와 같은 불보살을 모시는 것은 불자의 당연한 도리이다. 하지만 부처님이나 대보살님들의 근본 뜻에 비추어 본다면 그 어떤 존재보다도 '참된 나'라는 부처님을 잘 모셔야 할 것이다.참된 나, 그 '참된 나'라는 부처님은 잠시도 '나'와 떨어진 적이 없다. 매일 밤마다 내가 모시고 자는 부처님이요, 아침마다 언제나 함께 일어나 같이 움직이는 부처님이다. 이 부처님이야말로 우리가 지성으로 모셔야 할 으뜸가는 부처님이다.우리는 누구 할 것 없이 '참된 나'라는 으뜸가는 부처님과 언제나 함께하고 있다. 과연 그 부처님을 어떻게 모셔야 할까?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모셔야할까? 얼굴을 찌푸려가면서 괴롭게 모셔야 할까? 당연히 즐겁게 잘 모시고 싶을 것이다.그런데도 우리는 '참된 나'라는 부처님을 모시기보다는 '나 밖의 부처님' 모시기를 더 좋아한다. '참된 나'를 찾고자하는 것이 으뜸가는 부처님을 가장 잘 모시는 방법인데도, '참된 나'를 찾는 일을 게을리 한다. '참된 나'를 찾는 일을 게을리 할 때 우리는 죽은 사람이 되고, '참된 나'를 찾는 일을 부지런히 할 때 우리는 산 사람이 된다. '참된 나'와 더불어 즐거운 생각을 가질 때는 즐거운 사람이 되고, 괴로운 생각을 가질 때는 괴로운 사람이 된다. 복되게 생각할 때는 복된 사람이 되고, 가난하게 생각할 때는 비참한 사람이 된다.

사월 초파일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일이지만, 우리가 잘 때 함께 자고 일어날 때 함께 일어나 함께 움직이는 그 부처님은 매일 매일이 생일이다. 날마다 생일이다. 과연 날마다 생일인 그 부처님을 어떻게 모실건가? 즐겁고 복되게 모셔야 하지 않겠는가.그러면 '참된 나'라는 부처님을 잘 모시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먼저 '참된 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잘 모실 수 있다. '참된 나'라는 부처님은 우리의 속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병을 치유하는 절대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다.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을 모은 ≪유교경(遺敎經)≫에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나는 훌륭한 의사와 같아서 병을 알아 약을 주나니먹고 먹지 않는 것은 의사의 허물이 아니요,또 좋은 길잡이와 같아 도로써 사람을 인도하나니듣고 행하지 않는 것은 길잡이의 허물이 아니니라.아여양의 지병설약(我如良醫 知病設藥)복여불복 비의구야(服輿不服 非醫咎也)우여선도 도인선도(又如善導 道人善導)문지불행 비도과야(聞之不行 非導過也)

이것은 단순한 부처님의 설법이 아니다. 잘 때 함께 자고 일어날 때 함께 일어나 언제나 함께 움직이는 '참된 나'의 음성이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라. 지금의 '나'에게 이 '참된 나'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는가. 아마도 현재의 병에 너무 집착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잘 들리지 않을 수 있다. 정녕 지금의 우리는 나름대로의 병에 걸려 있고 길을 몰라 헤매고 있다. 몸이 아픈 병을 비롯해 돈이 벌리지 않는 병, 자식이 공부를 못하는 병, 욕심대로 되지 않는 병, 재앙이 많은 병 등 차근차근 따지고 보면 병에 걸려 있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그렇다고 각자 가지고 있는 병을 치료할 방법을 알고 있는가? 물론 아니다. 병을 치료할 길을 모른다. 그래서 끝없이 헤매고, 마침내는 허무하게 죽어 간다. 큰 길잡이이신 부처님께 그 길을 묻는다.‘부처님! 저는 이러한 병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병을 벗어나 병 없는 삶을 살게 하소서.’그러나 법당에 계신 대부분의 부처님은 대답이 없다. 그러면 누가 가장 빨리 답을 주는가. 바로 '참된 나'라는 부처님이다. 밤에 잘 때 함께 자고 일어날 때 함께 일어나는 그 부처님은 병에 걸리지 않는다. 배고픈 부처도 아니요 돈이 없어 궁한 부처도 아니다.

'참된 나'의 부처님은 어두운 밤에도 밝게 가는 부처이다. 그 부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바른 길을 일러준다. 병을 낫게 하는 방법을 다 가르쳐 준다. 따라서 우리가 '참된 나'의 음성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기만하면 바른 길을 찾아 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잘 때 함께 자고 일어날 때 함께 일어나는 '참된 나'라는 부처님은 훌륭한 의사와 같아서 환자를 잘 진찰하여 병을 낫게 해 줄 수 있는 힘이 있다. 그 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자비심이다.모든 병을 낫게 해 주는 자비심은 언제나 우리 속에 있다. '참된 나'의 작용인 자비심은 어느 때고 우리의 병을 고쳐 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속에 있는 자비심을 굳게 믿고 밖으로 꺼내기만 하면 그 어떠한 병도 치료할 수 있다.
<문윤홍·시사칼럼니스트·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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