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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민족 영웅 이순신 장군

원영진 | 기사입력 2018/04/21 [10:55]
4월28일 충무공탄신일 맞아 성웅을 추모하며

다시 보는 민족 영웅 이순신 장군

4월28일 충무공탄신일 맞아 성웅을 추모하며

원영진 | 입력 : 2018/04/21 [10:55]

이순신(1545~1598)은 서울 건천동에서 출생했다. 28살 되던 해 훈련원별과에 응시했으나 말이 넘어져 다리를 다치고 결국 시험에서 낙방했다. 4년 후 1576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로 임명되어 관직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여진 세력에 침입을 적절하게 방어하지 못하여 징계를 받아 첫 번째 백의종군(白衣從軍)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선전관이 되고 1589년 정읍 현감으로 제수되었다 47살에 전라좌수사 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그해 5월에 옥포 해전을 시작으로 연전연승의 위대한 전과를 이뤄내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계략과 이순신을 시기하던 국왕과 간신배들의 모략으로 파직되어 두 번째 백의종군의 고통을 겪게 된다. 나라가 환란에 처했던 1597년 명량해전에서 120인의 나약한 병사와 12척의 병선뿐인 처참함에서 극한의 위기를 맞이한다. 일본의 적선 133척이 아군의 배를 에워싸자 병사들의 얼굴이 질린 기색을 보고 군사를 향하여 힘차게 외친다.     

죽고자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必死則生 必生則死)
노를 저어 적을 향해 돌진하라.     

결국 백전백승의 전과를 올리게 된다. 이순신의 전략과 나라향한 충성심으로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무너진 군대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탁월한 리더십으로 국가의 운명을 위기에서 구했다.    

장군은 아주 평범했다. 1597년에 정유년 초에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백의종군의 길을 떠나면서 한양에서 영의 정 유성룡을 만나 닭이 울어서야 헤어지는 인간적인 고뇌를 토로했고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좌절의 아픔을 난중일기에 세세히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의 아들의 부고를 듣고 좌절의 찢어지는 아픔에 울부짖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공사에 분명했다. 아전을 잡아 매를 쳤고 입대에 관한 사무에 태만한 자는 처형까지 하였고 탈영병이나 불량 절도 등을 사형에 처해 효시했고 집으로 도망간 홍옥천은 목을 베어 매달았다. 이순신은 아전뿐만 아니라 군관 머슴 종들의 직무태만에도 민폐를 끼치면 엄히 다스렸다.

병사들과 늘 함께했다. 군사 전략회의는 항상 의논했고 술과 식사를 하면서도 주요 작전회의를 함께하여 전략을 의논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또한 공과에 대해서는 병사와 모두 나누고 상과 벌에 확실해서 전투가 끝났을 때 전공을 함께 나눠 공적을 위로하고 상금을 군졸들에게 베풀어 주었다.    

선조실록에 이순신의 사람됨이 정중하고 재략이 있었으며 기품이 있고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기 관리에 철저했다. 백의종군 도중 홍양을 지나다가 자신의 종들이 밥을 얻어먹었다는 말을 듣고 종을 매로 다스리고 쌀을 도로 갖다 주게 했을 만큼 철저했다.    

그는 강했지만 위장약을 상시 복용했고 밤늦도록 뒤척이며 새벽잠을 설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새벽꿈을 해몽하여 그날그날 일지를 기록하고 자기반성의 끈을 놓지 않고 늘 노력하며 충무의 꿈을 길렀다.

백의종군(白衣從軍) 정신은 위대한 나라 사랑의 정신이요 오직 국가와 민족을 향한 일편단심에 애국애족에 숭고한 희생정신이었다.    

로일 전쟁의 승자였던 일본 함대 수장 도고헤이하치로는 “나를 영국의 넬슨에 비교하는 것은 가하나 조선의 이순신에 비교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며 이순신을 존경하고 흠모했다. 일본 사람들은 이순신장군을 군(軍)의 신(神)으로 극찬하며 거룩함을 칭송했다.     

4월28일 충무공탄신일을 추모한다. 국가가 환란을 당했을 때 죽고져 했고 백이종군의 위대한정신이 역사 속에 빛나고 있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나라사랑의 절규가 쟁쟁히 울린다. 성웅충무공은 우리민족에 불멸의 신이 되어 우리 겨레 속에 숨 쉬고 계신다.
(단군정신선양회장·전 대종교 총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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