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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종교연구’ 주제에 제한없이 민속종교 등 다양한 연구자들 참여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8/05/03 [06:58]
오사카 간사이대학 ‘제2회 동아시아 종교연구포럼’ 참관기

‘전쟁과 종교연구’ 주제에 제한없이 민속종교 등 다양한 연구자들 참여

오사카 간사이대학 ‘제2회 동아시아 종교연구포럼’ 참관기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18/05/03 [06:58]

오사카 간사이대학 ‘제2회 동아시아 종교연구포럼’ 참관기
필자는 ‘민속종교에서 신앙되고 있는 당산신앙’ 발표
    

일본은 우리에게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신대, 생체실험, 보국대, 징용 등 어두운 면이 있는가 하면 개항과 신분제 철폐 등 밝은 면도 있다. 그러나 어떤 입장에서 일본을 바라보던 공통적 시각이 있다. 예의바르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민족이란 것이다.     

일본 오사카에 있는 간사이 대학 주최 제2회 동아시아 종교연구포럼에 참석차 가는 길의 풍경도 일본을 그대로 느끼게 했다. 서울에서 친숙했던 모습이 바다건너 1-2시간 거리에는 없다. 시야를 가리는 프랭카드, 휘날리는 휴지 조각 등이 없어 깨끗했다.    

간사이 대학 교정에는 우리 대학과는 달리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게시물과 안내문이 없다. 그것을 게시할 공간이 원래부터 없었던 듯 하다.     

동아시아 종교연구포럼 하루전 도착한 일행은 발표 당일 우리들에게 주어진 짧지만 긴 시간을 보낼 고민을 하였다.     

▲ 7세기 건립된 물과 관련이 깊은 전설을 간직하고 수수신사         

식당에서 아침을 해결하면서 직원을 통해 가까운 곳에 수수신사(垂水神社)가 있다는 귀한 정보를 얻었다.     

마을 한 가운데 위치한 신사는 뒤에 야트막한 산을 배경으로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사의 분위기를 주는 신사의 입구에는 두 개의 돌 기둥이 있었다.     

왼쪽에는 작은 개울 물이 흐르고 오른쪽에는 공양물을 판매하는 종무소가 있다. 계단을 오르면 넓은 마당에 대웅전과 같은 본전이 있다. 그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전각들이 있다. 본전 뒤로 오르는 길은 대나무 숲길이다. 모두가 낯설지 않았다. 한국 사찰에서 흔히 보는 배치도가 있었다. 본전 앞에 참배를 위한 의례를 그림과 함께 소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각자의 띠별 운세를 알 수 있는 작은 종이들이 청결하게 진열되어 있다. 소원을 적은 작은 나무 조각이 줄이 지어 매달려있다.     

이 신사는 7세기 건립되었으며 물과 관련이 깊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가뭄에 물을 구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전국을 찾아 다니다 이곳에서 흐르는 샘물을 발견하고 그 감사하는 마음에 신사를 지었다는 창건 연기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포럼 행사에는 한강현 부회장(국제신인류문화학회)의 동행이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전쟁과 종교연구’(2월 24-25일)라는 주제의 포럼이지만 주제에 제한없이 다양한 연구자들이 참여하였다.    

필자는 민속종교에서 신앙되고 있는 마을신앙 가운데 당산신앙을 선택 발표했다.     

마을은 공동체를 이루는 작은 사회집단이다. 이곳을 지키는 당산, 당산나무가 새마을 운동과 서구화 물결로 사라져 가면서 교회 등 다른 종교단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내용의 발표문이다.     

한강현 부회장은 ‘신인류시대 한 몸철학과 삼종진기에 관하여’ 발표를 했다.    

이번 포럼 준비는 주최 측에 의해 주도되었다. 국내 학술대회에서 볼 수 있는 그 흔한 다과는 물론 기본적인 음료조차 자부담이었다. 그 덕에 일본 자판기 문화를 만나게 되었다. 말로만 듣던 다양한 자판기는 거리에 흉물이 아니라 도시의 한 모습처럼 보였다. 발표주제가 다양한 만큼 민속종교 관련 발표가 상당히 많았다.     

다양한 연구가 자연스러운 풍토였다. 실제로 불교전공자 신지교수(기후 시립대학교 여자단기대학)의 경우 우리나라 진도씻김굿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날 ‘사제와 샤먼-오키나와이라부시마와 한국 진도의 사례’를 발표했다. 국내 불교계에서 동의하지 않는 주제다.    

3개의 분과로 나뉘어 발표자(20분)와 토론자(10분),전체 토론(10분) 등 총 40분의 시간이 주어졌다. 총 34명 발표와 논평자가 참여했다. 처음부터 통역자없이 진행되었다. 대신 사회자가 일본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사람으로 구성되어 학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였다.    

서기전부터 있었던 민간신앙부터 1964년 한국정부의 창가학회 금지조치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역사를 떠나 다양한 주제가 발표되었다. 그리고 발표에는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금광교,입정교성회 관계자들도 참석하여 자신들의 종교를 알리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다양한 종교와 민속 주제 발표 수용    

우리가 간 기간은 일본 최대의 입시철이였다. 입시를 위해 전국에서 몰려온 입시생과 그의 부모들 때문에 숙박시설은 오래전 예약이 종료되었다.    

둘째 날 우리일행은 낭패를 보았다. 잠자리를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오랜 일본 유학생활을 한 한강현 부회장 조차 예상치 못한 낭패였다. 저녁시간 시내를 돌아다녔지만 우리에게 제공될 방은 없었다. 그러나 내심 유명한(?) 캡슐방 체험을 기대했으나 그마저 순단치 못해 결국 사우나에 여장을 풀었다. 우리와 같은 분위기다. 안마 시술소, 식당, 오락실, 이발소, 세신사 등 서울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그런 모습이다. 여러층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가 간 주말에는 자리가 없었다. 겨우 사정을 해서 들어간 사우나는 남자들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계산을 돕는 직원, 때를 미는 세신사 모두 여자였다. 세신사 지시에 따라 누워있는 중년의 사내가 몸을 내 맡기고 있었다. 사내의 몸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세신사는 한국 중년 여성으로 그의 동료들 모두 한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다.     
▲ 천리시의 천리교 본부    

학회 마지막날 현지 답사를 피해 원광대학에 근무하고 있는 야큐마코트(‘동서양 공공성 연구와 한국적 공공성-교토포럼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발표) , 김봉곤(‘대종교의 5대 종지와 공공성’ 발표)씨를 만나 별도 여행을 계획했다.     

야큐마코트씨 모교 천리대와 천리교 본부가 있는 천리시 방문을 위해 개별적 행동에 들어갔다. 여러 번 전철을 환승하면서 도착한 천리시는 천리교가 자리잡고 있으면서 작명된 종교도시라고 해도 될 것이다.     

천리교의 교조(오야사마로 부른다) 중산미기는 1798년 4월 18일 대화국 산변군 삼매전촌(현재 내양현 천리시 삼매전련)의 대장옥 신분은 농민이지만 무사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었으며, 대도가 승인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는 전천반칠의 장녀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남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13세가 되어 고향에서 조금 떨어진 장옥부촌(현재 천리시 삼도련)의 장옥 중산선우위문에게 시집가서 평범한 주부로서 일생을 보내게 된다. 그녀의 시가는 주식중개업을 통해 부를 쌓은 촌에서 한 두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부유한 집안이었다. 그녀는 시집에서 봉건적인 여성의 속박 윤리였던 삼종지도을 준수하며, 시부모를 공양하고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키고 엄청난 가사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소작인에 대한 관리나 보살핌에도 충실하는 등 전형적인 봉건제 하의 여성상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결혼한지 3년만에 시모(媤母)로 부터 주부권을 양도 받을 정도로 주부로서의 모범적인 생활을 하며 l남 5녀를 두었다. 그러나 그녀의 그러한 모범적 생활태도와는 달리, 남편은 특별한 직업이 없이 무위도식만을 일삼고 게으름과 무절제한 생활로 물려 받은 가산만을 탕진하여 부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한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천리시를 가기 위해 여러차례 환승과 재승차를 하였다. 그때마다 새로 표를 구매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일본의 전철은 운행되는 구간에 따라 각각의 회사가 운영되고 있었다. 복잡해 보이는 노선을 잘못 승차한다면 지하철 요금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것이다.     
▲ 천리시 가는 도중에 만난 군산역         

일본에서 만난 전철 군산역    

천리시를 가는 노선 중간에 「군산」역을 지나게 되었다. 혹자는 우리가 사용하는 지명 가운데 중국에 있는 지명을 발견하게 된다. 대륙에서 활동하던 우리 조상 누군가 다양한 이유로 고향을 떠나와 정착하는 과정에 그리운 고향 이름을 부활시킨다. 군산은 백제 멸망시기 아니 임진왜란 시기 그곳을 떠나야 했던 조선의 백성들의 정착지였을까? 지하철 곳곳에 안내판이 있었다. 그 가운데 사찰 소개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한국에서는 지역 관광소에서 지역내 명소 소개용 광고판을 보았는데 개별 사찰광고는 처음 보았다. 한국에서 굳이 논한다면 민속불교 계통 사암들이 하는 소개 정도이다.    

천리교 인근에는 석산신궁(이소노가미 신궁)이 있었다. 이 석산신궁은 천리교의 교조인 미끼의 교조전과 신전이 있는 곳에서 도보로 10여분 정도 떨어진 산 쪽에 위치한 신궁이다. 신궁 소유 중요문화재로는 <샤쿠라몬>, 일본측이 황국사관에 따라 신공황후에 백제가 헌상한다고 주장하는 <칠지도>가 있다.     

석산신궁 입구에는 정토종 계열의 대념사라는 사찰이 있다. 아담하면서 사찰 뒤에는 납골이 있다. 전쟁에 출전하여 전사한 인사들을 추모하는 비가 대웅전 앞에 놓여있다. 절 주변은 한가한 시골 마을처럼 조용하고 주지도 없었다. 이날 답사는 비가 내려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다. 아쉬움이 남았지만 살면서 기억되는 곳으로 남을 것이다. 채식주의를 배려하는 야쿠마코트는 식당을 찾아 여러 곳을 다녔다. 큰 홀에 작은 칸막이가 있는 곳으로 안내되었다. 그러나 신경을 써줌에도 불구하고 고기가 섞여 나온 국수는 참 당황스럽게 했다. 친절하게 동행해준 한강현 부회장님, 야큐마코트, 김봉곤, 김성순(‘고대사에 나타나는 전쟁과 주술;『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발표)씨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삼국유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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