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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對譯)‘洞察!天問天答’(不滅の自覺)質問14

眞鏡 | 기사입력 2018/05/10 [08:32]
何にもならないで下さい。だから何もしないで下さい。

(韓日對譯)‘洞察!天問天答’(不滅の自覺)質問14

何にもならないで下さい。だから何もしないで下さい。

眞鏡 | 입력 : 2018/05/10 [08:32]
(질문14) ‘지금의 나’, 즉 육신적인 나와,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하는 ‘비육신적인 나’, 즉 ‘더 사실적인 나’를 뛰어넘는 절대적인 ‘자유’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質問14)「今の私」、即ち、肉体的な私と「今の私」を存在させる「非肉体的な私」、即ち、「より事実的な私」を超える絶対的な「自由」についてお話して下さいませんか。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빛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의 관계가 동시다발적이지만 엄밀히 따져 보면 우선하는 것은 빛입니다.    

影があるということは、光があるということです。2つの関係は同時多発的ですが、厳密に問うてみれば、優先するのは、光です。    

‘지금의 나’는 ‘육신적인 나’로 존재하고 있으며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태생적 한계로 인해서 ‘스스로’일 수가 없으며, ‘스스로’일 수가 없다는 것은, 알 수가 없는 비동일시, 즉 비육신적인 ‘무엇’의 뜻과 의지, 즉 자유의지가 우선하여 ‘존재’를 가능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나’, 즉 ‘육신적인 나’가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비육신적인 나’, 즉 ‘더 사실적인 나’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今の私」は「肉体的な私」として存在しており、存在していることは、生まれながらの限界により「自ら」であることができず、「自ら」であ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のは、知ることができない非同一視、即ち、非肉体的な「何か」の志と意志、即ち、自由意志が優先して「存在」を可能にしているのです。だから、「今の私」、即ち、「肉体的な私」がいるという事実を通じて、「非肉体的な私」、即ち、「より事実的な私」がいるということは、あまりにも明白です。    

그런데 ‘비육신적인 무형의 더 사실적인 나’와 육신과의 동일시로 인한 ‘지금의 나’에게는 동일한 성품과 동일한 자성이 있으며, 이로 인해서 비록 ‘지금의 나’라고 할지라도 완전히 부정되어서는 안 되며, 부정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더더욱 사실적인 나’가, 존재와 비존재를 포함하면서 넘어서 있다는 것입니다. 즉 ‘나’는 ‘나’를 동일시할 수도 있으며, 비동일시할 수도 있으며, 존재할 수도 있으며,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존재와 비존재의 합일(合一), 즉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그 자체로 ‘대 자유’입니다.    

ところが、「非肉体的な無形のより事実的な私」と肉体との同一視による「今の私」には、同じ本質と同じ自性があり、これによって、たとえ「今の私」といっても、完全に否定されてはならず、否定されないためには、「より一層事実的な私」が存在と非存在を含みながら越え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即ち、「私」は「私」を同一視することもでき、非同一視することもでき、存在することもでき、存在しないこともでき、存在と非存在の合一、即ち、存在することもなく、存在しないこともない、それ自体で「大自由」です。    

그런데 놀라운 점은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부분은 능히 모든 지성 인류에게 보편적이며, 어떤 영적 체험이나 경험이나 종교적 신앙심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는 존재한다’는, 즉 동일시로 인한 ‘지금의 나’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지금의 나’를 자기 자신으로 여기고 있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알아야겠다고 하는 자기 관심, 즉 자기 사랑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ところが、驚くべき点は、私が話をしているこの部分は、十分にすべての知性人類に普遍的であり、ある霊的な体験や経験や宗教的信仰心を通して知ることができるのではなく、単に「私は存在する」は、即ち、同一視による「今の私」が「存在する」という事実だけで、それ自体だけで「十分に」知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したがって、たとえ「今の私」を自分自身と考えているとしても、自分自身を知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自己関心、即ち、自己愛だけで十分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    

(질문) 그렇게 단순할 수는 없습니다. 수많은 성직자와 종교적 수행자들이 있습니다.    

(質問)そのように単純とはいえません。数多くの聖職者と宗教的修行者がいます。
    

‘진리’가 가장 보편적일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로 ‘하나’이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가장 보잘것없는 것조차 결국은 ‘진리’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리는 가장 보편적이며 가장 단순한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는 단순할 수가 없으며, ‘수행과 방편’은 거창하고 어려워야 합니다.    

「真理」が最も普遍的であり得るのは、すべてのものが「一つ」であるからであり、それによって最も取るに足りないことさえ、結局は、「真理」の一部だからです。したがって、真理は最も普遍的であり、最も単純なことです。

しかし、「宗教」は、単純と言えず、「修行と方便」は、途方もなくて難しくあるべきです。    

(질문) 진경님이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로서 ‘하나’다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 부적절해 보입니다.    

(質問)眞鏡さんが言っている『すべてのものが「一つ」である』は、創造主と被造物の関係では不適切に見えます。
    

만들어진 것이 있으면, 만드는 무엇이 있습니다.    

作られたものがあれば、作る何かがあります。    

창조주는 태생적 한계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이며, ‘스스로’ 말미암았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자유와 진리’로 대변되어지는 창조주는 ‘어떤 형태 없음’으로 절대적이며, 나타나고 사라질 수가 없기 때문에 ‘존재’를 통해서, 즉 ‘만들어진 것’을 통해서 ‘스스로’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創造主は、生まれながらの限界がないので、「自ら」であり、「自ら」に起因したことは明らかです。だから「自由と真理」に代弁される創造主は、「どんな形態もない」により絶対的であり、現れて消え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存在」を通じて、即ち、「作られたもの」を通じて「自ら」を証明しているのです。    

그리고 만들어진 것, 즉 존재는 창조주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의지와 뜻으로 의식―화 시킨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만들어진 것 또한 결국은 창조주의 의식으로 의식―화 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모든 것이 창조주의 일부이자 그 자체로 창조주입니다. 따라서 만들어진 것과 만드는 자의 합이, 존재와 비존재의 합이, ‘절대적이며 가장 보편적’입니다.
   
そして、作られたもの、即ち、存在は創造主がそれを可能にするために「自分自身」の意志と志で意識化させたものであるといえます。したがって、作られたものもまた、結局は、創造主の意識的に意識化したものなので、結局は、すべてが創造主の一部であり、それ自体で創造主です。したがって、作られたものと作る者の和が、存在と非存在の和が「絶対的であり、最も普遍的」です。    

(질문) 한편에서는 태생적 한계를 가진 ‘지금의 나’는 ‘원죄’로 인해 억압과 속박을 받고 있으며,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최선이라고 합니다. 진경님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質問)一方では、生まれながらの限界を持つ「今の私」は、「原罪」により抑圧と束縛を受けており、罪の赦しを受けることが最善といいます。
    

비존재가 역동적이며 더 사실적이지만, 결국은 비존재는 ‘스스로’이기 때문에 ‘스스로’는 드러날 수가 없으며, 드러나게 함으로써 ‘자신’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모든 ‘존재’가 결국은 비존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은 인격화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모든 지성 인류를 통해 ‘스스로’를 인격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비록 ‘지금의 나’라고 할지라도, 모든 지성 인류는 결국 ‘신’의 인격화입니다.    

非存在が力動的で、より事実的ですが、結局は、非存在は「自ら」であるため、「自ら」は現れることができず、現れることによって「自身」を立証しているのです。即ち、すべての「存在」が、結局は、非存在を証明しています。したがって、「神」は、人格化される必要がないので、すべての知性人類を通じて「自ら」を人格化しています。だから、たとえ「今の私」といっても、すべての知性人類は、結局「神」の人格化です。    

(질문) 그렇다면 이미 모든 지성 인류가 자유로우며, 구원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까?    

(質問)そうであれば、既にすべての知性人類が自由であり、救いは必要ないのでしょうか。
    

자기를 얽매고 있는 것은 단지 ‘나는 무엇이며, 누구이다’라고 하는 자기 정의, 자기규정입니다. 어디서 어디로 구원하며, 누가 누구를 구원합니까?    

自分を縛っているのは、ただ「私は何であり、誰である」という自己定義、自己規定です。どこからどこに救って、誰が誰を救いますか。    

(질문) 진경님이 말하고 있는 ‘더 사실적인 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質問)眞鏡さんが言っている「より事実的な私」について具体的に説明をお願いします。
    

상호동시적이지만, 창조의 영역, 즉 드러나고 있는 것을 인식하고 지각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식적으로 의식하고 있어야 하며 의식적으로 의식할 수가 있는 이유는 창조의 영역, 즉 드러나는 모든 작용이 사실은 의식작용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영역과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미지의 영역은,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 의식의 영역과 무의식의 영역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는 무의식의 영역이 ‘더 사실적인 나’이며, 이 의식의 영역과 무의식 영역의 경계를 지워 버림으로 해서 ‘일체’를 의식화시킬 수가 있을 때를 ‘더더욱 사실적인 나’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相互に同時的ですが、創造の領域、即ち、現れていることを認識して知覚するためには、まず意識的に意識していなければならず、意識的に意識することができる理由は、創造の領域、即ち、現れるすべての作用が、実際には意識作用であるからです。創造の領域と創造を可能にする未知の領域は、「今の私」の立場で意識の領域と無意識の領域とみることができます。だから「今の私」の立場では、無意識の領域が「より事実的な私」であり、この意識の領域と無意識の領域の境界を消すことにして、「一体」を意識化させることができるときを「より一層事実的な私」であると表現しました。    

(질문) ‘지금의 나’에게 ‘일체’를 의식화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質問)「今の私」に「一体」を意識化させるということは、何を意味するのですか。
    

비록 ‘지금의 나’라 할지라도, 동일시로 인한 관념으로 ‘나’를 덧씌우고 있지만 ‘나’의 정체성은 불변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독립적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라고 여기고 있는 동일시가, 경험의 주체로서 나눔과 분리의 환영을 ‘환영’으로 알지 못하고 사실관계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나’에게 ‘일체’를 의식화시킨다는 것은, ‘지금의 나’라고 여기고 있는 동일시의 관념적 허구를 ‘자각’한다는 것입니다.    

たとえ「今の私」であっても、同一視による観念で「私」を被せていますが、「私」の正体性は不変です。なぜなら、「私」は、独立的で「自由」であるからです。しかし、「今の私」と考えている同一視が、経験の主体として分けることと分離の幻影を「幻影」と知ることができず、事実関係として受け入れています。したがって、「今の私」に「一体」を意識化させるということは、「今の私」と考えている同一視の観念的虚構を「自覚」するということです。    

(질문) 저는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하며,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質問)私は何をどのようにしなければならず、何にな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か。
    

무엇이든지 될 수가 있으며, 무엇이든지 선택할 수가 있는 ‘나’에서, 무엇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나’이며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으로 여기고 있는 ‘나’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나’는 ‘나’에 대한 그릇된 동일시에 불과하며, ‘나’를 억압하고 ‘나’를 속박하고 있는 것은 ‘원죄’도 아니며, ‘신’에 대한 불신도 아니며, 전생에서 이어져 온다고 추측하고 있는 카르마도 아닙니다.    

何にでもなることができ、何でも選択することができる「私」において何になってしまいました。それがまさに「今の私」であり、すべての人が「自分自身」と考えている「私」です。したがって、「今の私」は「私」に対する誤った同一視に過ぎず、「私」を抑圧して「私」を束縛しているのは、「原罪」でもなく、「神」への不信でもなく、前世から繋がって来ると推測しているカルマでもありません。    

아무것도 되지 마세요.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何にもならないで下さい。だから何もしないで下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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