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현대세계불교58●인도불교<4>

이치란 객원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8/05/14 [08:53]
인도불교사에서 본 보드가야의 위상

현대세계불교58●인도불교<4>

인도불교사에서 본 보드가야의 위상

이치란 객원논설위원 | 입력 : 2018/05/14 [08:53]
▲ 보드가야 대탑사원, 겨울철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성지순례 참배객과 일반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보드가야가 현대인도불교의 중심지로 부상하는 데는 인도불교의 쇠망과도 깊은 연관성이 있다. 인도불교의 전성기 때의 불교를 상상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한 때는 인도 亞 대륙 전역이 불교권이었지만, 굽타왕조(320∼650 CE) 말기에 이르면, 불교는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도전을 받으면서 경쟁체제가 된다.     

굽타 왕조는 쿠샨 왕조가 멸망한 후 4세기 초에 찬드라굽타 1세가 건국하여 북인도를 지배하던 제국이었고, 찬드라굽타 2세 때 쿠샨인과 샤카인, 투르크인과 같은 이민족들을 몰아내고 북인도를 통일하게 되었다. 쿠샨왕조 때의 절대적인 불교 후원보다는 브라만교를 바탕으로 인도의 민간신앙과 불교를 융합한 힌두교가 왕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힌두교도들의 일상생활에 마누 법전이 영향을 끼치게 된 것도 굽타 왕조 시기 때부터였다. 불교경전보다는 아리아인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마하바라타》가 힌두교의 경전이 되었다. 굽타 왕조는 여러 차례에 걸쳐 백훈족(에프탈)의 침입으로 북인도 지방의 불교 교단이 크게 타격을 입어 민간의 불교신앙은 쇠퇴하였으나, 아잔타 석굴사원과 같은 굽타 양식의 불교 미술은 발달하였다.     

이런 결과로 내적으로는 왕실이라든지 지역의 브라만 등 후원자의 상실을 가져왔다. 게다가 시주(성금)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훈족, 투르크족과 페르시안 인들의 도전으로 정복과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불교사상에 변화가 왔는데, 의례적(儀禮的)인 대승불교가 성장하고 불교사상이 힌두교에 수용됨으로써 불교와 힌두교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 졌다. 힌두의 종파들이 민중 사이에서 인기를 얻게 되고, 불교를 후원했던 브라만들도 이들 새로운 종파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했다. 당시 불교사원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종교적 사회적 변화로 인하여 토지수입 또한 줄어들게 되면서 경제에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즈음 굽타왕조는 여러 지역에 대형 불교사원을 건립하고 날란다 대학 같은 불교사원대학들을 건립했다. 
▲ 한국의 한 고승이 인도의 한 힌두 대학 내 불교대학에서 법문을 하고 있는 대학 강당에 인도불자들과 아시아의 불자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자리를 메우고 있다.     © 매일종교신문

그러면서도 어떤 지역에서는 부분적으로 불교가 쇠퇴하고 힌두 브라만들이 부상하고 사회-정치적 영향력이 증대되기 시작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런 브라만들 때문에 불교가 기울기 시작했다라고 하기 보다는 무소유 정신에 따라서 재정 관리의 소홀과 사원들의 공동체 생활이 해이해 지면서 승려들이 스스로 격리된 삶을 살고, 수행이나 정진보다는 개인주의적인 독살이 등과 특히 사원에서 소유한 토지 관리의 부실로 인한 재정수입의 급감에 있다고도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이런 불교 내적인 원인도 있었지만,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성장도 한 몫을 했다. 많은 재가 신도들이 불교에서 힌두교와 자이교로 이동하면서 종교적 성금 시주(施主)가 불교에 차츰차츰 줄어 들어서 재정적 압박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한 왕실마저 헌금에 변화가 와서 불교사원을 외면하게 되는 현상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인도에서의 이런 현상은 아시아의 어떤 나라에서도 똑 같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현상이 한국사회에서도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보는데, 역사는 돌고 돈다는 교훈은 너무나 잘 들어맞는 것이 아닌가 한다. 불교 쇠퇴의 외적인 요인가운데 하나는 훈족의 침입이다.

중국의 인도 구법승들인 법현, 현장, 의정, 송운 스님 등이 5세기∼8세기에 걸쳐 서역과 인도를 찾았을 때, 인도 아 대륙의 북서부 지역에서는 불교 쇠퇴의 분위기를 감지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특히 훈족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라고 적고 있다. 훈족의 족보는 매우 복잡한데, 이들은 주로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서 세력을 형성,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지역인 고대 인도를 압박했던 유목종족이다.     

다음은 무슬림 투르크 족들의 인도 공격이다. 무슬림의 인도 공격은 인도 亞 대륙에 매우 파괴적이었다. 페르시아의 여행가였던 아부 라이한 알비루니(Abū al-Rayḥān Muḥammad ibn Aḥmad al-Bīrūnī, 973~1048)에 의하면 11세기 초에 이르면 아프가니스탄과 펀자브 지역에서 불교는 전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루니는 이슬람교도인 페르시아 학자이자 박식가였다. 그는 중세 이슬람 시대의 가장 위대한 학자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며 수학, 천문학, 물리학, 자연과학에 능통하고 그 자신을 역사학자, 연대학자, 언어학자로 구별했으며, 그는 지질학과 더불어 지구과학에도 중대한 기여를 하였기에 측지학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다시 이야기를 보드가야로 돌아가 보자. 보드가야의 대탑도 무슬림들의 공격을 피해가지 못했다.     
▲ 한국에서 온 스님들과 불자들이 보드가야 대탑 보리수 금강보좌 앞에서 법회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보검 이치란 박사(동방불교대학 총장)
      해동세계불교연구원장(www.haedongacademy.org)


  • 도배방지 이미지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