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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對譯)‘洞察!天問天答’(不滅の自覺)質問17

眞鏡 | 기사입력 2018/05/28 [07:24]
「常にすべての場所」で神を見る

(韓日對譯)‘洞察!天問天答’(不滅の自覺)質問17

「常にすべての場所」で神を見る

眞鏡 | 입력 : 2018/05/28 [07:24]
(질문17) 성인들은 ‘항상 모든 곳에서 신을 본다’고 말합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니면 정말로 신을 보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質問17)聖人たちは「常にすべての場所で神を見る」と言います。何を意味するのか。そうでなければ、本当に神を見るのか気になります。    

천국에 가려고 하는 분들에게 ‘왜?’ 가고자 하는지를 물어보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곳에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은 단언컨대 오류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드는 자’로서의 창조주는, 그의 의식으로 모든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볼 수가 있으며, ‘만들어진 것’ 또한 ‘만드는 자’, 즉 창조주의 의식으로서, 그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직 일체로서의 창조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신과 피조물’이라는 관계를 설정하고, 조건화하여 서로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규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天国に行こうとする方に「なぜ」行こうとするのかを聞いてみると、いくつかの理由があり得ますが、そこには、神がいると信じているのです。このように信じることは、断言しますが、間違いでしかありません。なぜなら、「作る者」としての創造主は、その意識によりすべてを作り出していると見ることができ、「作られたもの」もまた「作る者」、即ち、創造主の意識であって、その一部だからです。つまり、ただ一体としての創造主を受け入れることができず、「神と被造物」という関係を設定し、条件化して、互いの正体性を定義して規定しているに過ぎません。    

따라서 이런 식의 허구적 분리의식은 실제적으로 현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이, 동일시로 인한 ‘지금의 나’만을 ‘나’라고 여기고 있으며, 그로 인해 모든 것의 나투어지는 관계가 ‘환영’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したがって、このような神の虚構的な分離意識は、実際的に顕現しているのではなく、単に自分自身が、同一視による「今の私」だけを「私」と思っており、そのため、すべての現れる関係が「幻影」であるということを知らずにいるからです。    

그러므로 나투어진 모든 분리가 ‘환영’에 불과하며, 모든 것이 일체로서 ‘하나’이며, 그 ‘하나’가 전부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으므로 해서, 모든 곳과 모든 것이 되어질 ‘가능성’까지를 ‘하나’로 보며 이로 인해서 결국은 모든 것이 ‘신’으로서, ‘진리’로서 바로 ‘그것’의 일부이자 바로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이해는, ‘항상 모든 곳’에서 신을 본다는 표현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したがって、現れるすべての分離が「幻影」に過ぎず、すべてが一体として「一つ」であり、その「一つ」が全部であることを「自覚」しているとして、すべての場所とすべてのものになることとなる「可能性」までを「一つ」とみて、これによって、結局は、すべてのものが「神」であって、「真理」としてまさに「それ」の一部であり、まさに「それ」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したがって、このような理解は、「常にすべての場所」で神を見るという表現を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질문) 그렇다면 그분들은 사실적으로 ‘신’을 만난 것이 아니며, 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質問)そうであれば、その方たちは、事実的に「神」に会ったことがなく、見たことがないということでしょうか。
    

그분들은 ‘하나’님의 원리, 즉 ‘진리’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어지고 있는 모든 것과, ‘하나님’은 나누어지고 분리될 수가 없는 절대적으로 ‘하나다’라는, 사실적 관계를 ‘자각’하며 ‘그것’이 또한 ‘나 자신’이다 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その方は、「神」様(訳者注:韓国語で神様は「ハナニム」と発音し、「一つ」は「ハナ」と発音する。ニムは「様」の意味)の原理、即ち、「真理」と「神」から由来しているすべてのこと、「神様」は分けて分離することができない絶対的に「一つだ」という、事実関係を「自覚」し、「それ」がまた「自分自身」であるということを理解するようにしたものです。    

(질문) ‘그것’이 ‘나 자신’이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質問)「それ」が「私自身」であると確信する理由は何ですか。
    

그러한 사실관계는 학식을 통해서 알아진 것도 아니며, 누군가에게 전해 들음으로써 알아진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확신’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확신’이 필요 없으며, 너무나 당연한 ‘이유’는 ‘신’에게 선택을 받아서도 아니고, ‘진리’를 이해해서도 아니며, 오직 ‘자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そのような事実関係は、学識を通じて知ったものではなく、誰かから伝え聞いたことによって知ったことでもありません。そして、私は「確信」をしていません。なぜなら、私にはあまりにも当然なので、「確信」が必要なく、あまりにも当然な「理由」は、「神」から選択を受けたことでもなく、「真理」を理解したのでもなく、ただ「自覚​​」しているからです。    

(질문) 오직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진리’와 ‘신’과 그 모든 것을 이해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質問)ただ「自覚​​」しているから、「真理」と「神」と、そのすべてのことを理解す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ことですか。
    

오직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진리’와 ‘신’과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를 이해하며, 그 ‘하나’가 ‘나’이자 ‘진리와 신’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육신과의 동일시로 비추어지고 있는 ‘지금의 나’는, ‘나’의 전부가 아니라 무한히 많이 그려질 수 있는 ‘나’의 미미한 일부라 할 수 있습니다.    

ただ「自覚​​」しているから、「真理」と「神」と、すべてのことを理解しているのではなく、ただ「一つ」を理解し、その「一つ」が「私」であり「真理と神」ということを理解しています。

したがって、肉体との同一視で照らされている「今の私」は、「私」のすべてではなく、無限に多く描かれ得る「私」の微々たる一部といえます。    

(질문) 그렇다 할지라도 ‘지금의 나’가 인식하고 있는 번뇌와 속박은 너무나 사실적입니다.    

(質問)そうであっても、「今の私」が認識している煩悩と束縛はあまりにも事実的です。
    

제가 말하고 있는 ‘자유’는, 번뇌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가 아니며, ‘신’에게 의지하고 기도하여 얻을 수 있는 자유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식하고 있으며, 인식할 수가 있는 부자유, 즉 속박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시로 인한 ‘지금의 나’만을 ‘나’로 여기는, 착각에 의한 환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다운 ‘자유’는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즉 ‘자각’하는 것입니다.    

私が言っている「自由」は、煩悩と束縛から抜け出す自由ではなく、「神」に頼って祈って得ることができる自由でもありません。なぜなら、認識していて、認識することができる不自由、即ち、束縛は、実在するのではなく、同一視による「今の私」だけを「私」と考える錯覚による幻影に過ぎないからです。したがって、真の「自由」は、自分自身を正しく知る、即ち、「自覚」することです。    

(질문) ‘생각’으로 도달할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質問)「考え」で到達することができないとおっしゃいました。
    

마음대로 자유롭게 ‘생각’을 할 수가 있는 이유는, 오직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며,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자유’ 그 자체는 생각으로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은 ‘자유’로서, ‘생각의 주인’, 즉 ‘나’는 명백한 전제입니다.    

心のままに、自由に、「考え」をすることができる理由は、ただ「考え」から自由であるからであり、「考え」から自由であるので、「自由」それ自体は考えで到達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しかし、「考え」をす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ことは、「自由」であって、「思考の主人」、即ち、「私」は明らかな前提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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