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每日宗敎新聞 日本語版
(韓日對譯)‘洞察!天問天答’(不滅の自覺)質問18
「私」は、「常に」自由であり、この「恒常的自由」は不変であるといえます。
기사입력: 2018/06/04 [06:45]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眞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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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8) ‘나는 무엇이며, 누구이다’는 순수할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으로부터의 순수입니까?    

(質問18)「私は何であり、誰である」は、純粋であり得ないとおっしゃいました。何からの純粋ですか。
    

‘나는 무엇이며, 누구이다’라고 여기면, ‘무엇과 누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규정이며 자기 정의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규정하고 정의할 수가 있는 것은 ‘나’이며, 내가 ‘나’를 규정할 수가 있는 것은, ‘나’는 ‘무엇이며, 누구이다’로부터 항상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지금의 나’로 존재한다고 여기고 있지만, 즉 내가 ‘나’를 ‘지금의 나’로 여기며 선택할 수가 있는 이유는, ‘지금의 나’로부터 자유로우며, 자유롭기 때문에 ‘나’는 존재하지 않음을 선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항상’ 자유로우며, 이 ‘항상적 자유’는 불변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私は何であり、誰である」と考えると、「何と誰」は、自分自身に対する自己規定であり、自己定義であるといえます。そして、規定して定義することができるのは「私」であり、私が「私」を規定することができるのは、「私」は「何であり、誰である」から常に自由だからです。つまり、「私」は「今の私」として存在すると考えていますが、つまり、「私」が「私」を「今の私」と考えて選択することができる理由は、「今の私」から自由であり、自由であるので、「私」は存在しないことを選択することもできるのです。だから「私」は、「常に」自由であり、この「恒常的自由」は不変であるといえます。   

따라서 관념으로부터의 순수는 ‘항상’ 자유롭지만, 관념적으로 규정되고 정의되어지는 ‘무엇이며, 누구이다’는 순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관계를 이해하고 나면 항상 순수하며 자유롭습니다.    

したがって、観念からの純粋は、「常に」自由ですが、観念的に規定されて定義されている「何かであり、誰である」は、純粋であり得ないのです。しかし、このような事実関係を理解し​​た後は常に純粋で自由です。    

(질문) 많은 방편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진경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저는 마치 ‘장님’ 같습니다.    

(質問)多くの手段に依存しています。眞鏡さんと話をしていると、私はまるで「盲人」のようです。
    

‘님’께서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아닙니다. 그러니 더듬을 지팡이가 필요하지 않으며, 누군가의 부축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눈’을 감고 있을 뿐입니다. 그냥 눈을 뜨세요!    

「あなた」は前を見ることができない「盲人」ではありません。だから、伝い歩くのに杖は必要なく、誰かの支えも必要ありません。ただ目を閉じているだけです。ただ目を開けて下さい。    

(질문) 진경님, ‘나’는 누구입니까?    

(質問)眞鏡さん、「私」は誰ですか。
    

그것을 저에게 물어서는 안 됩니다. ‘나’를 알기 위해서는 오직 ‘나’, 즉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하며, 자기 자신에게 묻기 전에 먼저 자기의 ‘규정과 정의’를 해체하세요.    

それを私に聞いてはいけません。「私」を知るためには、ただ「私」、即ち、自分自身に問うべきであり、自分自身に問う前に、まず自分の「規定と定義」を解体して下さい。    

(질문) 저에게는 ‘어떤 경계’가 있으며, 경계를 허물어뜨릴 방법은 무엇입니까?    

(質問)私には「どんな境界」があり、境界を崩す方法は何ですか。
    

아무 경계도 없습니다. 그러니 경계를 무너뜨릴 방법 또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지금의 나’로 여긴다 할지라도, 그것은 꿈과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나’와 ‘더 사실적인 나’와 ‘더더욱 사실적인 나’ 사이에는 어떤 경계도 없습니다. 비록 ‘경계’로 보여지고 있는 이러한 구분조차도 관념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떤 실체성도 없기 때문입니다.    

何の境界もありません。だから境界を崩す方法もまたあり得ません。なぜなら、自分自身を「今の私」と考えるとしても、それは夢のようです。そして「今の私」と「より事実的な私」と「さらにより事実的な私」の間には、どんな境界もありません。たとえ「境界」に見えるこのような区分さえも観念的になされていて、どんな具体性もないからです。    

(질문)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質問)助言をお願いします。
    

어떤 ‘존재’도 스스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존재’에게는 ‘끝’이 있으며, 끝이 있다는 것은 ‘시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에게는 주어진 ‘운명’이 있으며, 이 운명적 ‘태생적 한계’는 ‘존재’의 숙명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존재’에게는 ‘스스로’라는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존재’는 존재되어진 ‘무엇’이며, 존재되어지는 ‘무엇’이 있다는 것은, 존재되게 하는 존재하게 하는 ‘그것’으로서, ‘존재’보다는 더 사실적인 ‘그것’으로서, ‘태생적 한계’로 인한 어떤 운명도 어떤 숙명도 없는 ‘스스로’라고 하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どんな「存在」も自ら存在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なぜなら、「存在」には「終わり」があり、終わりがあるということは「始まり」が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だから「存在」は与えられた「運命」があり、この運命的な「生まれながらの限界」は「存在」の宿命といえます。だから「存在」には「自ら」という「自由意志」がないということは明らかです。だから、厳密に言えば、「存在」は存在することになった「何か」であり、存在することになる「何」があるということは、存在するようにする、存在させる「それ」であって、「存在」よりはさらに事実的な「それ」であって、「生まれながらの限界」によるどんな運命もどんな宿命もない「自ら」という「自由意志」があるということは明らかです。    

그러면 ‘스스로’라는 ‘자유의지’, 즉 더 사실적인 나는 당연한 ‘나’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육체와 동일시하여 ‘지금의 나’만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고 있다면, 어떤 삶을 산다 할지라도 ‘모순적인 삶’이며, 내가 삶을 살아간다고 여기고 있는 이상은 ‘모순적 삶’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유형의 삶을, 보다 풍족하게, 보다 효율적으로, 보다 평안하고, 보다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사실적인 나’를 먼저 알고 이해하고 그렇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태어나 삶을 살아오는 동안에, 종교를 선택할 수가 있었으며, 문화적 취미와 개성조차 선택을 할 수가 있었지만, 그리고 어떻게 살지, 어떻게 살아갈지를 선택할 수가 있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 앎’, 즉 ‘자각’, 즉 더 사실적으로 ‘깨어남―깨어 있음―깨달음’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상식이라는 것입니다.    

そうであれば、「自ら」という「自由意志」、即ち、より事実的な私は当然に「私」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それでも肉体と同一視して「今の私」だけを自分自身と考えているとしたら、どんな生を生きるとしても、「矛盾的な生」であり、私が生を生きていくと考えている以上は、「矛盾的な生」と見ることができます。だから、どんな類型の生を、より豊かに、より効率的に、より平安に、より幸せに生きていくことが重要なのではなく、「より事実的な私」を先ず知って、理解して、そうなることが重要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

したがって、生まれて生を生きてきた間に、宗教を選択することがあり、文化的な趣味と個性さえ選択を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が、どう生きるか、どう生きていくのかを選択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が、自分自身に対する「自己知」、即ち、「自覚」、即ち、より事実的に「目を覚ますこと-目覚めていること-悟り」は、選択の問題ではなく、当然の常識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으며, 많은 수행법과 수행단체가 있습니다. 그에 따라 많은 방편과 많은 교리가 있으며, 많은 계율이 있으며, 많은 의식행사가 있으며, 또 다양한 ‘신’이 있습니다. 다양한 ‘삶’의 유형이 있으며,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선택’의 문제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사실적인 ‘자기 자신’으로 깨어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깨달음’의 길을 ‘선택’했으며, 각고의 수행과 노력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오류일 수밖에 없으며, ‘깨달음’은 삶을 살아간다고 믿고 있는 ‘지금의 나’가 증득하고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드러나게 하는, 살아지게 하는, 즉 비록 잠을 자고 꿈을 꾸고 있지만 ‘더 사실적인 나’가 깨어나는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깨달음’은 모든 지성 인류에게, 가장 먼저 반드시 해야 할 상식인 것입니다.    

世の中には多くの宗教があり、多くの修行法と修行団体があります。それに応じて多くの方法と多くの教理があり、多くの戒律があり、多くの儀式行事があり、また多様な「神」がいます。多様な「生」の類型があり、多様な「生」の方式があります。すべてが「選択」の問題として見ることができます。しかし、より事実的な「自分自身」として目が覚めることは、選択の問題となり得ません。だから、私が生を生きていく間に、「悟り」の道を「選択」し、刻苦の修行と努力を通じて「悟り」を得たと考えるのであれば、間違いであるしかなく、「悟り」は、生を生きていくと信じている「今の私」が証得して目覚めさせるものではなく、生を明らかにする、生きることにする、即ち、眠って夢を見ているが、「より事実的な私」が目覚めるものであるといえます。だから「悟り」は、すべての知性人類に、最初に必ずしなければならない常識なのです。    

(주석)

살아지다 ― 과거, 현재, 미래적인 의미가 아닌, 결론적이며 어떠한 능동성도 없다는 의미이다.

Ex) 이렇게 살던 저렇게 살던, 이렇게 사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살게 되는 것도 아니고, 살아지는 것이다.    

(注釈)

生きることになる-過去、現在、未来的な意味ではなく、結論であり、いかなる能動性もないという意味である。

Ex)このように生きても、あのように生きても、生きるのではなく、生きることになるものでもなく、ただ生きていく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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