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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 天問天答
(韓日對譯)‘洞察!天問天答’(不滅の自覺)質問19
救いというものがないので、救ってくれる人もいません。
기사입력: 2018/06/11 [09:24]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眞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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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9) 오랜 세월을 ‘깨달음’의 증득만을 위해 정진해 왔습니다. 저의 공부와 마음가짐을 돌아보니 ‘진정성’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質問19)長年「悟り」の証得だけのために精進してきました。私の勉強と心構えを振り返ってみると、「真正性」が不足しているようです。
    

아주 좋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로서는 ‘깨달음’의 증득을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나’로서 ‘무엇’을 알고 이해하고 깨우친다 하여, ‘깨달음’이 증득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는 단지 ‘나’에 대한 그릇된 ‘오해’라는 것을 알고 ‘자각’하는 것이 참다운 ‘깨어남’으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랜 세월을 ‘깨달음’의 증득만을 위해 정진하고 매진해 왔으며, 그로 인해 ‘나’는 이렇게 알게 되고, 저렇게 깨우치고, 이러한 경지와 저러한 능력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앎’의 정점에 도달하여 모르는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되어진‘나’는 ‘지금의 나’이며, 그 나는 주어진 ‘운명과 숙명’에 의해 죽어질 것입니다.    

とても良いことです。なぜなら、「今の私」としては、「悟り」の証得を話すことができません。だから、「今の私」として「何」を知り、理解して悟ったとして、「悟り」が証得されるものではなく、「今の私」は、単に「私」に対する誤った「誤解」であるということを知り、「自覚」することが真の「目覚め」と見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つまり、長年「悟り」の証得のためだけに精進して邁進してきて、それによって「私」はこのように知ることになり、あのように目覚めて、このような境地とあのような能力に到達した、そして、「知」の頂点に到達して分からないことがないとしても、そのようになった「私」は「今の私」であり、その私は、与えられた「運命と宿命」によりぬことになるのです。    

따라서 자기 정의, 즉 ‘나는 무엇이며, 누구이다’가 관념적이며, 이러한 관념으로 인해서 ‘나’는 정의되어질 수가 없다는 분명한 ‘자각’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최종적 ‘앎’ 또한 아무것도 모른다가 가장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앎’의 정점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したがって、自己定義、即ち、「私は何であり、誰である」が観念的であり、このような観念によって「私」は定義され得ないという明確な「自覚」は、「私」は何でもなく、何でもないことに対する最終的な「知」もまた、何も知らないが、最も妥当なことです。したがって、何も知らないことを知ることが「知」の頂点であると見ることができます。    

(주석)
죽어지다 ― 과거, 현재, 미래적인 의미가 아닌, 결론적이며 어떠한 능동성도 없다는 의미이다.
Ex) 이렇게 죽던 저렇게 죽던, 이렇게 죽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죽게 되는 것도 아니고, 죽어지는 것이다.    

(注釈)
死ぬことになる-過去、現在、未来的な意味ではなく、結論であり、いかなる能動性もないという意味である。
Ex)このように死んでも、あのように死んでも、このように死ぬのでもなく、あのように死ぬのでもなく、死ぬことになるのです。    

(질문)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며, 많이 알고 있으며,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質問)ほとんどの修行者はある程度知っており、多くを知っており、すべてのことを全部知っていると考えています。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입니다. 따라서 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항상 ‘무엇’이 되어서 탈이고, 너무 많이 알아서 탈이고,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진정성’이 결여되는 것입니다.    

しかし、何でもなく、何でもないことについて何も知らないということは、あまりにも常識的です。したがって、私は、何も知らないということを知っています。

常に「何か」になっても問題であり、あまりにも知っていても問題であり、多くを知っていると思っているので「真正性」が欠如するのです。    

(질문) ‘스스로’ 다 알지 못하면 영원히 ‘속박’이지만, 진정한 ‘자유’는 모름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하셨습니다.    

(質問)「自ら」すべてを知ることができなければ、永遠に「束縛」ですが、真の「自由」は、知らないことから自由だとおっしゃいました。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비춰보는 그 마음으로, 그 마음에서 ‘창조’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시작’되기 이전에, 무형의 ‘대 자유’, 즉 고요와 정적으로 대변될 수가 있는, 알 수 없는 ‘무엇’이 불현듯 ‘자각’, 즉 ‘나’는 무엇인가? 를 일으키며,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극대화하면서, 그 과정에서 ‘지성적 의지’가 발현이 되고, 그 발현을 통해서 무한 가능성과 무한 다양성이, 무한 창조성으로 전환되며 ‘존재로의 잠재력’으로 응축되고 응집되었습니다.    

自分自身が「何なのか」分からないので、照らして見るその心で、その心から「創造」が起こるのです。すべてが「始まる」前に、無形の「大自由」、即ち、静けさと静寂に代弁され得る、知ることができない「何か」がふと「自覚」、即ち、「私」は何であるかを起こし、「自分自身」に対する関心を最大化しながら、その過程で「知性的な意志」が発現され、その発現を通じて無限の可能性と無限の多様性が、無限の創造性に転換されて、「存在としての潜在力」に凝縮されて凝集されています。    

그리고 이 응축과 응집은 고밀도의 ‘한 점’으로 나타났으며, 이 한 점은 ‘태생적 한계’를 가짐으로 해서, 완전을 지향하며 ‘존재로의 여정’, 즉 대폭발이 일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창조’를 유발하고 유지시키는 힘, 즉 ‘원초적 생명’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 즉 ‘자기 사랑’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점진적으로 보충 설명 드리겠습니다.      

そして、この凝縮と凝集は、高密度の「一点」に現れて、この一点は、「生まれながらの限界」を持つとして、完全を志向して「存在としての旅程」、即ち、大爆発が起きたのです。したがって、「創造」を誘発して、維持させる力、即ち、「原初的生命」は、結局、自分自身に対する関心、即ち、「自己愛」といえます。 -この部分は少しずつ追加説明致します。-    

그러니 역설적이지만 이 ‘원초적 생명’은 내가 스스로 ‘자각’하여, 내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며, 만약에 알고 있다고 여긴다면, 알고 있다는 ‘생각’에 갇혀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실상’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른다, 즉 나는 모른다, 단지 모른다는 것을 안다, 즉 모름으로부터의 ‘자유’라 할 수가 있으며, 이러한 사실을 ‘스스로’로 알지 못하면 영원한 ‘속박’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したがって、逆説的ですが、この「原初的生命」は、私が自ら「自覚」して、私が何なのかを知らないことから出てくるものであり、もし知っていると考えたなら、知っているという「考え」に閉じ込められてしまうのです。したがって、「生命の実像」は、「私」は何でもなく、何でもないので、何も知らない、即ち、私は知らない、ただ知らないことを知っている、即ち、知らないからの「自由」といえ、このような事実を「自ら」知らなければ、永遠の「束縛」といえます。    

(질문) ‘스스로’ 알지 못하면 이러한 ‘앎’조차 미완성입니까?   

(質問)「自ら」知らなければ、このような「知」さえも未完成ですか。
    

단언컨대 그렇습니다. ‘자기 앎’은 자기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인 ‘나’는 오직 ‘하나’이며, 그 ‘하나’가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구원자도 없습니다.    

断言しますが、そうです。「自己知」は、自分「自ら」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なぜなら、「自ら」である「私」はただ「一つ」であり、その「一つ」が全部だからです。

したがって、救いというものはありません。救いというものがないので、救ってくれる人もいません。    

(질문) 오랜 세월을 ‘기도’하였지만 어디에도 이러한 ‘답’은 없었습니다.    

(質問)長年「祈り」ましたが、どこにもこのような「答え」はありませんでした。
    

제가 하고 있는 이야기는 ‘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일한 답은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고 ‘통찰’을 하세요.    

私がしている話は「答え」になり得ません。なぜなら、唯一の答えは、まさに「自分自身」であるからです。したがって、「自分自身」について「関心」を傾け「洞察」をして下さい。    

(질문) ‘자기 앎’은 ‘스스로’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質問)「自己知」は「自ら」知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おっしゃいました。
    

누군가가 알려주었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어떤 경전에 있다 할지라도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앎’은, 오직 ‘자각’에 의해서 알려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誰かが教えてくれたとしても、「自ら」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どんな経典にあるとしても、「自ら」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なぜなら、「自己知」は、ただ「自覚」によって知ることができる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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