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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對譯)‘洞察!天問天答’(不滅の自覺)質問20

眞鏡 | 기사입력 2018/06/22 [08:30]
見る者と見えるものとの関係は「同時多発的」です

(韓日對譯)‘洞察!天問天答’(不滅の自覺)質問20

見る者と見えるものとの関係は「同時多発的」です

眞鏡 | 입력 : 2018/06/22 [08:30]
― 순리 ―   

흔히 우리 하는 말 중에, 사람이 죽으면 되돌아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한 사람은,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유지시키는 생명과 그 육체와 생명을 주관하는, 지성적 이해를 가질 수 있는 정신, 다시 말해 ‘나’라는 보편적이고 단일한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의 물방울이 바다에서 일어나 바다로 되돌아가듯이, 사람이 죽으면, 물질 육체는 가장 기본적인 원소로 환원되어, 이 우주만물에 합일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만물을 유지시키는 우주생명에 합일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여 순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신, 내 보편적 의식 또한 우주정신, 보편적 우주의식으로 합일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순리’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順理 -     

よく私たちがする言葉の中に、人が死ぬと戻って行く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    

少し深く見てみると、一人は、物質肉体と、その肉体を維持させる生命とその肉体と生命をつかさどる、知性的に理解を持つことができる精神、つまり「私」という普遍的であり、単一の「意識」で構成されています。    

一つの水滴が海から生まれ海に戻って行くように、人が死ねば、物質肉体は最も基本的な元素に還元され、この宇宙万物に合一されてしまいます。そして、その肉体を維持させた生命はどこかに行くのではなく、この宇宙万物を維持させる宇宙の生命に合一されてしまいます。    

これはあまりにも当然であり、「順理」であると言えます。    

そうであれば、私たちの精神、私の普遍的な意識もまた宇宙の精神、普遍的な宇宙意識に合一されるのは、当然の「順理」であると言えるのです。    

(질문20) 존재와 비존재를 넘어서 있는 ‘대 자유’로서의 ‘나’로 거듭나라고 하시지만, 두려운 느낌이 듭니다. 구체적으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質問20)存在と非存在を越えている「大自由」としての「私」に生まれ変わりなさいとおっしゃいますが、恐ろしい感じがします。具体的に説明をお願いします。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의 관계는 ‘동시다발적’입니다. 그리고 동시다발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어느 것’이 어떤 한쪽의 ‘전제’라고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보는 자가 없으면, 보이는 것에 대한 증언을 할 수가 없으며, 보이는 것이 없으면 보는 자도 정의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의’되어진다는 것은, 의존적이며,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경험자와 경험되어지는 대상이 상호의존적이듯이, 주시자와 주시되어지는 대상이 상호의존적이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상호의존적 관계가 성립되는 세계는, 즉 ‘나눔과 분리’의식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육체와 동일시하여 만들어낸 관념, 즉 ‘지금의 나’가 감각기관에 ‘의존’하여 인식하고 지각하는 무의식의 세계이자, 꿈일 수밖에 없으며 꿈인 것입니다.    

見る者と見えるものとの関係は「同時多発的」です。そして、同時多発的という理由は、「どちらか」がどちらか一方の「前提」とは言うことができないからです。即ち、見る者がいなければ、見えるものに対して証言をすることができず、見えるものがなければ、見る者も定義されることができないからです。だから、「定義」されるということは、依存的であり、相互依存的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例えば、経験者と経験される対象が相互依存であるように、注視者と注視されることになる対象が相互依存的であるようだ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相互依存的な関係が成立する世界では、即ち、「分けることと分離」意識は、実在するものではなく、私が「私」を肉体と同一視して作られた観念、即ち、「今の私」が感覚器官に「依存」して認識して知覚する無意識的な世界であり、夢でしかなく、夢なのです。    

따라서 ‘꿈을 깨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분명한 사실관계를 외면하고 ‘무의미한 꿈’을 계속 꾸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것이 정상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닌’, ‘대 자유’로서 ‘나’는, 지극히 상식이며 정상적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したがって、「夢を覚ますこと」に対して恐れることではなく、このような明らかな事実関係に背いて、「無意味な夢」を見続けることについて恐れていることが正常的であるといえます。ただ「有でもなく、無でもない」「大自由」であって、「私」は、至極常識であり、正常的といえます。    

(질문) ‘주시자’도 최종적이라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까?    

(質問)「注視者」も、最終的と言えないということですか。
    

주시자와 주시되어지는 대상은 상호의존적이며, 동시에 드러나려면 먼저 ‘시작’이 있어야만 하며, 시작되어지는 것은 ‘끝’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최종적일 수가 있는 것은 변함이 없으며, 변함이 없는 것은 ‘시작’ 이전의 ‘무엇’이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주시자’는 최종적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注視者と注視されることになる対象は、相互依存であり、同時に、現れるには、まず「始まり」がなければならず、始まることになるものは「終り」により終わるのです。しかし、最終的であり得るのは変わりなく、変わらないのは「始まり」前の「何か」でなければなりません。したがって、「注視者」は、最終的であると言えません。    

(질문) 제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저 자신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낍니다.    

(質問)私が「自分」について関心を傾けようと努力してはいますが、私自身が「何であるのか」分からないことについて恐れを感じています。
    

저도 제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단지 제가 무엇인지를 모를 뿐이지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상상과 추측’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무엇’이 되어왔으며, ‘누군가’가 되어왔으며, 동일시로 인해서 ‘지금의 나’가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의 나’가 되기 이전에는 ‘무엇’이었습니까? ‘지금의 나’가 되기 이전이 더 사실적이지 않습니까?    

私も私が「何なのか」は知ることができません。しかし、私は恐れていません。なぜなら、私は、ただ私は何なのか分からないに過ぎず「何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想像と推測」をしていないからです。常に「何か」になってきて、「誰」になってきて、同一視によって「今の私」になってしまいました。「今の私」になる前には「何」だったのですか。「今の私」になる前がより事実的ではありませんか。    

저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도달했으며,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앎’조차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습니다. 따라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모른다, 단지 모른다는 것만을 안다! 저는 정말로 제가 ‘무엇이며, 누구인지’만을 알고 싶었습니다.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私は「何でもないもの」に到達しており、「私自身」が何でもなく、何でもないことに対する「知」さえ何もないことを「自ら」知りました。したがって、「私」は何でもなく、何も知らない、ただ知らないことだけを知る。私は本当に私が「何であり、誰なのか」だけを知りたいです。「何か」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考えはしませんでした。    

(질문) 이해를 하고는 있는 것 같은데, 두려움은 여전합니다.    

(質問)理解をしてはいますが、恐れは依然としてあります。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해’를 한다는 것은 그 ‘앎’이 가리키고 있는 곳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무엇이며, 누구이다’의 측면에서는 어떤 이해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 즉 동일시를 해체하는 것이 이해의 ‘시작’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知ること」にとどまらず、「理解」をするということは、その「知」が指している場所に出て行くということです。つまり「私は何であり、誰である」の側面では、どんな理解もできないのです。「今の私」、即ち、同一視を解体することが理解の「始まり」であるといえ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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