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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對譯)‘洞察!天問天答’(不滅の自覺)質問21

眞鏡 | 기사입력 2018/06/25 [07:23]
「私」は何も知らないことを知っています。

(韓日對譯)‘洞察!天問天答’(不滅の自覺)質問21

「私」は何も知らないことを知っています。

眞鏡 | 입력 : 2018/06/25 [07:23]
(질문21) ‘나는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무엇이다’라는 ‘앎’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質問21)「私は何なのか分からない」ということを知らないので、「何である」という「知」に陥るようです。    

‘나’는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이야기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개념적, 언어적 표현과 정의로써 도달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다’라는 ‘앎’에 빠지는 것은, 내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는 ‘무엇과 누군가’일 것이라고 상상하고 추측하기 때문, 즉 ‘나는 무엇이며, 누구이다’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私」は何なのか分からないという話は、「私」は「何でもない」ということを言おうとしたものです。そして、どんな概念的、言語的表現と定義によって到達す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ことを言おうとしたものです。そして、「何である」という「知」に陥ることは、私が「何なのか」を分からないからではなく、自分は「何と誰か」であることを想像して推測するので、即ち、「私は何であり、誰である」と考えているからです。    

따라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したがって、「私」は何も知らないことを知っています。 
 
(질문) 아무것도 아닌 것이 이 우주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자연스럽다고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質問)何でもないことが、この宇宙で最も強く、最も自然だとおっしゃる理由は何ですか。    

‘아무것’은 반드시 ‘시작’되었으며, 그로 인해 반드시 ‘끝’날 것입니다. 그리고 ‘시작’되었기 때문에 ‘시작 이전’의 ‘무언가’에게 의존적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은 일말의 ‘저항성’도 없기 때문에, 가장 자연스러우며 가장 강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何か」は必ず「始まり」、それによって必ず「終わる」のです。そして、「始ま」ったため「始まる前」の「何か」に依存的であるといえます。しかし、「何でもないもの」は、一抹の「抵抗性」もないので、最も自然で最も強いといえます。    

(질문) 저는 불가의 ‘윤회설’을 믿고 있습니다. ‘깨달음’을 통해서 과연 이 윤회의 사슬, 즉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으며, 불생불멸의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까?    

(質問)私は仏家の「輪廻説」を信じています。「悟り」を通じて、果たしてこの輪廻の鎖、即ち、「束縛」から抜け脱すことができ、不生不滅の境地に到達することができますか。
    

불가에서 말하고 있는 ‘윤회설’을 믿고 있다면, 이번 생 이전의 전생이 수백 수천 번 있었을 겁니다. 수백 수천 번의 환생을 해 왔으며, 수천 번의 다양한 ‘삶’이 있었으며, 수천 번의 ‘죽음’ 현상을 겪었을 겁니다. 수천 번의 다양한 ‘삶’에는 상상할 수가 없을 정도의 다양한 사건과 상황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이렇게’ 멀쩡하게 있습니다.    

仏家で言っている「輪廻説」を信じているとしたら、今回の生以前の前世が数百、数千回あったと思います。何百何千回生まれ変わりをしてきて、数千回の多様な「生」があり、数千回の「死」の現象を経験したのです。数千回の多様な「生」には、想像することができない程の多様な出来事や状況があったと思います。そして、「今ここにこのように」完全にあります。    

‘지금 여기 이렇게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 사람의 인생조차도 ‘파란만장’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천 번의 ‘파란만장’을 겪고서도 ‘지금 여기 이렇게’ 있습니다. 천만고 영웅호걸조차 ‘죽음’ 앞에서는 무기력하게 피살되어지는데, 수천 번의 ‘죽음’을 맞이하고서도 ‘지금 여기 이렇게’ 있습니다. 수천 번의 ‘파란만장’에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여기 이렇게’ 있을 수가 있으며, 수천 번의 ‘죽음’에, 단 한 번도 실제적으로 죽은 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 여기 이렇게’ 있는 것 아닙니까?    

「今ここにこのようにいる」ということは何を意味するのですか。一人の人生さえも「波瀾万丈」とよいます。ところが、数千回の「波瀾万丈」を経験しても、「今ここにこのように」います。千年万年昔の英雄豪傑さえ「死」の前では無力に殺されることになりますが、数千回の「死」を迎えても「今ここにこのように」います。数千回の「波瀾万丈」に何の影響も受けていないので、「今ここにこのように」いることができ、数千回の「死」に、ただ一回も実際的に死んだことがないので、「今ここにこのように」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か。    

불생불멸, 즉 태어난 적이 없는 것이 죽지 않는다. 수천 번의 ‘죽음’을 겪고서도 ‘지금 여기 이렇게’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불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천 번의 ‘파란만장’을 통해 겪었다고 생각하는 ‘속박’ 또한 나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함이 분명합니다.    

不生不滅、即ち、生まれたことがないものは死なないのです。数千回の「死」を経験しても、「今ここにこのように」いるということは、既にそれ自体で不滅を指しています。そして、数千回の「波乱万丈」を通じて経験したと考える「束縛」もまた私に何の影響も与えることができないことは明らかです。    

(질문) 그러나 ‘불생’은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質問)しかし、「不生」は解決されていません。
    

스스로, ‘태어났다’라고 그렇게 여기지 않으면 됩니다.    

自ら、「生まれた」とそのように考えなければよいのです。    

(질문) 그러나 불가의 수천 년 전통의 ‘윤회설’입니다.    

(質問)しかし、仏家の何千年の伝統の「輪廻説」です。
    

윤회설을 받아들이는 것은 ‘지금의 나’이며, 윤회의 사슬, 즉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염원하고 소망하는 것도 결국은 ‘지금의 나’입니다. 꿈을 깨어나려고 하는 것도 ‘지금의 나’입니다. 그러나 깨어나고 나면 ‘지금의 나’는 꿈과 함께 깨어져 버립니다.

따라서 ‘지금의 나’로서 꿈을 깨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라는 꿈을 깨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輪廻説を受け入れるのは「今の私」であり、輪廻の鎖、即ち、「束縛」から抜け出そうと念願して所望することも、結局は「今の私」です。夢を覚まそうとするのも「今の私」です。しかし、目を覚ましたら、「今の私」は、夢と一緒に覚めてしまいます。

したがって、「今の私」としての夢を覚ますのではなく、「今の私」という夢を覚ますことが妥当であるといえます。    

(질문) ‘깨달음’을 통해서 ‘지금의 나’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무엇입니까?    

(質問)「悟り」を通じて「今の私」が得ることができる利得は何ですか。
    

단언컨대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 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동일시로 인한 ‘지금의 나’는 온전한 ‘나’일 수가 없기 때문이며, 깨어난다는 것은 ‘지금의 나’가 의식적으로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断言しますが、「今」としては何もないと言ってあげたいです。なぜなら、同一視による「今の私」は、完全な「私」であることができないからであり、目が覚めることは「今の私」が意識的に死ぬことだ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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