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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對譯)‘洞察!天問天答’(不滅の自覺)質問25

眞鏡 | 기사입력 2018/07/19 [09:30]
自己定型が解体されれば、常に自由です。

(韓日對譯)‘洞察!天問天答’(不滅の自覺)質問25

自己定型が解体されれば、常に自由です。

眞鏡 | 입력 : 2018/07/19 [09:30]
(질문25) 수행자들의 ‘나는 누구인가?’와 진경님의 ‘나는 누구인가?’의 차이점은 무엇이며, 왜 그렇습니까?   

(質問25)修行者たちの「私は誰なのか」と眞鏡さんの「私は誰なのか」の違いは何であり、なぜそうなのですか。
    

수행자분들과 저의, ‘나는 누구인가?’는 어떤 차이도 없지만, 이러한 의문과 관심 이전에 주체로서, ‘나’를 무엇으로 여기고 있는지에 대한 차이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저를 ‘무엇이며, 누구이다’라고 동일시하지 않으며, 그로 인해 저의 ‘나는 누구인가?’는 단지 의문에 답만을 찾고자 하는 단순한 의구심이 아니라, 저 자신에 대한 ‘사랑’ 즉 관심의 발로로서, ‘나는 누구인가?’이기 때문이며, 자기 자신의 무한성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제 자신의 ‘항상성’으로 인해 ‘나는 누구인가?’ 또한 끝이 없으며 항상적이기 때문입니다.    

修行者の方々と私の「私は誰なのか」は何の違いもありませんが、このような疑問と関心以前の主体であって、「私」を何であると考えているかに対する違いはあります。

なぜなら、私は私を「何であり、誰である」であると同一視せずに、それにより私の「私は誰なのか」は、単に疑問に答えるだけを探している単純な疑問ではなく、私自身に対する「愛」即ち関心の発露であって、「私は誰なのか」であるためであり、自分自身の無限性により自分自身を知っていくことは、終わりがないことを知っているので、私自身の「恒常性」により「私は誰なのか」もまた終わりがなく、恒常的だからです。    

그런데 대다수의 수행자분들은 ‘나는 무엇이며, 누구이다’라는 자기 정의와 자기규정을 해체하지 않고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해결을 하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의문’은 ‘나는 누구이다’에게 또 하나의 ‘속박’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나는 누구인가?’는 단순히 ‘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저 자신에 대한 관심이자, 저 자신에 대한 사랑이라 할 수가 있으며, ‘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나는 누구인가?’는 그 자체로 자유롭습니다.    

ところが、大多数の修行者の方は「私は何であり、誰である」という自己定義と自己規定を解体せずに、「私は誰なのか」という疑問を持って解決をしようとだけしています。だから、その「疑問」は「私は誰である」にもう一つの「束縛」となってしまうのです。しかし、私の「私は誰なのか」は、単に「答え」を要求するのではなく、まさに私自身に対する関心であり、私自身に対する愛であるといえ、「答え」を必要としない「私は誰なのか 」は、それ自体で自由です。    

(질문) ‘구속적인 상태’에서는 어떤 참된 이상을 실현할 수가 없으며, 실현을 할 필요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質問)「拘束的な状態」では、どんな真の理想も実現することができず、実現する必要もないとおっしゃいました。
    

왜냐하면 모든 것이 ‘시작’되기 이전, 즉 ‘있음’도 아니며 ‘없음’도 아닌, 고요와 정적으로 대변될 수가 있는, 즉 알 수 없는 ‘무엇’이 스스로 말미암아 불현듯 ‘자각’을 하며, 이 ‘자각’으로 인해 모든 것이 드러나며 시작되었기 때문이며, 모든 ‘시작’, 즉 ‘창조’는 자유를 통해서 자유라는 바탕 위에서 자유라는 이치에 따라, 자유롭게 펼쳐지고 드러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なぜなら、すべてが「始まる」前、即ち「有」でもなく「無」でもない、静けさと静寂に代弁され得る、即ち、知ることができない「何か」が自らによってふと「自覚」をし、この「自覚」によりすべてが現れ始めたためであり、すべての「始まり」、即ち「創造」は、自由を通じて自由という土台の上で自由という理致にしたがって、自由に展開されて現れているものといえるからです。    

따라서 ‘창조’, 즉 참된 이상은 ‘자유’를 통해서 ‘자유’라는 바탕 위에 ‘자유’라는 이치에 따라, 자유롭게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구속적인 상태에서는 이상을 실현할 수도 없으며, 실현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したがって、「創造」即ち真の理想は「自由」を通じて「自由」という土台の上に「自由」という理致にしたがって、自由に現れるものであるため、拘束的な状態では理想を実現することもできず、実現する必要もないのです。    

(질문) ‘구속적인 상태’는 무얼 가리키고 있습니까?    

(質問)「拘束的な状態」は、何を指していますか。
    

자기 자신에 대한 규정과 정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지고 있는 ‘지금의 나’는, 내가 스스로 ‘나’에 대해서 규정한 ‘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내가 스스로 정의내린 ‘구속적 상태’에 불과할 뿐입니다.    

自分自身に対する規定と定義を指しています。肉体との同一性に照らされている「今の私」は、私が自ら「私」について規定した「私」の影に過ぎず、私が自ら定義を下した「拘束的状態」に過ぎないだけです。    

(질문) 저는 아직까지도 ‘나는 누구인가?’를 화두 삼아서 공부하고 있지만, ‘답’을 찾고자 하는 염원이 큽니다.    

(質問)私は未だに「私は誰なのか」をテーマとして勉強していますが、「答え」を探そうとする願いが大きいです。
    

‘나는 누구인가?’를 화두삼아서 공부하는 것이 가장 즉각적이다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공부가 깊어지면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구속적인 상황은 ‘나는 무엇이며, 누구이다’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정형이 해체되고 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무엇’으로서 항상 자유롭습니다. 무엇이든지 될 수가 있으며, 무엇이든지 선택할 수가 있는 ‘나’는 항상 자유로우며,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 말미암음’, 즉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私は誰なのか」をテーマとして勉強することが最も早いといえます。そして、本当に勉強が深くなれば、「答え」を探すことではなく、自由になるのです。なぜなら、すべての拘束的な状況は「私は何であり、誰である」から出てくるからです。

したがって、自己定型が解体されれば、「私」は何もない「何か」であって、常に自由です。何にでもなることができ、何でも選択することができる「私」は、常に自由であり、自由であり得る理由は「自ら起因すること」、即ち「自由」であるからです。    

(질문) ‘나는 누구이다’가 해체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어렵습니다.    

(質問)「私は誰である」が解体されるべきだとおっしゃいますが、難しいです。
    

제가 말로는 해체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누구이다’가 실체가 아님을 알면 되는 것입니다. 즉 나는 ‘누구이다’가 실체가 아니라, ‘누구이다’로 ‘나’를 동일시하고 있는 ‘나’가 실체라는 겁니다.    

私は言葉では解体されるべきといいますが、「私は誰である」が実体がないことを知ればよいのです。即ち、私は「誰である」が実体ではなく、「誰である」と「私」を同一視している「私」が実体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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