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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대표적인 집성촌 양동마을을 통해 본 전통 마을의 형성과 입지 특성
지복의 삶을 찾는 해법의 열쇠가 있는 전통마을
기사입력: 2018/08/07 [15:38]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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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삶을 찾는 해법의 열쇠가 있는 전통마을
   

전통 마을은 물리적 공간과 그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융합하여 만들어낸 하나의 의미 체계로서 존재한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사회 문화적 공동체의 공간이다. 문화 사회적, 사상적, 환경적 측면에서 그 의미 체계를 해석해 보면, 거기에는 놀랄 만큼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소중한 가치들이 깃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전통 마을에는 공동체의 결속과 소통을 뒷받침하여, 구성원 모두가 바라는 지복의 삶을 찾을 수 있게 하는 해법의 열쇠가 있다. 거기에는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 공존할 수 있는 다양하고 건강한 논리들이 있다.    

우리나라의 독특한 마을 구성으로 씨족 중심의 집성촌을 들 수 있다. 씨족은 동일한 성씨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전체가 동일 성씨인 경우보다 특정 성씨가 다수를 점유하는 모습이다. 그 대표적인 마을로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을 들 수 있는데 이들 마을은 조선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집성촌이었다. 18세기경의 하회마을은 풍산 유씨 문중이 마을을 거의 지배하고 있었다. 양동마을의 경우는 본래 손씨 집안과 뒤에 마을에 정착한 이씨 두 집안이 마을을 지배하는 경우다. 집성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부터 성리학적 이념과 중국식 풍습을 따라 부계 중심의 가부장제가 정착되면서 시작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양란을 거치면서 마을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라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경우 자신들을 지켜줄 집단으로 동일 씨족을 선택한 것이다. 이런 의식의 변화는 제사와 혈족을 중시하는 계기가 되었고, 향촌의 지역 사족화와 장자나 남성 위주의 봉제사(奉祭祀)는 접객이 혈연관계의 남성중심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혈족위주로 이루어진 접객은 외(外)의 개념이 아닌 내(內)의 개념으로 흡수되었다. 외(外)의 개념을 갖던 공간들은 주(主)의 성격이 더 강해지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의식은 근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던 족보 열풍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주로 농촌의 양반 계층에 의해 전개되었다. 양반들은 주변 농토를 개간하고 혼인 관계를 통해 재산을 증대시키면서 경제력을 늘려 나갔다. 이렇게 형성된 재산을 장자에게 독점적으로 물려줌으로써 같은 핏줄로 이어진 씨족간의 결속을 강화하였다. 그 결과 특정 지역에서 나름의 자치권을 형성하며 지방 수령과의 기 싸움도 다반사로 일어났다. 집성촌이 형성된 곳으로 자리 잡은 위치는 넓은 경작지를 낀 산 아래 자락이 많다. 산을 뒤에 등지고 앞에는 마을 소유의 논밭이 펼쳐져 있다. 이와 같은 구조는 풍수적 입장과 농토의 관리에 유리하고 뒷산으로부터는 바람을 막고 맑은 계곡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이상적으로 꼽힌다. 마을은 길에서 바로 보이는 개방된 곳보다는 언덕 하나 정도 들어와 있는 가려진 곳이 선호된다.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사상은 집성촌 마을 입지에서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런 것들은 풍수지리와 같은 전통적인 지리관과 선비들의 은둔적인 자세, 또는 잦은 전란에 의한 영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물론 이처럼 가려진 곳이 아니라도 하회마을처럼 주변 자연 경관이 빼어나고 물이 가까이 있어서 경작이나 생활에 편리한 곳에 큰 마을이 형성된 곳도 적지 않다.     

서원 등 마을 공동의 유교적 시설 갖춘 집성촌...구심적 역할은 종가    

집성촌의 또 다른 특징은 마을 공동의 유교적 시설을 갖추고 있는 점이다. 마을에는 서원이나. 정려각, 제각 등을 세우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배치다. 이들 공간은 성리학의 이념을 구현하고자 하는 조선의 통치 철학을 중심으로 하는 구조다. 조상 숭배는 문중의 종교적 구심적 역할과 함께 종원들의 종적 서열화 구조로 발전하였다. 서원은 중국 당나라 말기부터 시작된 사설 교육기관이다. 우리의 경우 중종 38년(1543)에 풍기 군수 주세붕이 고려 말 학자 안향(安珦)을 흠모하며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그 효시다. 집성촌에서 서원의 설립은 문중 중심의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는 사설교육기관의 성격이 강하다. 이전 시대 세워진 서원처럼 유명한 학자를 봉향하는 것이 아니고 마을을 처음 개창한 조상이거나 문중에서 특별히 학문적 명성을 얻은 인물을 모시는 문중 교육기관이다. 정려각이나 제각은 성리학의 근본인 부모나 가족에 효성을 다하거나 나라에 충성을 바친 업적이 인정되는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시설들인데 이런 시설을 마을 눈에 잘 띄는 곳에 설치함으로써 정신적인 감화를 꾀하는 것이다. 아울러 마을 학동들을 위한 서당을 지어 문중만의 폐쇄적인 교육 시설로 활용하고 마을 어귀에 정자를 지어 마을 공동의 휴식과 집회 장소로 활용하는 것도 집성촌에서 볼 수 있는 시설들이다. 이런 여러 시설과 함께 집성촌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구심적 역할은 역시 종가이다. 종가는 마을 사람들이 한 핏줄임을 확인시켜주는 구심점이며 밖으로는 씨족을 대표하는 집이 된다. 따라서 종가는 마을 내에서도 가장 우월한 위치에 자리 잡고 그 형태나 규모도 다른 집과 구분되는 차별성을 갖는다. 종가가 위치한 곳이 마을이 경사진 산기슭이라면 마을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아 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 되고 평탄한 곳이라면 마을 한 가운데 중심에 자리 잡게 된다. 집의 규모에서도 종가는 한 단계 큰 규모를 갖는다. 집성촌은 전국적 현상으로 서울 근교에서도 쉽게 발견되었다. 그것은 농촌이라는 집약적 노동이 필요한 경제적 이익에도 크게 작용했다. 19세기에 들어서면, 양반들은 아니지만 부유해진 농민들의 혈족이 집결해서 나름의 고유한 집성촌을 형성하는 경우도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경우에는 양반 마을과 같은 뚜렷한 위계질서나 유교적인 제사 시설을 갖추는 경우는 적지만 종가를 중심으로 하고 마을 공동의 정자를 꾸미는 등 역시 배타성이 강한 마을 공동체의 구성에는 공통된 특징을 갖는다.    

‘대대로 외손이 잘되는 마을’ 양동 마을...역사적 인물로 우재 손중돈과 회재 이언적    

한국의 전통마을 가운데 대표적인 집성촌인 양동마을은 본래 경주군 강동면의 지역으로 양지쪽에 자리 잡고 있으므로 양좌동, 양좌촌 또는 양동이라고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양동호가 되었다. 이 마을은 경주시에서 16킬로미터쯤 떨어진 형산강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 넓은 평야에 인접하고 있다. 이 마을의 뒤쪽에 있는 문장봉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물자 모앙을 이루고 있다. 경주에서 흘러드는 서남방 역수원초가 형산강을 껴안은 지형이다. 이 지방 사람들은 이러한 역수의 형세가 양동마을의 부(富)를 이루는 원천이라고 믿고 있다. 이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지체 높은 양반들이 모여 산 까닭에 외지사람이 오면 “내가 말을 놓겠네.”라고 했다고 해서 마을 앞을 흐르는 작은 내를 ‘놓네’라고 부르다가 그 말이 변해서 ‘논내’가 되었다고 한다. 논내 앞에 펼쳐진 안강평야 대부분의 땅이 양동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손씨와 이씨의 땅이었으므로 ‘역수는 부의 원천’이라는 말이 관념이 아니라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안강평야는 안강읍의 중심을 관통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토평천이 형산강과 맞닿는 지점에 형성된 평야이다. 안강읍의 동부와 동북부 일대에서부터 강동면의 중앙과 서부 일대로 펼쳐 있다. 경상북도 내에서 손꼽히는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 앞을 흐르는 형산강은 옛날에 수량이 많고 바닥도 깊어서 포항 쪽의 고깃배들이 일상적으로 들락거렸기 때문에 해산물의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을의 유래에 의하면 이곳 양동마을은 ‘대대로 외손이 잘되는 마을’ 이라고 하는데, 이 마을에서 태어난 역사적 인물로는 우재 손중돈과 회재 이언적이 있다.

외가인 손씨 대종가에서 출생한 이언적은 별다른 스승이 없었다. 외삼촌인 손중돈이 관직 생활을 했던 양산, 김해, 상주 등지를 따라다니면서 독학으로 학문적, 인간적인 가르침을 받은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월성 손씨들은 ‘우재의 학문이 회재에게 전수되었다’고 하고, 여강 이씨들은 ‘회재 덕분에 우재의 이름이 빛을 발했다’며 두 집안이 상반된 주장을 펴고 있다. 이는 두 가문 사이에 놓인 갈등의 이유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 이외는 모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법구경』의 구절처럼 세상의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은 모두 나의 스승이다.

마을 전체가 거대한 문화유산이다. 마을의 집집마다 골목마다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지 않는 구석이 없다. 마을 가운데에 서있는 교회까지도 그렇게 보인다. 그만큼 양동마을이 우리나라 전통 마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까닭이다. 안동의 하회마을은 저잣거리처럼 변해버려 전통의 멋이 많이 퇴색되었다. 그러나 양동마을은 고풍스러운 맛과 멋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마을의 진산인 설창산에서 흘러내리는 능선과 골짜기가 물성자를 거꾸로 놓은 것 같은 지세를 이루어 그 기운이 만만치 않음을 풍수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리고 네 골짜기인 두 동골, 물 봉골, 안골, 장태골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마을의 형세를 보면 손씨와 이씨 두 문중의 경쟁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발간한 『영남고문서집성』의 기록을 보면, 고려 말 여강 이씨인 이광호가 이곳 양동에 터를 잡았고, 그때 그의 손자사위가 된 유복하가 그의 처가를 따라 이 마을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 뒤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계천군에 봉해진 월성 손씨 손소가 유복하의 외동딸에게 장가를 들어 이곳에 눌러 살면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광호의 5대 종손인 이번이 손소의 고명딸에게 장가를 들어 살면서 이씨와 손씨는 합가를 하게 된다. 이때부터 여강 이씨와 월성 손씨가 양동마을에 양대 문벌을 이루어 살면서 오랜 세월 동안 상호 통혼을 하여 인척관계를 유지해오면서도 경쟁관계를 쌓아온 것이다.

세 사람의 현인이 태어난다는 전설이 간직되어 있는 마을 중앙인 안골의 높다란 언덕에 월성 손씨의 대종가인 서백당이 자리 잡고 있다. 명나라의 공신 조광이 쓴 ‘물애서옥화’라는 현판과 흥선대원군(與宣大院君)이 쓴 ‘좌해금서호‘라는 현판을 비롯하여 중종 때의 유학자인 이언적이 쓰던 물건과 성리학 서적들이 보관되어 있는 서백당은 마을의 입향조인 손소가 25세 때 지은 집으로, 사랑채의 이름을 따서 서백당 또는 송첨이라고 불렀다.

중요 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되어 있는 서백당은 행랑채, 몸채 사당의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입향조인 손소는 이 집터를 잡을 때 비옥한 땅에서는 큰 인물이 나지 않는다며, 일부러 언덕 중턱쯤에 집터를 잡았다고 한다. 손소는 바로 이 자리가 문장봉의 지기에 내려와 뭉쳐 혈장을 이룬 곳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회재가 전임(轉任)하면서 동생인 이언괄에게 몰려준 후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면서 여강 이씨의 대종가가 된 ‘향단’은 이언적이 경상 감사로 재직할 당시, 모친의 병간호를 하도록 중종이 지어준 집이다. ‘영당’은 회재의 손자 이의잠이 하양 현감으로 재직할 당시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그 공덕을 기리어 세운 사당이다. ‘심수정’은 영귀정 동쪽에 있는 정자로 조선 명종 때의 학자 이언괄의 정자가 있던 곳에 후손들이 다시 세우고, 그의 문집 중의 ‘심중’ 이라는 글자를 따서 심수정이라고 하였으며, ‘내곡정’은 안골에 있는 정자로 고종 때 진사를 지낸 이재교를 추모하여 그 후손이 지은 것이다.

분곡 영당은 분통골에 있는 손소의 영당이다. 이조참판을 지낸 손소는 세조 13년인 1467년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므로, 계천군으로 봉하고, 그의 초상을 충훈부에 안치시킴과 동시에 그 부본을 본가에 하사하여, 선비들이 이곳에 모셔놓고 단오날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마을 각 종손과 파손들이 지은 이 정자에서는 여름을 나는 동안 일곱 번씩 특색 있는 놀이를 행했다고 한다. 5월 그믐에는 시와 창으로 나이든 어른들을 위한 예를 갖추었다. 절후로 보면 유두, 초복, 중복, 말복, 칠석, 입추, 처서 등 이었다. (삼국유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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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이옥용 /발행-편집인 신민형 / 양형모 상임고문 / 편집국장 이중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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