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韓日對譯)‘洞察!天問天答’(不滅の自覺)質問27

眞鏡 | 기사입력 2018/08/13 [08:57]
「私」は、すべてのことを超越して、最も絶対的です。

(韓日對譯)‘洞察!天問天答’(不滅の自覺)質問27

「私」は、すべてのことを超越して、最も絶対的です。

眞鏡 | 입력 : 2018/08/13 [08:57]
(질문27) 모든 만물이 자기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에, 비록 ‘지금의 나’라 할지라도 ‘모든 곳’에서 ‘항상’ 자기 자신을 만나며 보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質問27)すべての万物が自分自身の一部であるため、たとえ「今の私」であっても、「あらゆる場所」で「常に」自分自身に会って、見ているとおっしゃいました。
    

따라서 저에게는 부조화도 없으며, 불완전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내가 해야 될 무언가도, 개선하고 바꿔야 할 무언가도 없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할 일을 마쳤습니다. 불완전하다고 여겨지면 완전을 지향해야 하며, 부조화하다고 여겨지면 조화를 지향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저 ‘자각’하고만 있을 뿐이며, 그로 인해서 ‘나’의 반영, 즉 무한 다양성과 무한 가능성이라는 바탕 위에서 무한 창조성으로, 창조의 여정을 이어 가고 있으며, 이러한 무조건적 허용과 수용을 이해할 때, 참다운 이상을 실현할 수가 있으며, 이 우주는 그 자체로 참다운 이상의 발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したがって、私には不調和もなく、不完全もありません。そして、それによって私がしなければならない何かも、改善して変えなければならない何かもありません。私はこの世ですることを終えました。不完全であると考えることになれば、完全に目指すべきであり、不調和であると考えることになれば、調和を目指すべきです。しかし、私はただ「自覚​​」だけがあるに過ぎず、それによって「私」の反映、即ち、無限の多様性と無限の可能性という土台の上で無限の創造性で、創造の旅を続けており、このような無条件的許容と受容を理解するとき、真の理想を実現することができ、この宇宙は、それ自体で、真の理想の発現であるといえます。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의 나’와 ‘나’ 사이의 명확한 ‘사실관계’를 ‘스스로’ 알고 밝혀 나가는 것이 세상에서 해야 할 최종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는 ‘나’의 무의식이 그려내고 비춰내고 있는 ‘이데아’에 불과하며, 이데아가 당면하고 인식하고 지각하는 모든 것이 또한 꿈이기 때문입니다.    

そして、何よりも「今の私」と「私」の間の明確な「事実関係」を「自ら」を知って、明らかに進んで行くことが、世の中でしなければならない最終的なこと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なぜなら、「今の私」は「私」の無意識が描き出して照らし出している「イデア」に過ぎず、イデアが当面して認識して知覚するすべてのものもまた夢だからです。    

(질문) 진경님께서 이야기하는 ‘지금의 나’는 결국 모든 개개인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개개인이라 할지라도 세상에서 세상을 위해 이룬 일들은 많습니다.    

(質問)眞鏡さんが話される「今の私」は、結局、すべての個々人を指しているようです。個々人であっても、この世でこの世のために成したことは多いです。
    

세상에는 세상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하여, 개인적 성취를 이루고 명예를 얻고, 부를 이루었다 할지라도, 이름을 날렸다 할지라도 ‘죽음’ 앞에서의 무기력함은 공평합니다.

만약에 그렇게 이룬 일들이, 세상에서 가치가 있으며, 그러한 가치가 가치로써 사실적이라면, 분명 ‘죽음’ 앞에서도 어떤 특혜나 혜택이 분명 있을 겁니다. 그러나 불현듯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누구나 예외 없이 무기력하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디 ‘죽음’뿐이겠습니까?    

世の中には、この世のために多くのことをして、個人的な成就を成して名誉を得て、富を成したとしても、名を広めたとしても、「死」の前での無気力さは公平です。

もし、そのように成したことが、この世で価値があり、そのような価値が価値として事実的であれば、明らかに「死」の前にも特恵や恵みが明らかにあるはずです。しかし、ふと近づいてくる「死」の前で誰でも例外なく無気力であることは、あまりにも明らかな事実です。そして、それがどこかの「死」だけでしょうか。    

(질문) ‘진경’님의 다가올 ‘죽음’은 어떻게 해결하였습니까? 세상의 할 일을 마쳤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質問)「眞鏡」さんは近づいてくる「死」をどのように解決しましたか。この世ですることを終えたというのは、一体どういう意味ですか。
    

제가 ‘세상의 할 일을 마쳤다’는 것은, ‘지금의 나’를 포함해서, ‘지금의 나’가 인식하고 지각하는 모든 일과 사건들이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에게는 다가올 ‘죽음’이라는 것이 없으며, ‘님’께서 저를, 육신과 동일시하여 ‘지금의 나’, 즉 ‘진경’으로 여긴다고 하여 ‘저 자신’의 정체성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私が「この世ですることを終えた」というのは、「今の私」を含めて、「今の私」が認識して知覚するすべてのものや出来事が「夢」であるということが知ったということです。だから私には近づいてくる「死」というものはなく、「あなた」が私を肉体と同一視して「今の私」、即ち、「眞鏡として考えるとして「私自身」の正体性が変わ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    

따라서 ‘나’는 정말로 ‘나’입니다.    

したがって、「私」は本当に「私」です。    

(질문) ‘대 자유’는 다른 말로, ‘모든 것에 대한 주권이 내게 달려 있다’로 해석해도 무방합니까?  

(質問)「大自由」は、他の言葉で「すべてのものに対する主権が私にかかっている」と解釈してもよいですか。
    

주권이 자기에게 있다고, 지금 ‘님’께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는 것은, 아직도 주권과 피 주권의 상관관계가 ‘분리’의 관계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야기하는 ‘주권’은 오직 일체(一切), 즉 일체(一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직 둘 없는 ‘하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주체와 대상의 분리, 나눔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주권’을 이야기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主権が自分にあると、今「あなた」が話しています。このように話をすることができることは、まだ主権と被主権の相関関係が「分離」の関係として残っているからです。しかし、私が話す「主権」は、ただ一切即一体に対する話です。ただ二つとない「一つ」の話です。ここには、主体と対象の分離、別れというものはありません。だから「主権」を話すこともないのです。    

(질문) 초시공성이라는 것도, 결국은 일체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質問)超時空性というのも、結局は一体として自分自身に対する話ですか。
    

일체로서 ‘나’에게는 어떤 ‘시간’도 없으며, ‘시간’이 없기 때문에 ‘공간’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시간과 공간은 나누어지고 분리되어진 세계에서나 가능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상상과 추측으로 모든 분리를 인정하고서도, 시간과 공간은 둘 없는 ‘하나’, 즉 ‘나’에게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일체이기 때문이며, ‘나’ 이외의 ‘어느 때’와 ‘나’ 이외의 ‘어느 곳’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一体として「私」にはどんな「時間」もなく、「時間」がないので「空間」もありません。なぜなら、結局、時間と空間は、別れて分離された世界でだけ可能な「こと」だからです。想像と推測すべての分離を認めても、時間と空間は二つとない「一つ」、即ち「私」から生じて消えるものです。なぜなら、「私」は一体であるためであり、「私」以外の「いついつ」と「私」以外の「どこどこ」は、あり得ません。    

그러니 ‘나’는 모든 시간의 총합이자 플러스알파이며, 모든 공간의 총합이자 플러스알파인 것입니다. 그러니 시간적 개념으로 접근한 ‘무한’과 공간적 개념으로 접근한 ‘무한’조차도, ‘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모든 것을 초월하여 가장 절대적입니다. ‘나’는 정말로 ‘끝’이 없으며, 그리고 오직 ‘하나’입니다.    

だから「私」は、すべての時間の総合であり、プラスアルファであり、すべての空間の総和であり、プラスアルファ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だから、時間的概念で接近した「無限」と、空間的概念で接近した「無限」でさえも、「私」の中にあるのです。

したがって、「私」は、すべてのことを超越して、最も絶対的です。「私」は本当に「終わり」がなく、そして、ただ「一つ」です。    

(주석) 초시공성(超時空性) ―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역을 말한다.    

(注釈)超時空性 - 時間と空間を超越した領域をいう。    

(질문)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質問)助言をお願いします。
    

사람들은 ‘신이 무엇이며, 무엇일 것이다’라는 상상을 하고, 그러한 ‘상상’을 상상하고 추측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찾고 만나기를 원하며, 막연한 믿음에 대한 불확실성을 상쇄시키기 위해서 반복적으로 주기적으로 기도하고 있지만, ‘신’은 끝내 어떤 ‘화답’도 하지 않습니다.    

人々は「神が何であり、何であるはずだ」という想像をして、そのような「想像」を想像して推測していることを忘れてしまい、探して出会いを望み、漠然とした信じることに対する不確実性を相殺させるために反復的に周期的に祈っていますが、「神」は最後までどんな「好意的な回答」もありません。    

이러한 일들이 수천수만 년을 이어 오면서 문명을 발전시키고, 인식과 지각체계를 발전시켜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결국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고, 신에게 의존적이며 의지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즉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외면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このようなことが数千数万年続いてきて、文明を発展させて、認識と知覚体系を発展させても変わらず続いているのは、結局「自ら」自分自身に対して知ろうとせず、神に依存的であり、頼って、すべての問題を解決しようとする、即ち「自ら」自分自身に対する責任に背を向けたからであるといえます。    

‘자각’하세요. ‘자각’할 수가 있는 이유는 자유롭기 때문이며, 자유로울 수가 있는 이유는 ‘자유’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自覚」して下さい。「自覚」することができる理由は自由だからであり、自由であることができる理由は「自由」そのものだからです。    

  • 도배방지 이미지

많이 본 기사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