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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對譯)‘洞察!天問天答’(不滅の自覺)質問28

眞鏡 | 기사입력 2018/08/16 [07:03]
探している私がすぐに探し出すことができるそれ

(韓日對譯)‘洞察!天問天答’(不滅の自覺)質問28

探している私がすぐに探し出すことができるそれ

眞鏡 | 입력 : 2018/08/16 [07:03]
(질문28) 일반적으로 수행을 하고 공부를 하는 목적은, 자기 자신의 본래면목을 경험하고 체험하고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진경님은, 본래적 자기 자신은 경험되거나 체험될 수가 없으며, 더 나아가서는 알 수도 없다고 합니다. 무슨 의미인지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質問28)一般的に、修行をして勉強をする目的は、自分自身の本来の面目を経験して体験して悟るためです。ところが、眞鏡さんは、本来の自分自身は、経験したり体験することができず、さらには知ることもできないと言います。どういう意味なのかを説明して頂けますか。
   

모든 것을 유발하는 근본 중의 근본을 ‘진리’라고 할 수도 있으며, ‘도’라고도 할 수가 있으며, 결국은 ‘자기 자신’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각’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각’할 수가 있다는 것은, 찾는 내가 바로 찾는 그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을 수행자들에게 납득시키기가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すべてを誘発する根本中の根本を「真理」であるということができ、「道」であるともいうことができ、結局は「自分自身」であるともいえます。なぜなら、誰でも「自覚」することができるからです。そして、「自覚」す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ことは、探している私がすぐに探し出すことができるそれだ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まさにこの部分を修行者に納得させることが最も難しい部分です。    

‘찾는 내가 바로 찾는 그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경험되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探している私がすぐに探し出すことができるそれ」であるため、「それ」は経験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    

어떤 경험이 있으려면, 경험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경험자’가 있어야 하며, 그로 인해서 ‘경험자’와 상호의존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엄밀히 따져 보면 ‘경험자’는 ‘경험’이 없어도 ‘스스로’일 수가 있으며, 어떤 ‘경험’이 없으므로 해서 자기규정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그것’으로서, 바로 찾는 내가 바로 찾는 ‘그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何らかの経験があれば、経験に対する全般的な内容を話すことができる「経験者」が必要であり、それによって「経験者」と相互依存的でしかありませんが、しかし、厳密に問うてみれば、「経験者」は「経験」がなくても、「自ら」であり得、何の「経験」がないからといって、自己規定がないので、何でもない「それ」であって、すぐに見つけ出せる、私がすぐに見つけ出せる「それ」であるといえます。    

따라서 ‘그것’으로서 ‘나’는, 바로 ‘나’이기 때문에 ‘나 자신’에 대한 경험과 체험은 ‘지금의 나’가 생각하고 염원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며, 아무것도 아닌 ‘그것’으로서 ‘나’에 대한 ‘앎’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したがって、「それ」として「私」はまさに「私」であるため、「私自身」に対する経験と体験は、「今の私」が考えて願っていることに過ぎず、何でもない「それ」であって、「私」に対する「知」は存在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    

(질문) ‘나 자신’,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은 존재하지를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質問)「私自身」即ち「自分自身」に対する「知」は存在しないとおっしゃいました。もう少し具体的に説明をお願いします。
    

‘나는 존재한다’라고 여기게 되면, ‘존재’에 대한 ‘앎’은 동일시로 인해 ‘자기 정의’와 ‘자기규정’으로서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더 사실적이며, 존재하게 하는 ‘비존재’에 대한 ‘앎’은 비동일시로 인해서 없습니다.    

「私は存在する」と考えるようになれば、「存在」に対する「知」は同一視により「自己定義」と「自己規定」として明らかにあります。しかし、より事実的であり、存在するようにする「非存在」に対する「知」は、非同一視によってありません。    

(질문)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質問)助言をお願いします。
    

‘삶’에 대한 미련과 여한은, 결국 더 체험해 보고 싶고 더 경험해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를 위해서 전심전력하는 것이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일생동안’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잠만 들어도 꿈을 꾸며, 꿈이라는 의식작용을 통해서 충분히 경험하고 체험을 하고 있으며, 꿈을 꾸고 있을 당시의 생동감과 사실감은, 흔히 ‘현실’이라고 보는 ‘지금’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生」に対する未練と悔いは、結局、より体験してみたい、より経験してみたいという気持ちです。そして、「もう少し」のために全心全力を尽すことがよく人々が言う「一生の間」ということです。ところが、どんな努力を傾けても、眠っていても、夢を見て、夢という意識作用を通じて十分に経験して体験をしており、夢を見ている時の生動感と事実感は、よく「現実」であるとみなしている「今」と変わ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    

그렇게 사실감 넘치며, 생동감 있던 꿈속의 ‘현실’조차도, 꿈을 깨고 나면 흐릿한 기억 속에 희미한 잔상으로 남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지금’의 모든 상황 또한 꿈과 같으며, 아무 의미 없기는 마찬가지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미련과 여한을 위해, 언제 ‘끝’날지 모를 ‘삶’을 위해 이바지할 것이 아니라, 꿈꾸는 자가 누군지를 바로 알고, 잠을 자면서 꿈을 꾸고 있는 자가 깨어나야 하는 겁니다. 그것만이 이 ‘삶’의 유일한 의미라 할 수가 있습니다.    

そのように事実感があふれ、生動感がある夢の中の「現実」でさえも、夢を覚ました後、かすんだ記憶の中にかすかな残像として残ることになりますが、その理由は、それが何の意味もないからです。ところが、今「現実」として受け入れている「今」のすべての状況も夢のようであり、何の意味も無いのと同様といえます。

だから、未練と悔いのために、いつ「終わる」か分からない「生」のために寄与するのではなく、夢見る者が誰であるかを正しく知って、眠りながら夢を見ている者が目を覚ま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それだけがこの「生」の唯一の意味であるといえます。    

(질문) 특정한 영적인 경험과 영적인 체험조차 도움이 될 수가 없다는 말입니까?    

(質問)特定の霊的な経験と霊的な体験さえも助けに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しょうか。
    

자기 자신을 바로 알면 어떤 ‘도움’도 필요하지가 않습니다. 늘 이야기하고 있지만 ‘자기 자신’이 바로 영적인 ‘실재’입니다. 영적인 실재라고 말을 하는 이유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의 뜻이자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지금의 나’라고 할지라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경험과 체험이 영적인 경험과 체험인 것입니다.    

自分自身を正しく知れば、どんな「助け」も必要ではありません。いつも話をしていますが、「自分自身」がまさに霊的な「実在」です。霊的な実在であるといえる理由は、すべてが「自分自身」の志であり、意志であるからです。だから「すべて」は、霊的なものです。したがって、たとえ「今の私」であるとしても、「今」起きているすべての経験と体験が霊的な経験と体験なのです。    

(질문) 진경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수용과 허용을 이야기하시지만, 살다 보면 어려운 일 같습니다.    

(質問)眞鏡さんは、無条件に受容と許容を話されますが、生きていれば難しそうです。
    

‘수용’을 하는 것은 ‘누가’ 합니까? 그리고 ‘수용’하지 않는 것은 또 ‘누가’ 합니까?

결국은 ‘하는 것’도 내가 하고 있으며, ‘하지 않는 것’도 내가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가 한다’는, 즉 ‘자각’만이 무조건적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단언컨대 세상 모든 것의 이치는 ‘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受容」は「誰が」しますか。そして「受容」しないのは、また「誰が」しますか。

結局は、「すること」も私がしており、「しないこと」も私がしています。すべてを「私でする」ということは、即ち「自覚」だけが無条件的であるといえます。だから、断言しますが、世の中のすべてのものの理致は「私の心構え」にかか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    

(질문) 저는 오랜 신앙생활을 해 왔으며, 매일 새벽기도를 다닙니다. 하지만 세상사는 저의 뜻과 기도와 상관없이 펼쳐지고 있으며, 그렇게 많은 시간을 ‘기도’하였지만, 미래가 두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質問)私は長年信仰生活をしてきており、毎日早朝にお祈りに通っています。しかし、世の中には、私の志や祈りと関係なく繰り広げられており、こんなに多くの時間を「祈り」ましたが、未来が恐ろしいのは同じです。
    

매일 밤, 잠을 자기 전에 ‘님’께서 원하는 꿈을 꿀 수가 있도록 ‘기도’하고 염원을 하면서 잠을 잔다고 하여도, ‘님’의 의지와 뜻은 꿈속에서 전혀 반영되지 않을 것입니다. 즉 ‘님’이 원하는 이상적인 꿈을 꿀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님’은 잠을 자고 있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불현듯 꿈이 꾸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毎晩、眠る前に「あなた」が望む夢を見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祈り」とお願いをしながら眠るとしても、「あなた」の意志と志は夢の中では全く反映されません。即ち、「あなた」が望む理想的な夢を見ることはできません。なぜなら「あなた」は、眠っているからであり、それによって、ふと夢を見ることになっているからです。    

따라서 육체와의 동일시로 비추어지고 있는 ‘지금의 나’만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고 있다면, 의식적이라 할 수가 없으며, 그로 인해 ‘님’의 뜻과 의지가 이상을 실현할 수도 없고, 아무리 ‘기도’와 ‘무언가’에 의지하고 의존한다고 할지라도, 불현듯 꾸어지는 꿈과 같이 불확정적이며, 꿈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오랜 세월 동안의 ‘기도’가 밝혀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したがって、肉体との同一視で映し出されている「今の私」だけを自分自身と考えているとすれば、意識であるとはいえず、それにより「あなた」の志と意志が理想を実現することもできず、どんなに「祈り」と「何か」に頼って依存するとしても、ふと夢見ることになった夢のように不確定的であり、夢であることと同様です。

そして、「未来」の不確実性を、長年の「祈り」が明らかに与えてくれないことを知っているから恐ろしいのです。    

(질문) 스스로 아는 ‘자기 앎’만이, 자기 자신에 대한 유일한 ‘진실’이라고 하셨습니다.    

(質問)自ら知っている「自己知」だけが、自分自身に対する唯一の「真実」であるとおっしゃいました。    

스스로 아는 ‘자기 앎’만이 자기 자신의 유일한 ‘진실’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은 스스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自ら知っている「自己知」だけが自分自身の唯一の「真実」です。なぜなら、自分自身は自ら起因しているからです。    

만약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너는 나의 자식이다. 너는 네가 알고 있는 ‘한 인간’이 아니다. 그러니 너는 이미 나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인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권능을, 너 또한 행사할 수가 있으며, 나와 같이 ‘전지전능’할 수 있다. 라고 말한다면 과연 ‘한 인간’으로서 누가 그 말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여, 무소부재할 수가 있으며, 전지전능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의구심을 갖고 통찰하여 스스로 ‘자기 앎’, 즉 ‘자각’하여야 하는 것이며, ‘지금의 나’로서도 항상 ‘자각’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もし「神様」が現れて『あなたは私の子供である。あなたはあなたが知っている「一人の人間」ではない。だからあなたは既に私の血を受け継いでいるので、「神」である私が持っているすべての権能を、あなたも行使することができ、私のように「全知全能」であることができる。』と言うのであれば、果たして「一人の人間」として、誰がその言葉を即座に受け入れ、無所不在であることができ、全知全能であることができますか。

したがって、自分自身に対して「自ら」疑いを持って、洞察して、自ら「自己知」、即ち「自覚」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り、「今の私」としても常に「自覚」していることを「自覚」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질문) ‘깨달음’은 선택의 문제가 될 수가 없다고 하시니, 충격적이었습니다.    

(質問)「悟り」は選択の問題になり得ないとおっしゃいましたが、衝撃的でした。
    

태어났다고 여기고 있다 할지라도, 살아오면서 취미도 개성도 종교도 국가도 이념도 사상도 배우자도, 과학의 발달로 인해 성별조차도 선택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은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가 깨어나는 것이며, ‘나’가 정신을 차리는 것입니다.    

生まれたと思っているとしても、生きていながら、趣味も個性も宗教も国家も理念も思想も配偶者も、科学の発達により、性別さえも選択することができます。しかし、自分自身だけは自分自身にとって「選択」の問題ではありません。「私」が目覚めるものであり、「私」が精神をしっかりすること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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