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男女有別 유교의 가치로 남녀공간 분할된 조선시대 가옥·토지정책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8/08/30 [08:42]
經國大典에 명시된 정책과 사대부의 토지 소유

男女有別 유교의 가치로 남녀공간 분할된 조선시대 가옥·토지정책

經國大典에 명시된 정책과 사대부의 토지 소유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18/08/30 [08:42]
經國大典에 명시된 정책과 사대부의 토지 소유    

조선 시대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다. 신분제 사회의 특징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평등한 것이 아닌 종속적 관계로 규정되고, 삶의 방식도 규범이란 명칭아래 통제와 규제를 받게 된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는 최소한의 소유마저 규제하게 된다. 주거 문화의 가장 기본이 되는 주택에서도 신분의 제약을 받게 되어 양반 주택, 중인과 이서(吏胥) 및 군교(軍校)를 포괄하는 중류 주택 그리고 상민의 서민 주택으로 분류되었다. 그밖에 천인 중에서 양반들의 주택 안에 거주하는 ‘솔거 노비(率居奴婢)’가 아닌, 집 밖에 생활하는 ‘외거 노비(外居奴婢)’의 집인 ‘가랍집[전라도에서는 호지 집, 평안도에서는 마가리집, 평안도에서는 윳집 등으로 불림]’은 서민 주택 중에서도 가장 열등한 형태의 주택이었다. 또한 이교의 주택들도 중인 계층과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했지만 실제는 별 차이가 없었으며, 가난한 양반들의 주거도 상민들의 열등한 주택과 별 차이가 없었다는 점에서 볼 때 크게 서민 주택, 중류 주택, 상류 주택의 세 가지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주택 소유 상한제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신분에 따른 주택 소유 규모의 범위가 『경국대전』에 명시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 신분에 따른 주택 소유 규모의 범위를 정해둔 『경국대전』    

태조 4년(1395)의 ‘가대분급(家垈分給)’과 『경국대전』 「호전」 ‘급조가지조(給造家地條)’의 가대분급과를 비교해 보면, 정1품부터 서인(庶人)까지 10등급으로 나누던 것이 대군⦁공주에서 서인까지 7등급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대군⋅공주와 왕자군⋅옹주를 별도로 구분하여 상위에 두고 그 이하 품계를 2개 품계씩 5개 등급으로 묶었기 때문이다. 또한 품계별 가대분급 상한을 비교해 보면 후대로 가면서 가대면적(家垈面積)이 급격히 감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왕자녀를 제외한 최상위 품계인 1품의 경우 35부였던 것을 15부로 제한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품계들 간의 격차도 1품에서 5품까지는 5부씩, 6품에서 서인까지는 2부씩 감소되었으나, 대군⋅공주로부터 당하관인 4품까지의 격차는 5부씩 그리고 참상관인 5품부터 7품 이하까지는 2부씩 감소되었음을 볼 수 있다. 서인만이 2부로 일정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최소 대지 면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민보다 사회적 신분이 낮은 ‘공사천민(公私賤民)’에 대한 가대분급 규정은 없었는데, 이들이 가대분급 대상에서조차 제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대분급은 한양 도성 내에 거주하는 자들의 가대를 품계에 따라 분급하기 위한 방책이었을 뿐, 상대적으로 대지의 여유가 있었던 지방의 주(州)와 부(部)와 군(郡)과 현(縣) 등의 외방(外方)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조선은 신분에 따라 소유가 제한된다.    

조선 시대 이전부터 신분 계급에 따른 주택의 규모와 구조, 장식 등을 제한한 건축 규제들이 제정되어 시행되었으며, 이런 규제들이 조선 후기까지 이어져 왔음을 문헌상의 기록들을 통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주택의 건축 규제 제도와 사회 이념들은 당시의 주택 규모와 형식, 공간 구성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가사규제’는 주택 내의 건축물의 종류 및 건물별 주요 ‘구조부재’의 척수(尺數)를 규제하는 제도인데 태조 4년(1395) 1월의 가대제한과 함께 처음 제정된 후, 예종 원년(1469)에 편찬된 『경국대전』 「호전」의 급조가지조(給造家地條)에 와서는 상민을 제외한 가대(家垈)가 크게 축소 조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3차 가사규제는 세종 30년 2차 가사규제를 제정하여 시행한 지 10년 만에 공주 이상의 집에 관한 조항 중 몇몇 척수가 작아 맞지 않음 등을 지적하고 개정하게 되었다. 개정 의도에 맞게 불합리했던 각 건축물별 척 수를 고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군의 집은 60칸으로 그 속에 누(樓)10칸이며, 정침(正寢)⋅익랑(翼廊)⋅서청(西廳)⋅내누(內樓)⋅내고(內庫)의 매칸(每間) 규모는 한 칸(間)의 길이가 11척, 너비(건물측면의 전창(全長))는 전후퇴(前後退) 합쳐 18척, 퇴주(退柱)의 높이는 11척으로 한다. 차양이 있는 사랑(斜廊)은 한 칸의 길이가 10尺, 너비는 9척5寸, 기둥 높이는 9척이다. 행랑은 한 칸의 길이가 9척5촌, 너비가 9척, 기둥 높이는 9척이다. 공주와 왕의 친형제⋅친자의 집은 50칸으로 그 속에 루가 8칸이며, 정침⋅익랑⋅서청(西廳)⋅내누(內樓)⋅내고(內庫)의 매칸(每間) 규모는 길이가 10척, 너비는 전후퇴 합쳐 17尺, 퇴주의 높이는 0척, 정침⋅익랑⋅서청⋅내누⋅내고⋅차양(遮陽)있는 사랑은 한 칸의 길이 9척, 너비 8척5촌, 기둥 높이는 8척5촌이다. 행랑의 규모는 사랑과 같게 한다. 종친 및 문무궁 2品이상의 집은 40칸으로 정침⋅익랑⋅서청⋅내누⋅내고의 매칸 규모는 길이가 9척, 너비는 전후퇴 합쳐 16尺, 퇴주의 높이는 9척으로 한다. 정침⋅내누⋅차양 있는 사랑은 한 칸의 길이 8척5촌, 너비 8척, 기둥 높이는 8척이다. 행랑은 사랑과 같게 한다. 3품 이하의 집은 30칸으로 그 속에 누가 5칸이다. 간각의 치수는 2품 이상 자의 집과 같다. 서인의 집은 10칸으로 그 속에 누가 3칸이며, 매 칸의 규모는 길이가 8척, 너비는 7척5촌, 기둥 높이는 10척 5촌으로 하고자 합니다.”    
▲ 99칸의 사대부가의 상류 주택으로서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 5호로 지정되어 있는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위치한 선교장     ©매일종교신문

이와 같이 의정부의 건의에 의해 개정됨으로 세종 13년에 처음으로 제정된 가사규제는 두 차례의 개정과 보완을 거쳐 세종 말기에 와서야 비로소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가사규제로 개정되었다. 칸은 기둥 두 개 사이 또는 기둥 네 개로 이루어진 공간을 말한다. 따라서 칸에는 절대적인 크기가 없고, 같은 칸이라고 그 크기가 다양하다. 한옥은 여러 채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각 채의 칸 수를 모두 합해야 비로소 그 집의 규모를 알 수 있다. 칸수 제한과 함께 주춧돌 외에는 매끈하게 다듬은 돌과 공포, 단청도 쓸 수 없다. 고려 건축에서 화려한 단청이 사용되었던 것과는 대조된다.

3차 가사규제 개정의 특징은 조선 전기인 15세기 중반 주택의 실(室) 종류 및 동(棟) 구성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실명(室名) 및 동명(棟名)이 2차 가사규제보다 자세하게 드러나 있다는 점이다. 세종 13년의 1차 가사규제에는 주택 내 동(棟, 채)의 실명이 없었고, 세종 22년의 2차 가사규제에서는 정침⋅익랑 및 누(樓)와 나머지 간각의 제한된 용어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3차 가사규제에는 전기의 누⋅정침⋅익랑 이외에도 서청⋅내누⋅내고⋅사랑⋅행랑과 같은 새로운 용어가 추가되고 있어 가사규제의 흐름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생각된다.    

건축구조에도 성리학 이념 구현    

조선 시대의 주택에 관련된 문헌 자료는 이전의 어느 시기보다도 많다. 하지만 그 많은 자료에 비해 이와 관련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그것은 관련 문헌의 양과 범위가 광범위하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다른 시기에 비해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적들 또한 풍부하기 때문에 연구들이 조선 시대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개국이후 이전 시대와 같은 전제 군주 국가를 유지하면서도 국교였던 불교를 버리고 새로운 사회 이념으로 유교(儒敎)를 숭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 집권층이 내건 대표 사상으로서의 유교적 이상과는 달리 실생활에서는 여전히 불교적 세계관이 민간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도가 또한 불가에서 유가로의 정치적 변천과는 무관하게 한국인의 의식 저변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사회 제도의 경우에는 엄격한 신분 제도에 따라 사회적 지위는 물론이거니와 주거(住居)의 규모와 형태에 있어서도 엄격한 신분제의 규제가 있었다. 또한 조선 초기부터 성리학적 사회윤리가 조선사회를 지탱하는 새로운 정치 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가부장적인 대가족제(大家族制), 가묘제(家廟制), 내외법(內外法)이 확산되었으며, 가부장적 대가족제와 조상숭배의 제례를 시행하기 위한 가묘제(家廟制)가 시행되었다.

유가적 이념을 담고 있는 양반가 가옥의 특징 중의 하나는 남녀유별을 위한 인위적 건축물을 통한 유교 가치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녀의 구별은 공자의 가르침에서 연유한다. 남녀유별은 유교의 다른 어떤 가치보다도 상류층 가옥의 배치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남녀유별은 『예기』 「내칙」에 나오는, 아이가 여섯 살이 되면 수와 방향을 가르치고, 일곱 살이 되면 한 이불에 잠을 재우지 않는다.는 말이 후대로 내려갈수록 의미가 바뀌어 단순히 자리조차 같이하지 않는 것으로 변질되어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의 성적 절제는 유교의 가르침에서만 강조된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 발생한 민중 종교적 성격이 강한 도교의 가르침에서도 정기가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남녀 교합의 성적 절제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 생리현상으로 인해 동양에서는 비록 부부일지라도 남녀는 각기 다른 공간에서의 생활이 타당하다고 여기고 있다. 이를 위해서 집 구조의 배치는 사랑채를 중심으로 하는 남자들의 공간과 안채를 중심으로 하는 여성들의 공간으로 분할되었다. 한 집에서도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담으로 구분하고 별도의 출입문을 만들었다. 문이 닫히면 안채와 사랑채는 완전히 차단되었다. 남향집으로 대지가 동서보다 남북이 긴 장방향인 경우, 사랑채는 동남쪽에 두고 사당은 동북쪽에, 안채는 서북쪽에 배치가 원칙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집터의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은 경우에는 사랑채와 행랑채는 전면 오른쪽[동쪽]에 두고 안채는 왼쪽[서편] 뒤에[북쪽]에 두었다. (ㅁ)자형의 주택인 경우 통상적으로 남향집의 사랑채는 동남쪽에, 사당은 동북쪽에, 안채는 서북쪽에 배치하였다. 또 규모가 큰 집에서는 (ㅁ)자의 끝 획의 해당하는 곳에 사랑채를 세워서 안채와 사랑채 사이를 차단하기도 했다. 사당처럼 남자들이 거주하는 공간을 해가 뜨는 동쪽에 배치하려는 배려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민속놀이인 ‘줄다리기’에 있어서도 동쪽은 남성을 그리고 서쪽은 여성을 상징하며 여성을 상징하는 서쪽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동쪽 공간을 남성의 생활공간으로 여기는 풍습은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천막을 반으로 나누고 남녀가 구분되어 쓰는 유목민의 풍습에서도 남자의 방은 동쪽에 두고 여자의 방은 서쪽에 둔다.    
▲ 남녀유별의 유교는상류층 가옥의 배치에 큰 영향을 주어 사랑채를 중심으로 하는 남자 공간과 안채를 중심으로 하는 여성 공간으로 분할되었다. 사진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사랑방을 재현한 모습.

특히 동양적인 사고에서 동쪽과 서쪽을 좌우의 개념으로 대치시키면 동쪽은 왼쪽, 서쪽은 오른쪽이 된다. 이때 왼쪽은 남성, 길조, 생명, 정의, 선(善), 밝음을 상징하고, 오른쪽은 여성, 불의, 악, 어둠, 불길, 죽음 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풍습이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또한 신분 계급에 있어서도 양반(兩班), 중인(中人), 이교(吏校), 양인(良人), 천인(賤人)의 5개 계층으로 나누어 통치를 합리화시켜 나갔으며 이를 토대로 성리학적 사회 윤리를 확립 하였다. 이러한 모든 사회적 제도와 윤리, 도덕규범은 주택의 규모와 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사대부를 중심으로 집안에 가묘 건설    

조선 전기 주택 내의 가묘건립이 보편화된 것은 16세기 초인 중종(中宗) 대부터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처음부터 가묘의 건립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 까닭은 건국 초기만 해도 성리학이 정착되기 이전으로 가묘의 건립에 대해 미온적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로는 기존의 양반가들이 위치한 대지의 제한적 상황에도 영향을 받았다. 또한 고구려 때부터 이어져온 ‘서류부가(壻留婦家)의 혼속(婚俗)’과 ‘남녀균분상속제(男女均分相續制)’ 등 여성의 권한이 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사대부가를 중심으로 가묘의 건립이 확산되었으며 주택의 배치 계획에서 제일 먼저 고려되었다. 사당은 양반가에 속한다고 누구나 세울 수 있는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다. 문중에서도 선택된 사람만이 세울 수 있는 매우 제한적인 공간이다. 그러한 만큼 상징과 권위가 따른다. 17세기로 넘어가면서 조선의 양반 사회에는 예학에 대한 수용이 중요한 과제로 등장했다. 특히 주자가 제시한 ‘가례’는 가정에서 지켜야 할 모든 예의범절의 기준으로 중요시되었다. 『주자가례』를 해설한 주석서가 활발하게 발간되었으며, 이를 조선의 주택 건축 등에 적용하는 데 따른 여러 가지 해석들이 학자들 사이에 논의되었다.    
▲ 가례가 널리 보급되면서 17세기 이후 조선의 양반 주택에 가묘를 세우고 조상에 제사지내는 의식을 했다. 사진은 남해충렬사 사당 뒤편 충무공 이순신 가묘.     

주자가 ‘가례’를 행하는 데 있어 특히 강조한 것은 집 안에 가묘를 세우고 조상에 제사지내는 의식을 철저히 하도록 한 것이다. 주자는 제사를 지내는 데 있어서는 왕이나 사대부, 서인이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고 종전까지 민간에서 3대조에게만 제사지내던 것을 4대조까지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자의 생각은 가례가 널리 보급되면서 17세기 이후 조선의 양반 주택에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 적어도 사대부의 집이라면 4대의 조상 신주를 모신 가묘를 집안에 세우고 절기에 맞추어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는 것이 법도로 자리를 잡았다.

이 과정에서 주택 전체의 구성에도 변화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먼저 집안에 가묘를 세우게 되었는데 『주자가례』에서는 가묘의 위치를 정침의 동쪽에 두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주자의 가례는 중국식 가옥을 염두에 두고 기술한 것이어서 조선의 주택에 적용하는 데에는 해석상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주자가례』에서 말하는 정침을 17세기 양반 가옥에서 어디로 해석해야 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정침은 일반적으로는 안채로 볼 수 있지만 해석에 따라 사랑채가 될 수도 있고 집 전체를 가리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양반 주택에서는 정침을 안채로 인식하고 가묘는 안채 동쪽에 두는 결정을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지세가 맞지 않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집이 똑같이 가묘를 동쪽에 둔 것은 아니고 상황에 따라 안채 북쪽이나 간혹 서쪽에 두는 경우도 있었다.

제사 지내는 의식이 집 안에서 중요한 행사가 되면서 사랑채에 대한 인식이 새삼 높아졌다. 제사는 혈족의 남자들을 중심으로 치러졌으므로 제사를 준비하고 제사 전후의 여러 의식을 치르는 장소로 쓰이게 된 사랑채가 집안의 가장 으뜸 장소가 된 것이다. 사랑채의 규모가 훨씬 커지고 기둥이나 창문의 모습, 지붕의 형태에서도 안채나 다른 부분과 한눈에 차별되는 우월한 모습으로 꾸며지게 되었다. 또한 사랑채는 접객 장소로써의 의미도 증대되었다. 전통적인 향촌 사회에서 양반의 지위가 확고해 지고 그들 사이의 교류가 확대되면서 찾아오는 손님에 대한 접대 또한 양반의 주요한 신분 과시의 수단이 되었다. 요컨대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이란 말에서 보듯이, 제사를 모시고 손님을 접대하는 일이 양반가의 가장 중요한 덕목과 의무로서 자리 매김하게 된 것이며, 그 중심 장소로서 사랑채의 존재가 크게 부각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혼인 후 거주는 처가에서 자녀가 장성할 때까지 장기간 생활하는 서류부가(壻留婦家)의 원칙이 그때까지 남아있었음으로, 당시의 주택 안, 밖에는 여자와 사위 및 이들의 자녀들이 거처하는 거주 공간이 별채로 건축되었거나 서방과 사랑의 일부가 이들의 생활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가옥의 평면 구조는 서민 계급은 좁은 대지에 (ㄱ)자형 이나 (ㄷ)자형의 건물을 한 동으로 배치하였고, 중⦁상류 계급은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와 사당 등을 넓은 대지에 독립적으로 배치하였으며 그 사이 사이에는 부속사와 담장으로 경계를 정하였다. 주칸(柱間)은 한 칸과 한 칸을 두 칸 길이로 생각할 때 서민 계층은 약 6,7척이 한 칸이 되며, 중인 계층은 7∼7.5척이 한 칸이 되고 상류 계층은 8∼9척이 된다. 전체 규모에 있어서도 서민층은 10칸, 중인층은 30∼40칸, 상류층은 99칸까지 허용되었다.

이와 같은 구조적 규제와는 별도로 조선 시대 건축적 조형미는 유교적 금욕주의나 중용사상을 바탕으로 한 기교를 부리지 않는 양식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전통 한옥의 실내 공간은 무엇보다도 규모면에서 도를 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웅장하거나 압도당하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간결하고 단아한 느낌을 준다. 우리의 전통 한옥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눈에 튀거나 과하지 않은, 정교하고 기품 있는 세련된 공간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그 공간의 장식 또한 너무 화려하지도 번잡스럽지도 않은 소박한 절제미를 보여 준다. 넘치지 않는 겸손함이 전통 한옥이 추구하는 가치의 표현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한옥은 건축 소재를 가공하거나 다듬지 않고 가능한 자연 그대로 사용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건축 자재들이 변형을 일으킨다 해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였다. 이는 건축적 공간을 인식함에 있어서 인간이 자연을 인간에게 편리하도록 계획하고 만들어 사용하겠다는 태도가 아닌, 인간이 환경 속에 순응하면서 살아가겠다는 삶의 철학적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자연에 순응함과 동시에 인간은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만을 갖는 것이 아닌, 환경을 생활에 담는 공간을 창조해 낸 것이다. 인위적이 아닌, 환경을 받아들이고 담는 공간으로 지어진 공간은 세월이 변화하는 과정을 담아서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를 질리지 않게 하고 편안하게 해준다. 질그릇은 점토로 만들어지지만 그것을 쓸모 있게 하는 것은 질그릇 내부의 공간이다. 창과 문은 방의 쓰임을 위해 만들지만, 거기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빈 공간이다. 그릇은 형태로 존재하지만, 그릇을 쓸모 있게 만드는 것은 내부의 빈 공간이다. 이처럼 건축 공간은 비워진 없음이 아닌 ‘채워져 있는 빈 것’ 이라 할 수 있다. 노자 사상에 의하면 공간은 비어있지만, 하나의 실체로서 파악 가능한 공간이다. 한국의 전통 한옥은 이와 같은 삶과 가치에 대한 사색의 깊이와 무게가 실려 있는 공간 미학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대부 주거의 공간은 채 단위로 사랑채와 사랑마당, 안채와 안마당, 행랑채와 행랑마당 및 후원 별당 등으로 공간 배치를 하고 있다. 집의 주인내외가 사는 공간과 집안일을 돕는 하인들의 공간 그리고 신성한 공간으로 사당이 있다. 행랑채와 행랑마당은 하인들의 거처로서 방, 부엌, 창고, 마구간 등으로 구성되며 하인들의 옥외 작업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사랑채와 사랑마당은 주인의 거실, 서재, 접객 등 주거의 외부적 기능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가부장을 중심으로 한 남성적, 사회적, 개방적 성격의 공간이다. 대청, 누마루, 침방 등으로 구성된다. 안채와 안마당은 부녀자의 거처로서 가사, 취사 등 내부적 기능 공간이며 안방을 중심으로 건넌방, 대청, 부엌, 찬방 등으로 구성된다. 사당은 조상 위패의 보관과 제례의식을 위한 공간으로서 대지 내 일부에 담을 쌓고 별채로 건립하였다. 후원 별당은 주거의 후면에 정자, 수목 등으로 정원을 조성하였다.

중앙정부 불신이 문중. 씨족사회로 발전     

조선시대 지배 계급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문중이었다. 그 다음으로 같은 스승을 중심으로 하는 동문수학의 학문적 결속체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국가보다도 더 소중하게 지켜야 할 가치와 도덕 체계는 씨족사회를 이끌어 주고 있는 조상이었다. 조상은 사당이라고 하는 별도의 공간에 머물렀다. 조상 중심의 조선 시대에 가족구성원 간 서열은 철저한 남자 형제 우위였다. 특히 남성 형제 가운데 장남은 문중을 대표하는 종손 승계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가 정착된 것은 조선 중기이후 생긴 변화이다. 조선 전기까지는 재산도 자녀가 똑같이 상속을 받았었다. 실제로 남성 중심의 불합리한 재산 분할이 시작된 시기는 유가 가례가 완전히 정착된 17세기부터다. 제사 봉행의 중요도가 높아지고 재산 상속도 장자나 남자들 중심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남성의 지위가 주택에도 반영되어 남성의 공간으로 알려진 사랑채의 규모가 대체로 주택 전체의 규모에 비해 크고 웅장해진 것으로 보인다. 사당의 출입은 오직 종손만이 중앙 문으로 드나들 수 있었고 다른 자손들은 좌우의 옆문을 사용하도록 함으로써 제사를 받드는 종손의 권위를 높여주려 하였다. 물론 상류 가옥에 사당을 짓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기인 14세기 중엽부터이다. 조선 시대에 와서는 건국 초기부터 사당의 건립을 적극 권장하였으며, 단지 사당이 없다는 이유로 귀족을 징계하였으며, 출가한 승려들 또한 유교적 상례를 치르도록 강제하였다. 이와 같은 행위는 조선 전 세대를 지배했다. 현대 사회에서 헌법으로 보장되고 있는 ‘종교 신앙’의 자유보다, 유교 의례를 통한 가례를 행하지 않았을 때 사회적 질타를 받는 것 역시 그 근원은 조상숭배에 있으며, 사당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시대가 지나면서 사당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높아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집을 건축할 때에는 무엇보다도 사당 터를 먼저 배치했으며 다른 건물보다 높이 짓거나 높은 자리에 세웠다. 일단 한 번 건축한 사당은 헐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당이 세워진 집은 의당 종손이 대대로 살게 마련이었다.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혈도 당연히 사당 터에 뭉쳐 있다고 믿었다. 당시에는 사당은 집안의 중심이었으며, 모든 복의 근원지이기도 하였다. 가옥의 좌향이 남향이거나 이에 준하는 좌향인 경우에는 사당은 동북쪽에 배치하는 것이 원칙이고, 사랑채도 동남쪽에 두었다. 사당을 동북쪽에 세웠음에도 사랑채를 서남쪽에 배치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부득이 사당을 서북쪽에 건축하게 되면 사랑채도 서남쪽에 건축하였다. 이렇듯 사당과 사랑채는 한 집안 안에서는 같은 방향에 건축하여 거리상으로도 가장 가깝게 세웠다. 사당을 동북쪽에 세우고 사랑채를 이에 가깝게 두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동북쪽이 해가 뜨는 양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해는 생명과 탄생의 상징이요 부활을 뜻하며 생명력을 성장시켜 주는 존재이다. 또한 동북은 해가 일찍 비치고 밝은 기운이 가득한 방향이다. 조상의 혼백을 모시는 신성한 공간으로서의 사당을 두기에 가장 적합한 터다. 또한 사랑채는 사당의 실질적인 관리자인 남성들이 거주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사당과 가장 가깝게 동남에 배치하게 된다. 남성의 거주처도 양의 방향에 두려는 배려이기도 하다. 이는 한 가옥을 남성들의 공간과 여성들의 공간으로 분할하는 원칙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당은 단간으로 하나 3칸 건물이 대부분이며 주위에는 따로 담을 두르고 문을 붙여 출입문으로 삼는다. (삼국유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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